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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25. 2022

흥선대원군과 판전

1870년, 봉은사 주지 호봉스님은 새로 세운 비석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恩寺賜牌混入農圃(은사사패혼입농포)  僊殿位田事訟有年(선전위전사송유년)
今焉歸正鐫石頌恩(금언귀정전석송은)  惟雲峴賜垂千萬禩(유운현사수천만사)
上之七年庚午六月(상지칠년경오유월) 日(일)  住持僧(주지승) 虎峰(호봉) 建(건)
왕실에서 받은 봉은사 땅이 주변 농토와 섞여 여러 해 동안 소유권 송사가 있었다.  
이제 바로 돌아감에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운현(흥선대원군)을 천만년 기리고자 한다.
고종 칠년 경오년(1870년) 6월 모일에 주지 호봉이 세우다     


 흥선대원군의 도움으로 봉은사 땅을 되찾았다. 하마터면 기약 없는 긴 싸움이 될 뻔했다. 이는 보통 은혜가 아니다. 호봉스님은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를 세우고 비각碑閣(비의 보존을 위해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을 설치했다. 곧 봉은사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비를 보게 되었고, 송사를 둘러싼 잡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 출처:서울포스트(http://www.seoulpost.co.kr/paper/news/print.php?newsno=25844)


 흥선대원군은 1864~1873년 고종의 섭정攝政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종횡무진 개혁 정책을 펼치느라 바빴을 대원군이 봉은사의 땅 분쟁에 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권좌에 앉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불교 후원 역시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수호하는 사찰과 역대 왕과 관계있는 사찰에 공명첩空名帖을 발급했고, 왕자탄생을 기원하며 많은 불사를 후원했다. 봉은사는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수호하는 능침사찰陵寢寺刹이다. 송사에서 봉은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왕실의 힘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세간에선 두 번째 이유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향한 보은報恩을 꼽는다.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지기 전까지 종친宗親 자격으로 얻은 명예직을 전전하며 궁핍하게 살았다. 그가 5촌 아저씨인 김정희와 연을 맺은 건 1849년으로 김정희가 64세, 이하응이 30세였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한양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다. 이하응의 편지와 선물을 받은 추사는 감사의 답장을 보냈다.      


뜻밖에 찾아 위문해 주신 성대한 은혜가 너무도 월등히 뛰어나서, 서신을 손에 쥐고는 가슴이 뭉클하여 스스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습니다.… (중략)… 내려주신 여러 가지 물품에 대해서는 …(중략)… 감격함과 부끄러운 마음이 함께 일어납니다. (완당전집 제2권. 서독書牘, 여석파與石坡, 제1신)     


 이하응은 김정희가 보내준 난보蘭譜를 보며 난을 치고, 글씨를 쓰며 힘든 시기를 견뎠다. 추사가 북청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해배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이도 이하응이었다. 둘의 교류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이하응이 보낸 난 그림에 추사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는 이 노부老夫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 작품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이에게 면전에서 아첨하는 하나의 꾸민 말이 아닙니다. (완당전집 제2권. 서독, 여석파, 제5신)     


 이하응이 자신의 난초 그림을 화첩으로 꾸며 제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추사는 흔쾌히 허락했다.     


석파는 난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工이다. … (중략)…  나에게 요구하고 싶어 하는 자는 석파에게 요구함이 옳을 것이다. (완당전집, 제6권, 제발題跋, 제석파난권題石坡蘭卷) 


 극찬이다. 이하응이 그린 난은 호를 따서 ‘석파란’이라고 한다. 이하응은 곤궁한 시절에 난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추사가 인정했듯이 이하응은 그림과 글씨의 대가가 되었다.


이하응의 군란도, 출처:조선일보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13/2020031301419.html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는 용단승설차龍團勝雪茶에 얽힌 이야기다. 이하응은 당대의 유명한 지관地官 정만인에게 명당 2곳을 추천 받았다. 두 명의 천자가 나오는 이대제왕지지二代帝王之地와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 중 이하응이 선택한 것은 이대제왕지지 자리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그곳에는 이미 가야사가 있어 이하응은 우여곡절 끝에 절을 폐사시키고 오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했다.  무너뜨린 석탑에서 여러 가지 복장 유물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용단승설차였다. 이하응은 차 네 덩이 중 한 덩이를 이상적李尙迪(1803~1865)에게 보냈다.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송나라 때 만든 소룡단小龍團 차를 얻었다며 초대의 편지를 보냈는데 소룡단이 바로 용단승설차다. 이하응이 이상적에게 보낸 차가 추사에게 갔는지 아니면 이하응이 직접 추사에게 보냈는지 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700년 묵은 귀한 차를 맛보게 되었다.

 이하응에게 김정희는 자애롭고 고마운 스승이었다. 김정희는 34살이나 어린 그에게 항상 격식을 차려 깍듯이 대했고, 보내온 작품에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명성이 자자한 추사의 격찬은 ‘상갓집 개’, ‘파락호’로 불리며 무시당하고 비난받던 이하응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뜨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1856년 추사는 세상을 떠났고 7년 뒤인 1863년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금의환향했지만 정작 추사에게는 자신의 성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훗날 과천을 지나며 ‘노완老阮 고선생古先生을 깊이 사모하노라’는 시를 지어 스승을 회상하고, 운현궁 사랑채에는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노안당老安堂’ 현판을 걸었다. 스승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하응은 추사가 봉은사에서 스님처럼 지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친척이자 사제지간인 두 사람은 살아생전 봉은사에서 만나 환담을 나누었을까. 가능성은 있지만 기록은 없다. 김정희 사후 제자들은 남겨진 글과 편지를 모아 방대한 양의 완당전집阮堂全集을 펴냈지만 흥선대원군은 문집을 남기지 않았다. 자료가 많지 않아 두 사람의 교류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후세에 남은 건 그저 몇 가지 정황 뿐. 허나 추사의 자취가 남은 봉은사가 흥선대원군에게 아주 특별한 사찰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못다 한 사제의 인연은 훗날 봉은사에서 이어졌다. 영세불망비가 세워지고 113년 뒤인 1983년 추사김정희선생기적비秋史金正喜先生紀績碑가 세워졌다. 부처님의 품안에서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아들, 며느리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와 척을 지고, 죽을 때까지 권력에 집착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흥선대원군이지만 평생의 스승을 만나는 복을 누렸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우리 주변에는 나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좋은 스승이 많다. 영세불망비를 보며 기원한다. 이생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복, 좋은 스승이 되는 복을 지어야지. 인연은 언젠가 돌아오기에.


(2020년 5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참고자료

1. 이정주, 「흥선대원군의 불교후원과 그 정치적 의미」 ,『역사와 담론』73, 호서사학회, 2016,

2. 오경후,「조선후기 왕실의 불교신앙과 화계사의 역할」 ,『인문과학연구』제20집,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3. 김정숙, 「예술가로서의 이하응의 생애와 사상」 ,『정신문화연구』26권 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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