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를 변호하다
좀 된 우스개 소리인데,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줌마.
20대였던 나는 그 농담에 까르르 웃었었다. 이런 맞장구도 쳤던 것 같다.
"맞아 맞아, 아줌마들 진짜 장난 아니야~ 어제도 퇴근하는데 지하철에서 어떤 아줌마가 통화를 하는데 거의 안내방송 수준인거 알어? 사람도 엄청 많고 다 쳐다보는데도 아랑곳 않드라. 사람들 눈까지 마주봐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싸우는 건지 대화를 하는건지...와 진짜 세상 혼자 사나봐."
아줌마들에게는 몇가지 명백한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같은 미용실을 다니는 건지, 한껏 뽕을 살린 파마를 하고
피부 톤따위는 무시한 과감한 메이크업으로 핸드폰과 안경알에 파운데이션이 흠뻑 묻어나기 일쑤였으며
눈에는 일종의 광기어린 호기심 또는 약간의 분노가 섞여있었다.
또한 그녀들은 억척스럽다는 표현과 거의 동일시되는 존재였다.
한순간의 편안함 - 지하철 빈자리와 같은.
아주 조금의 혜택 - 백화점 사은품으로 받는 키친타올 두 롤과 같은. 또는 시장에서의 500원 흥정과 같은 - 에 열정적으로 온 몸을 던지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을 사람들은 희화화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 정말 싫다. 왜 저럴까. 난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그런데
내가 그 아줌마가 되었다.
아줌마가 되고 나서 나는 알게되었다.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빠지고 힘이 없어진다는 것을. 특히 아이를 낳고 난 후의 여자의 머리카락은 정말 맥아리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모양보다는 볼륨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피부의 생기가 없어지고 조금씩 무채색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그래서 웜톤쿨톤이고 나발이고 화사하고 밝은 화장과 옷에 손이 가게 된다는 것을. 모노톤으로 입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나 외에도 책임져야 할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을. 남편과 아이들. 확장되고 깊어진 돌봄의 울타리를 감당하기가 가끔은 버겁다는 것을. 나 혼자 살기도 힘든데 다른 누군가를 키우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큰 책임인지를. 그래서 5분이라도 앉아 쉬고 싶고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어진다는 것을.
또 하나를 새롭게 알게되었다.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만국 공통. 아줌마 나이 무관.
바로,
남이 해준 음식.
짜릿한 외식. 멋진 배달음식.
아줌마는 아가씨의 반댓말이면서
엄마, 아내, 며느리의 동의어다.
왜 엄마, 아내, 며느리가 아줌마라는 말로 농담거리가 되어야 하는것인지
아니 애초에 아줌마가 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된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주위 지인이나 친척들 중 정말 독특하고 마이웨이인 아줌마와 할머니들을 보면 확실히 외계인 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누가 뭐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녀들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간다. 대체 왜 그러실까. 자식들 생각 좀 하시지. 왜 그리 심술을 부리실까. 마음 좀 좋게 쓰시지.
주변 자식과 가족들에게 뒷담화의 대상이 되기 일쑤고,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이 잇따른다.
왜 그런지도, 나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그 아줌마들은 평생 애써온 것이다.
나의 욕구를 참고, 나의 어른들과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쓰고 배려해온 것이다.
한 두번이야 쉽지 몇 십년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다 가족들이 나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순간이 오면
그래서 나의 노력을 그들의 권리라 생각하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불평하는 때가 되면
억울하고 서럽기까지 하겠지.
가족의 행복이 나의 행복?
아니. 나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데 말이다.
그렇게 나의 젊음을 사회 질서와 분위기 맞춤과 주변 인물들에게 소비하고 난 아줌마들은
그냥 때려치고 싶어진 것 아닐까.
에이씨, 몰라. 나 하고 싶은대로 할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변한척 하거나, 변하려고 고군분투할 뿐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너무 많이 애쓰느라 수십 수백번의 번아웃을 경험한 그녀들.
수많은 크기의 상처와 실망과 고통을 지나온 아줌마들은 이제 자조와 체념 섞인 안색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도 아기들을 보면 소녀처럼 꽃피어나는 미소라니.
처음보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아기를 들여다보고 가던 수많은 아줌마와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그녀들이 갓난쟁이의 엄마였을 때를 떠올리게 했을까.
드라마의 인물이 바로 내 자식들인것 마냥 혼연일체가 되어 흥분하는 그녀들
달달한 로맨스에 숨죽여 설레여하는 그녀들
아줌마는 열심히 살 뿐이다.
대부분 참으며, 틈틈이 즐기며, 가끔 화내며.
'나의 아저씨' 가 명작 힐링 드라마로 몇 년째 칭송 받는다.
만약 '나의 아줌마'였다면 아이유에게 맥주를 그 따위로 따라주진 않았을 것이다.
종업원을 불러서,
이 집에서 제일로 시원한 맥주를 냉장고 안쪽에서 꺼내달라고 (아니 직접 꺼내러 갔을지도 모르지)
구체적으로 요구를 한 뒤,
정확히 맥주와 거품의 양이 8:2 정도의 비율로 멋지게 따라줬을 것이다.
물론 얼음같이 시원한 맥주와 찰떡같이 어울리는 안주를 최소 5종 이상 구비했겠지.
아줌마는 진심으로 위로하니까.
위로에 진심이니까.
우리는 서로가 안쓰럽고 예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