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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17. 2022

해동의 유마거사 추사 김정희


이학철이 그린 김정희 초상(1857년),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56년 13살의 상유현尙有鉉(1844~1923)은 어른들을 따라 봉은사에 갔다. 일대에 소문이 자자한, 다른 시대 사람(異代人) 같다는 노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봉은사에 도착한 상유현은 훗날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을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았다. 


 노인은 체격이 단소하고, 수염은 희기가 눈 같고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눈동자는 밝기가 칠같이 빛나고, 머리엔 머리카락이 없고, 스님들이 쓰는 대로 짠 원모를 썼으며 …(중략)… 손에 한 줄 염주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상유현은 노인이 연비燃臂(향불로 팔을 태우는 의식)하는 모습을 보았고, 매일 절 음식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은 ‘높고 귀한 분이 어찌 이렇게 불심佛心에 미망迷妄(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되었는지’ 궁금했다. 그가 만난 노인은 71살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였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유학자인 김정희는 요즘 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임금의 사위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높은 벼슬을 지냈고 김정희도 34살에 대과에 합격한 이후 승승장구했다. 

 영민한 머리와 부단한 노력으로 일찌감치 주목 받았던 김정희는 24살에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최고의 학자들을 만나고, 수많은 걸작을 보았다. 좋은 집안, 뛰어난 능력, 흔치 않은 경험. 자신만만한 젊은 선비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했고, 내가 청나라에서 직접 봐서 안다며 잘난 척도 곧잘 했다. 심미안도 높아 무척 까다롭게 굴었다. 그를 좋아하는 이도 많았지만 거만하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정쟁에 휘말려 55세에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8년 3개월간의  유배가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66세에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가서 1년 만에 풀려났다. 약 10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한글로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금슬 좋았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가장이 없는 동안 가세가 기울어 영조가 증조부에게 하사했던 집을 팔았다. 제주도에서는 풍토병에 시달렸고 북청에서는 추위에 시달렸다. 몸은 약해지고 마음은 외로움에 사무쳤다. 

 잘나가던 사내에게 닥친 시련. 그 숱한 원망과 울분을 어떻게 풀었을까. 추사는 젊어서 술도 제법 즐겼고, 장기, 바둑 같은 잡기에도 능했다. 그는 쾌락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대신 쓰고 쓰고 또 쓰고, 읽고 읽고 또 읽으며 적막함과 싸웠다. 인이 박혀버린 공부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 되었다. 사람들은 상처 난 마음을 채워주었다.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와 준 벗들, 까다로운 그의 요구를 물심양면 지원해준 가족들, 스승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한 제자들 그리고 유배지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 따스한 인연들이 교만함을 녹였다. 혹독한 유배 생활은 김정희에게 연기緣起의 엄중함을 깨닫게 해 준 시절이 아니었을까. 어쩌다 조선의 끄트머리로 유배를 왔는지, 누구에게 상처를 줬는지,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나는 과연 누구인지 그는 인생을 복기하며 홀로 잘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이때 학문으로 탐구하던 불교가 점차 신앙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추사 집안은 불교에 호의적이었다. 김한신이 영조에게 하사받은 충남 예산 용궁리 용산에는 화암사華巖寺가 있었다. 김한신은 아버지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절을 중건重建하여 집안의 원찰願刹(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로 삼았다.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때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에 시주하면서 추사에게 상량문을 쓰도록 했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추사는 ‘해동의 유마거사’라 불렸다. 평생 동안 수많은 스님들과 교류하고 불교를 공부하고 사찰의 현판을 써주었다. 불교용어도 자유자재로 썼고 게송도 잘 지었다. 사경도 많이 했다. 특히 반야심경을 많이 썼다. 30살에 만난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는 평생 동안 가장 믿고 의지하는 도반이요 지기였다. 추사가 가장 힘든 시기 불교는 지식에서 위안으로 종내 믿음이 되었다. 

 북청에서 풀려난 67세의 추사는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에 머물렀다. 담담한 나날이 이어졌다. 명성은 더욱 높아졌으나 여전히 쓸쓸하고 몸은 아팠다. 추사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고 봉은사에 자주 다니게 되었다. 이마저도 불편했는지 나중에는 아예 절 동쪽에 처소를 마련해 지내기도 하였다. 상유현이 『추사방현기秋史訪見記』에 기록한대로 말년의 추사는 스님처럼 살았다.

 1855년 남호 영기南湖永奇(1820~1871)스님이 『화엄경』을 판각하기위해 간경소를 차리고 불사를 시작했는데 추사에 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봉은사에 기거하던 추사는 판각 불사를 내내 지켜보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판각 불사와 함께하고 싶어 봉은사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겠다. 1856년 9월 말 판각이 끝나고 경판을 보관할 판전도 완성되었다. 추사는 판전의 현판을 썼다. 판전板殿 두 글자 옆에는 작은 글씨로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이라고 낙관했다. 추사의 글씨로 판각 불사는 마침표를 찍었다. 전하는 말로는 추사가 죽기 3일전에 쓴 글씨라고 한다. 추사는 10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판전 현판은 삼보에 귀의한 불제자 김정희가 불심으로 남긴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판전 왼쪽에는 봉은사와 추사의 인연을 기리는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紀績碑가 세워져있다. 기적비 옆에는 흥선대원군의 도움으로 봉은사 토지를 지켜낸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가 있다. 추사는 흥선대원군의 5촌 아저씨이자 스승이다. 제주도 유배에서 돌아와 한양에 머물 때 처음 인연을 맺어 추사가 죽기 전까지 교류하였다. 흥선대원군은 그리운 스승 김정희를 추억하기 위해 봉은사를 도와준 것은 아닐까. 나란히 선 비석에 사제의 정이 담겨있다. 옛 인연은 봉은사에서 안식을 찾았다. 돌고 돌아 부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봉은사 판전 현판,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2020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참고자료

1. 유홍준,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창비, 2018

2. 장승희, 「괴(怪)와 졸(拙)로 본 추사 김정희의 철학적 인간학」 ,『유학연구』제34집,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3. 유호선, 「추사 김정희의 불교시 연구」, 『한국불교학』 권 46호, 한국불교학회, 2006

4. 전상모, 「추사 김정희 예술에 나타난 「유마경」 수용의 흔적」, 『양명학』 제41호, 한국양명학회 2015

5. 금장태,  「김정희의 불교인식과 선학(禪學) 논변」,『종교와 문화』14권 ,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8

6. 선주선, 「추사 김정희의 불교의식과 예술관 연구」,『서예학연구』제5호, 한국서예학회, 2004

7. 이숭원,「선(禪)과 차(茶)와 시(詩)」,『인문논총』제32권, 서울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8.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조계종출판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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