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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Feb 15. 2022

항마촉지인을 한 노사나 부처님

판전 석불좌상

   

1. 판전 석불과 비로자나불화, 출처: 불교신문

 



 봉은사 판전은 명성이 높은 전각이다. 특히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썼다고 알려진 현판이 유명해 사시사철 참배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현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호, 『화엄경華嚴經』을 주석한 소疏와 초鈔를 합친『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初』를 판각한 목판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4호, 신중도神衆圖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30호, 비로자나불화毘盧遮那佛畵는 서울시 유형문화제 제232호이고, 판전 건물은 2018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25호로 지정되었다. 판전의 모든 것이 성보문화재이다. 그런데 이 화려한 명성에서 외떨어진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불상(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유명하지도 않다. 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이면서 불보살님께 기도를 올리는 법당法堂이다. 일반적으로 불상은 법당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판전에서는 오히려 소외된 느낌이다. 


 판전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비로자나불화와 불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불상은 불화 속 비로자나 부처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아 왜소하고 수수하게 보인다. 조선시대의 불상은 허리가 굽고, 머리가 커지고, 다리가 짧아지고, 어깨가 짓눌려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판전 불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의 수인手印(손 모양)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선정에 들어 위없는 깨달음에 다다르려 하자 악마의 왕 파순은 여러 방법으로 태자를 방해했다. 달콤한 말로 회유하고, 아리따운 딸들을 보내 유혹하고, 무기와 군대로 위협을 가하기도 했지만 태자를 막을 수 없었다. 태자가 쌓은 공덕을 증명할 이가 아무도 없다는 파순의 말에 태자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대지여, 나를 위해 증언해 주십시오.” 태자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땅을 누르자 대지가 크게 흔들리고 대지의 여신이 솟아올라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고 외쳤다. 파순은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항마촉지인은 마군의 항복을 받고 정각正覺(올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순간을 표현한 수인으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한 다리 가운데 놓고,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늘어뜨려 손가락 끝이 아래쪽을 향하게 한다. 그렇다면 판전 불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일까?

 

 판전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경판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전각이다. 1857년에 봉안한 신중도나 1886년에 봉안한 비로자나불화까지 모든 것이 『화엄경』에 의거해서 조성되었다. 그런데 불상은 『화엄경』의 교주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2018년에 발행한 봉은사 사지에 의하면 1954년 출토된 「복장기」에 노사나盧舍那 부처님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항마촉지인을 한 노사나 부처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불자가 아니더라도 석가모니 부처님 하면 석굴암 본존불을 비롯한 여러 불상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반면 노사나 부처님은 특별히 생각나는 이미지가 없다. 중국 허난성 낙양洛陽(뤄양)에 있는 용문龍門(룽먼)석굴을 방문했던 사람이라면 크기가 17m에 이르는 거대한 노사나불이 생각나지 않을까 한다. 노사나불은 압도적인 크기뿐만 아니라 수려한 상호相好(얼굴)로도 유명하다. 대체로 불상은 남성적인 이미지가, 보살상은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예외적으로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은 어머니의 이미지가 있어 여성적으로 표현된다. 많은 사람들이 용문석굴 노사나불의 상호가 여성스럽다고 말한다. 항간에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를 모델로 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전통적인 여성상 대신 당당한 붓다의 위엄이 서린 노사나불은 다부지고 기품 있다. 그 고매한 아름다움에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노사나불 불상과 불화가 적지 않게 있다. 그럼에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몰라서 스쳐 지나쳤을 가능성이 크다.  


 

2. 용문석굴 노사나 대불, 출처: 주간경향




 노사나 부처님을 알려면 비로자나 부처님을 알아야한다. ‘광명’ 또는 ‘태양’이라는 뜻의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毗盧遮那라고 하며 노사나, 비로절나鞞嚧折那, 폐로자나吠嚧遮那, 자나遮那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3종의 한문 번역본 중 5세기 동진 시대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각현覺賢)가 번역한 60화엄에서는 노사나불로 번역하였고, 7세기 실차난타實叉難陀(희학喜學)가 번역한 80화엄에서는 비로자나불로 번역하였다. 

 

 또 하나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삼신불三身佛이다. 삼신불 사상은 대승불교가 등장하면서 나타났다. 삼신불은 법신報身 비로자나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법신은 영원불변하고 유일한 법을 부처님으로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보신은 과거 수행으로 지은 공덕과 복덕의 과보로 모든 이상적인 덕을 갖춘 부처님이다. 화신은 다양한 방편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부처님이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대광명전大光明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대적광전, 대광명전에는 삼신불을 모시고 후불탱화로 삼신불회도三身佛會圖를 봉안한다. 비로전, 화엄전에는 비로자나불만 모시고 후불탱화로 비로자나불화를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삼신불상과 삼신불회도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부처님 왼쪽(보는 사람 기준 오른쪽)에는 설법인說法印을 한 노사나불을, 부처님 오른쪽(보는 사람 기준 왼쪽)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을 배치한다. 노사나불은 특이하게 보살의 형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화려하고 높은 보관寶冠(보석으로 꾸민 왕관)을 쓰고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과 다양한 문양文樣(무늬)으로 장엄한 천의天衣(천인이나 선녀의 옷)를 입은 화려한 모습이어서 보살로 오인되기도 한다. 수인은 주로 설법인을 취한다. 양손을 들어 손바닥이 위로 가게 손목을 젖히고 엄지와 검지를 살짝 붙여 동그라미를 만든다. 동그라미는 법의 바퀴를 의미한다. 


3. 구례 화엄사 삼신불좌살(왼쪽부터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출처:연합뉴스



 화엄사상이 크게 유행한 우리나라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사찰이 많아 불상이나 탱화, 괘불掛佛로 노사나 부처님을 친견할 기회가 많다.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모신 사찰은 거의 없으나 노사나불을 주불로 그린 괘불은 여러 점이 있다. 공주 신원사, 예산 수덕사, 여수 흥국사, 영천 수도사, 천안 광덕사 등의 노사나불괘불탱에서 보살의 형상으로 표현한 노사나불을 확인할 수 있다. 멀게만 느껴진 노사나 부처님이 실은 가까이에 계셨던 셈이다. 


 다시 판전으로 돌아가 불상을 바라보자. 살짝 허리를 굽히고, 결가부좌를 하고, 양쪽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通肩 가사를 입고,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입가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동해 삼화사 대웅전에도 노사나불상이 있다. 통일신라 말~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철조노사나불좌상인데 불상 뒷면에 명문이 있어 노사나불임을 알 수 있다. 결가부좌와 통견 가사는 판전 노사나불과 같지만 수인이 다르다. 양손이 없었으나 팔의 위치상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오른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위로 들고, 왼손은 손바닥이 보이게 아래로 내린 모양)으로 추정되어 손을 복원하였다. 판전과 삼화사는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모셨다는 점에서 희유하다.  


4.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불좌상, 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수인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불상을 조성할 때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 항마촉지인을 한 노사나 부처님은 참으로 특이한 예가 아닐 수 없다. 기록이 없어 어떤 의도나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록 지금은 다른 성보문화재에 가려 불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지만 언젠가 그 비밀이 밝혀지길 기대해본다.  

 

 화엄경판을 모신 전각 안 비로자나불화 앞에 항마촉지인을 한 노사나 부처님은 형식은 다르지만 삼신불을 떠올리게 한다. 경전과 종파에 따라 삼신의 정의와 위상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진리는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삼신즉일불三身卽一佛 일불즉삼신一佛卽三身’에는 이견이 없다.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이 하나이자 셋, 셋이자 하나로 나투는 판전에서는 오늘도 화엄세계를 장엄하는 불자들의 기도가 이어진다.  



나무화장세계해南無華藏世界海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

현재설법노사나現在說法盧舍那 석가모니제여래釋伽牟尼諸如來


바다와 같이 다함이 없는 화장세계의 비로자나 부처님의 참된 법신과

현재의 법을 설하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부처님과 모든 여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2020년 7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사진 출처

1. 불교신문, [한국 산사 불화기행] <5> 수도산 봉은사 판전 ‘비로자나불도’. 2020.03.26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184

2. 주간경향,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뤄양… 용문석굴의 ‘노사나불’ 모델은 누구일까] 2016. 02.02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602020947321&code=115#c2b

3. 연합뉴스, 높이 3m 초대형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국보 된다. 2020. 04.28 

https://www.yna.co.kr/view/AKR20210428043200005 

4. 국가문화유산포털,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23212920000&pageNo=1_1_2_0




참고자료

1. 유근자, 「비로자나 삼불상을 중심으로 본 조선후기 화엄미술의 특징」, 『한국불교학회 학술발표논문집』권 1호,  한국불교학회, 2015 

2. 『천년의 향기가 숨쉬는 신행도량 봉은사』,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2018

3.  자현, 『사찰의 상징세계』, 불광출판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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