루브르 장식예술 미술관
나는 그 밤 그 곳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내가 거기 있었다고 증언해줄 사람도 없고, 모두 낯선 프랑스인들과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건 꿈이었어, 상상 속이었어' 라고 누군가 말한다해도 충분히 믿을법한 비현실성이 거기 있었다.
메일을 받고 찾아간 만남의 장소.
일고 여덟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주춤주춤 다가가 눈을 맞추려고 시도하고 있자니
강사인 듯한 중년의 프랑스 여인이 나에게 다가와 뭐라고 한다.
못알아 들었지만 oui, oui, je m'appelle Lee, eun jeong Lee.
그녀가 원했던 답이었는지 명단을 보고 연필로 체크를 한다.
깡 마르고 화장기라고는 없는 얼굴에 수수하고 낡은 옷차림의 강사는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보였다.
첫 수업에서는 보통 강사의 자기 소개와 돌아가며 자기 소개하기와, 미소실린 첫 인사와 짧은 스피치 따위등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부수적인 것들은 일단 넣어두고, 따라오라는 손짓만 한다.
얼마나 프랑스 다운 강사님인지! tres chic!
설레이는 발걸음으로 무리를 따라 대리석 계단을 올라갔다.
수업이 진행될 동안 우리를 모니터할 미술관쪽 관리직원 한 명만이 방 앞에 서있었다.
밤의 미술관은 너무나 고요해서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수업을 위해 개관이 허가된 한 개의 방 안에 도착하자, 강사는 드디어 한결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과정 소개와 오늘 그릴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 강사도 처음으로 하는 수업인것 같았다. 그 외에는.....불어라....온 신경을 집중하고 알아 들은 것은, 강사가 처음 해 보는 수업이라는 것 뿐이었다....
뭔가를 어떻게 하라고 한참 설명을 하더니, 사람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각자 원하는 작품을 찾아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갔던 방은 조각상과 회화와 자수 작품들이 다양하게 있던 곳으로
중동이나 아시아 쪽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던 것 같았다.
나는 홀 중앙에 우뚝 서있던 조각상을 그려보기로 했다.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워보지 않아 비율부터 엉망이었다. 이렇게 내던져지듯 시작하는 수업이 나는 참으로 낯설었다. 늘 선생님의 지도가 있어야만 마음이 편했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특히 미술에서는 아무도 내 종이위에 펜을 대거나, 스킬을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수강생이 그림에 초보이든 프로이든, 일단 감상을 하고, 평을 하고, 그 후에 제안을 했다.
물론 내가 불어를 100% 이해하지 못해서 강사의 의도를 다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나를 한국식으로 가르치려고 했으면 내가 조각상을 그리기 시작한 10분 후부터 내 목탄 자루를 잡아 들고 시범을 보여줬을 것이다.
첫 수업의 준비물은 종이와 목탄이었다.
다양한 오브제를 목탄으로 직관적이고 거칠게 표현해 보는 시간이었다.
목탄으로 그린 조각상 작품은 엉망이고 맘에 한참 안들었지만, 전혀 속상하지 않고 가슴이 뛰었다
내가 이 곳에, 프랑스 파리 안의 루브르 장식예술 미술관 안에, 세계적인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에
밤에, 그림을 그리러 와 있다는 이 엄청난 특혜가 엔돌핀을 솟구치게 했다.
아주 아주 오래된 나무 바닥과 아주 아주 오래된 액자와 아주 아주 오래된 복도와 바닥의 대리석.
이 미술관 자체가 작품이었고 오랜 이야기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많은 관람객들을 내보내고 쉬려고 하는 밤, 갑자기 찾아든 이 불청객들을
미술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의 서투른 작품을 들여다 보고 있을까, 아니면 미술관조차 불친절하여 휴식조차 편하게 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 투덜거리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루브르 본관이나 오르세와 같이 많은 인파가 몰리는 미술관에 비해 한적하던 차에 오랜만에 찾아온 걸음들이 반가울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차오르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 곳의 공기마저 놓치고 싶지 않아 숨을 깊게 들이마셨을 때 맡았던 오래된 먼지냄새가 기억난다.
중고서점에서 나는 오랜 종이의 냄새와 비슷한데, 조금 더 향이 섞여있는. 물감과 돌과 나무의 냄새일까.
여기저기 주저앉아 맘에 드는걸 그리고 있는 파리지앵들의 모습도 예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박물관 미술관을 다니며 그림들을 감상하는게 익숙한 그들은
미술관에 퍼질러 앉는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여기 앉아도 되나?' 류의 조심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동네 공원에 놀러 온 듯 편한 모습이었다.
아, 부럽다.
조심스러움과 함께 없는 것 또하나는, 눈이 마주치면 싱긋 웃거나 간단히 인사하는 미국식? 리액션이었다.
일단 지나가는 사람에 관심이 없었고 - 내가 거기서 유일한 동양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눈이라도 마주치면 '뭐 어쩌라고' 또는 '용건있냐' 란 눈빛을 보내기 일쑤였다.
한국에서 비슷한 클래스를 가면, 일단 하나의 오브제를 보고 똑같이 그리기 시작하고,
옆 사람이 그린걸 훔쳐보며 어설픈 칭찬을 건네고,
강사가 와서 '여기는 이런 느낌으로 해보세요' 라며 내 그림을 수정? 개선? 해주고,
그러다 쉬는 시간에는 커피를 마시며 조금 수다를 떨다가
정말 잘 그리는 사람 주위에 둥그렇게 몰려들어 어쩜 이렇게 잘 그리시냐고 배우셨냐고
호들갑을 떨게 마련인데.
여기는 남의 그림에 관심이 없다.
애초에 같은 걸 그리지 않는다.
남에게도 관심이 없다.
정해진 쉬는 시간도 없다.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참 자유로웠다.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왜냐면 나도 남한테 관심이 없거든.
하지만 아름다운 것에는 남자든 여자든 사물이든 어쩔수 없이 관심이 간다.
사람 자체가 예술인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창틀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길래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작품을 훔쳐보았는데,
세상에, 이리도 불공평한 세상이라니.
그 자신만큼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해나가는데, 선들이 부드럽고 섬세하고, 일단 비율이 완벽했다.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tres beau! 라고 했지만
그 여인은 보일듯 말듯한 썩소를 날리곤 다시 그림만 그렸다.
그래, 여기는 프랑스구나. 가식이 없는 나라 (좋게 말하면).
3시간이 지나고 미술관을 나와 강사에게 au revoir! 를 외치곤
지하 주차장으로 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 가로등불이 고요히 켜진 히볼리 가 rue de rivoli 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마 그 날 밤 나는 밤새도록 가슴이 뛰어 잘 자지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