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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14. 2022

화엄의 세계, 판전

봉은사 판전

 2020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http://www.bongeunsa.org/) 사보에 글을 쓰고 있다. 2022년이 되었으니 어느새 3년 차가 되었다. 사보에 글을 쓰면서 불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평생 읽어 보지 않았던 <삼국유사>도 읽어보고, <한글대장경>도 읽어보고(물론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서, 둘 다 한글 번역본을 인터넷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각종 논문을 찾아보았다. 쓰면서 내가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구나 하고 좌절하기도 여러 번이요, 글쓰기가 이렇게 재밌구나 하고 몰입하기도 어려 번이었다. 자료 더미에 묻혀 세상사 시름을 잊고 신선놀음에 빠지기도 부지기수였다. 첫 책 출간 이후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는 내가 작가라는 타이틀을 그나마 유지하게 해 준 것도 이 일이었다. 여러모로 고마운 일감이라 이런 기회가 온 것이 가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불교 지식은 미천하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보이기도 하고 다룬 주제도 쉬운 것들이라 내용은 어렵지 않다. 봉은사 홈페이지에 가면 웹북 형태로 사보를 볼 수 있지만 따로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간 쓴 내용이 홈페이지에 갇혀있는 게 좀 아쉽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기존에 쓴 원고를 브런치에 올려보려고 한다. 특히 2020년에 쓴 글은 봉은사 전각 판전에 관련된 내용인데 흥미로운 일화들이 많아서 쓰면서도 무척 흥분하기도 했다. 판전은 현재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기도 하고,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글씨가 현판으로 남아있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불자들 역시 나무에 새긴 경전, 즉 경판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떠올리기 쉽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에 3천 매가 넘는 경판이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관심 있는 소수를 위해 그간 쓴 글을 올린다. 사보에서는 분량 제한으로 참고자료를 넣지 못했는데 브런치에 올리는 글은 웬만하면 참고자료를 넣을 계획이다. 보낸 원고는 편집부에서 수정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동소이해서 처음에 쓴 원고 그대로 올린다. 한주에 한두 편 정도씩 올릴 계획이다. 전공자가 아니기에 틀린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알려주시면 너무 감사하겠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화엄의 세계, 판전


 


경전이 흔하고 법문이 허다하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는 이제 옛말일까. 스마트폰 하나면 쉽고, 다양하고, 재미있게 부처님 가르침을 만날 수 있다. 불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한자를 몰라도 괜찮다. 부처님 법 공부하기가 참으로 편해졌다. 

 약 160년 전, 대다수 민중들이 하루하루 먹고 살기를 고민하던 시절에 율사律師로 이름난 남호 영기(甫湖永奇, 1820~1872) 스님은 경전을 간행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당대 고승들과 뜻을 모아 왕실의 내탕금內帑金과 중신들의 시주를 모으고, 일을 주선하고, 장인을 초청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855년 봉은사에서『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이하 『화엄경』)를 나무판에 새기는 판각 불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856년 경판 보관 시설인 판전板殿을 짓고 완성된 경판을 봉안했다. 과천에 머물면서 봉은사를 오가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판전 현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을 써서 불사에 힘을 보탰다. 

 불교 경전을 인쇄하기 위해 새긴 목판을 경판經板이라 하고, 경판을 보관하는 건물을 대장전, 장경각, 판전, 법보전 등으로 부른다. 온전히 경판 보관을 위해 세워졌고, 건립 기록이 남아있으며, 원형을 유지하고, 현재에도 경판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하며, 100년이 넘은 경판 보관 건물은 현재 극히 소수만 남아있는데 해인사 장경판전, 송광사 화엄전, 봉은사 판전, 예천 용문사 대장전 등이 그 예다. 

 한옥의 규모를 이야기할 때 기둥과 기둥 사이를 단위로 사용한다. 이를 간間 또는 칸이라 한다. 판전은 정면(앞면) 5칸, 측면(옆면) 3칸의 맞배집이다. 정면에는 띠살분합문을 달았는데 어칸(가운데 칸)만 4짝, 나머지 4칸은 3짝이다. 측면과 배면(뒷면)에는 크게 창을 내어 판문(板門, 널빤지로 만든 문)을 달고, 칸 아래에 통풍구를 뚫었다. 앞에는 문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 옆과 뒤에는 커다란 판문 11개와 통풍구. 이렇게 판전은 벽이 아니라 창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판은 습도나 온도가 안 맞으면 뒤틀리고, 곰팡이가 슬어 썩기 쉽기 때문에 통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람의 길을 열어 둔 판전의 독특한 구조가 경판을 보존하는 셈이다.   

 판전은 그 자체로 화엄세계다. 판전의 모든 것이 『화엄경』에 의거한다.

 판전의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걸어둔 글씨)은 『화엄경』「입법계품」의 글귀다.

 佛智廣大同虛空(불지광대동허공, 부처님 지혜 광대하사 허공 같아)

 普徧一切衆生心(보변일체중생심, 널리 일체중생 마음에 두루 미치니)

 悉了世間諸妄想(실료세간제망상, 세상의 모든 망상 모두 아시되) 

 不起種種異分別(불기종종이분별, 여러 가지 다른 분별을 내지 않으시고)

 一念悉知三世法(일념실지삼세법, 한 생각에 삼세의 법을 아사)

 亦了一切眾生根(역료일체중생근, 또한 모든 중생의 근기를 분별하시네)

 판전 안으로 들어가면 불상과 비로자나불화(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2호)를 모신 불단이 정면에 보인다. 판전이 완공되고 30년이 지난 1886년, 등운 수은(騰雲修隱) 스님이 화주가 되어 상궁 8명의 시주를 받아 불화를 조성했다. 정중앙에는 화엄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지권인智拳印 수인을 하고 있다. 아난존자, 가섭존자, 문수보살, 보현보살, 사천왕은 부처님을 외호外護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비로자나불화, 칠성도, 산신도가 함께 조성되었으나 칠성도는 1952년 새로 지은 북극보전으로 옮겼고, 산신도는 남아있지 않다. 

 판전 왼쪽 벽에는 1857년 조성된 신중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0호)가 봉안되어 있다.  화면 가득 부처님의 도량과 불법을 수호하는 39위位 화엄신중을 질서 정연하게 배치하였다. 

 경판은 판전 벽을 따라 ㄷ자 형태로 배치된 판가(板架, 판을 꽂는 선반)에 가로 또는 세로로 겹겹이 포개져있다. 불단 앞으로 기도와 인경(印經, 경판을 인쇄하는 작업)을 위해 우물마루가 깔려있으나 판가 아래는 흙바닥이다. 습기를 막고 통풍을 원활히 하기 위해 판가는 바닥에서 30cm 위에 설치되어있다.  

 2014~2019년 문화재청과 (재)불교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전국사찰 목판 일제조사>에 의하면 2018년 현재 봉은사 판전에 모셔진 경판은 13종 3503판이다. 『화엄경』3,190판(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84호) 외 다양한 경판이 모였다. 판수로 보면 해인사(고려대장경판과 기타 경판 약 87,000판/문화재청), 송광사(65종 3901판)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정대불사頂載佛事는 경판에 머리에 이고 도량을 도는 의식이다.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년에 한 번 경판을 밖으로 빼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쐬어 부식을 막기 위해서 시행하지만 신도들의 신심을 북돋우는 목적도 있다. 팔만대장경을 소장한 해인사에서 매년 음력 3월에 행하는 대장경 정대불사가 유명하다. 봉은사에서도 정기적으로 정대불사를 봉행하는데 경판을 보호하기 위해 『화엄경』을 인쇄한 인경본을 머리에 인다. 봉은사 정대불사가 유명해지면서 참여하는 인원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1856년에 완공된 판전은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대웅전, 법왕루, 선불당, 심검당이 위치한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어 1939년 대화재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손상이 생겨 2009~2010년 신중도를 해체‧수리하는 보존 처리 불사를, 2012년에는 판전 보수 불사를 진행 했다. 4개월간 천장과 기와 등 건물 내‧외부를 보수하고, 경판에 쌓인 먼지를 털고, 훈증소득을 하였다. 이때 경판 제작과 판전 건립을 기록한 상량문도 발견되었다. 2018년 판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5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경판은 경전을 찍어내는 본래의 임무에서 물러나 보존의 대상인 성보문화재가 되었다. 구전, 패엽, 책, 스마트폰으로 변해왔듯이 경전은 계속 형태를 바꾸어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허나 경전이 담고 있는 법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판전에서 봐야 할 것은 장엄한 화엄의 세계 그리고 법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선재동자가 깨달음의 세계에 다다른 그 길을 판전에서 찾기를 발원한다. 




(2020년 3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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