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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ul 15. 2022

판전 비로자나불화

 

봉은사 판전 비로자나불화 (출처: 문화유산채널)



 주지 호봉스님은 차를 내렸다. 고요한 방에 그윽한 차 향기가 퍼져나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찻잔을 내려놓은 호봉스님이 물었다.     

“경선스님께서는 봉은사에 처음 오십니까?”

“예. 언제 한번 와야지 생각만 하다가 오늘에야 오게 되었습니다.”

“판전은 둘러보시었습니까?”

“예”

“병진년(1856년)에 판전을 짓고 정사년(1857년)에 신중도를 모셨습니다. 올해가 판전 불사 30주년이 되는 해라 탱화를 더 모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중에 물어보니 비로자나불화와 산신도, 칠성도를 조성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화주를 맡은 등운스님께서 힘써주셔서 신심이 깊은 상궁 15분이 시주를 해주셨습니다. 어느 분께 탱화를 맡길까 고민하는데 예전에 은봉대사와 인허대사께서 스님을 추천하시던 생각이 나더군요.”

 은사스님이신 은봉 신경隱峰信瓊 스님과 은사스님의 사제師弟인 인허 성유印虛性惟 스님의 존함이 나오자 경선스님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화엄경소초> 판각 불사를 맡은 남호대사와 은봉대사는 친분이 있으셔서 판전 불사 때 은봉대사께서도 시주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대사께서 스님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불심이 돈독하고 재주가 많은 응석이라는 제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30년이 지나고 보니 대사의 사람 보시는 눈이 정확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스님께서 대화사大畵師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실력이 출중하면서 판전과 인연 있는 스님께 탱화를 부탁드리는 게 좋을 듯싶어 스님을 꼭 모시고 싶었습니다. 이번 탱화 불사를 맡아주시면 어떻습니까?” 

 경선스님은 말이 없었다. 주지스님은 다시 차를 내렸다. 방안에 머물던 차향이 옅어졌을 즈음, 

“알겠습니다. 제가 아직 능력도 수행도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혹시 염두에 두신 스님이 계십니까?

“여기 계신 영명 스님과는 초면이십니까?”

 주지 스님 곁에 말없이 앉아있던 영명스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영명스님은 봉은사에 소속된 스님으로 그림 솜씨가 아주 뛰어납니다. 비로자나불화는 여기 계신 영명스님과 함께 하시되 스님께서 출초出草(밑그림인 초본을 그리는 일)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듣기로 탱화를 그릴 때 출초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던데 판전에 걸맞은 여법하고 새로운 탱화를 그릴 분은 스님 밖에 없지요. 그 외 스님은 스님께서 마음 맞는 분을 모셨으면 합니다. 시주가 넉넉하니 보시금과 재료비는 개의치마시고 탱화에 온 힘을 기울여주실 분들과 함께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언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이미 스님께서 묵으실 방과 작업하실 곳도 마련해두었습니다. 지금 당장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언제든지 준비되시면 시작해주시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말씀 주십시오.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많을듯하니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두 사람만 남자 영명스님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젠가 스님을 꼭 뵈었으면 했는데 이런 날이 오는군요. 스님께서 그리신 탱화를 보러 청룡사, 미타사, 화계사, 흥국사에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언제 봐도 새롭고 신심이 이는 그림입니다. 살짝 미소를 띤 불보살님의 상호(얼굴)를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스님의 초본草本(밑그림)으로 습회習繪(연습)도 자주했는데 이렇게 직접 뵈니 그저 영광입니다.”

“과찬입니다. 스님께서는 이번에 대허스님과 함께 괘불을 그리신다고요. 젊고 능력 있는 스님들 덕분에 제가 분발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한 수 배우지 않을까 합니다.”

“스님께서 출초하실 비로자나불화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세 점의 탱화 중에서도 비로자나불화는 특히 중요하니 이번에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합니다. 아무쪼록 소승을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두 스님은 방에서 나와 작업장과 판전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영명스님과 헤어진 경선스님은 봉은사에서 마련해준 방에 짐을 풀었다. 바랑 안의 물건은 단출했다. 스님은 잠들기 전까지 비로자나불화를 생각했다. 다음날 몇몇 스님들께 기별을 넣으니 다들 흔쾌히 허락했다. 화승畵僧(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스님)이 여럿 모이자 봉은사에는 활기가 돌았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전 스님들은 목욕재계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예불에 임했다. 며칠간 예불과 간경看經(경전 읽기)으로 심신을 정화한 후 경선스님은 습작習作을 시작했다. 습작은 상호, 수인, 자세, 크기 등을 연습하는 예비용 초본이다. 위치와 크기를 바꿔 그려보기도 하고 표정에 변화를 주기도 하면서 형태와 배치를 구상하는 작업이다. 대부분의 비로자나불화에는 보살, 제자, 천신 등 권속眷屬(한 집안에 거느리고 사는 식구)이 많이 등장하지만 경선스님은 최소의 인물만 등장시켜 비로자나부처님을 부각하기로 했다. 누구도 본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비로자나불화가 스님의 손끝에서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입춘이 지나면서 해는 조금씩 길어졌고 스님이 습작에 매진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아침, 전날 대청소를 해서 여느 때보다 더 깨끗해진 작업장에 경선스님이 홀로 들어섰다. 스님은 어회용魚繪用 초본(실제 불화를 제작하기 위해 그린 초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간 수천 번 그리고 고친 끝에 경선스님의 가슴에 남은 하나의 그림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스님의 손때가 묻은 붓 끝에서 섬세한 필치가 망설임 없이 펼쳐졌다. 초본을 다 그린 후 바탕천에 똑같이 옮겨 그리는 모필毛筆 작업을 했다. 세로 302.3cm, 가로 236cm의 하얀 천에 검은색의 불보살님이 나타났다. 모필 작업이 끝나자 채색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로소 불보살님은 색色을 입었다.

 

봉은사 비로자나불화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화엄의 교주이자 광명의 부처님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은 화면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졌다. 푸른 연꽃 대좌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지권인智拳印을 했다. 지권인은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手印(손모양)으로 왼손은 주먹을 쥔 상태에서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 엄지로 검지를 맞대고 나머지는 왼손을 감싼다.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한다. 지권인은 부처님의 세계가 중생 세계를 감싸고 있어 모두가 다 부처님임을 상징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주황색의 불꽃에 둘러싸인 두광頭光(머리에서 나오는 빛)과 신광身光(몸에서 나오는 빛)을 내뿜고 있다. 신광은 얇은 금박을 붙여 신령스러운 빛을 표현했다. 

 비로자나부처님 아래에는 연꽃을 든 보현보살과 여의如意를 든 문수보살이 반가부좌 자세로 앉았다. 여의는 스님이 설법이나 법회를 할 때 드는 도구로 권위와 위엄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부처님 양 옆에는 아난존자와 가섭존자가 두 손을 모으고 살짝 허리를 숙여 부처님을 예경禮敬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섭존자는 입술이 살짝 벌어져 웃고 있는 인상을 준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이 자리하여 불보살을 수호하고 있다. 왼손에 탑을 들고 오른손에 보당寶幢을 잡은 북방 다문천왕은 아난존자의 뒤에 섰다. 왼손에 용을 쥐고 오른손에 여의주를 쥔 서방 광목천왕은 보현보살의 뒤에 섰다. 양손으로 비파를 쥔 동방 지국천왕은 가섭존자의 뒤에 섰다. 양손으로 검을 쥔 남방 증장천왕은 문수보살의 뒤에 섰다.


  1886년 4월 14일에 시작한 불사는 23일 점안으로 마무리 되었다. 탱화 제일 아래에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는 화기畵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사를 세심히 챙긴 호봉 응규虎峯應奎 스님이 증명證明에 이름을 올렸고, 금어金魚에 영명 천기影明天機, 출초에 경선 응석慶船應釋, 그 외 동호 진철, 연하 계창, 종현 현조, 혜능 창인 스님이 이름을 올렸다. 점안식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탱화를 그린 화승들은 멀찍이 서서 불자들의 환희와 감동을 지켜보았다. 점안식의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탱화이기에. 점안식이 끝나자 절은 다시 조용해졌고 스님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1895년 영산전 십육나한도를 그리기 위해 봉은사에 온 경선 응석스님은 제일 먼저 판전에 들렀다. 9년만에 다시 만난 비로자나불화. 스님은 한참동안이나 탱화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판전 문을 열자 여여如如한 햇빛이 스님을 향해 쏟아졌다. 스님은 햇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2020년 8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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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조성된 판전 비로자나불화는 일부분이 변색되고 벌레에 의해 훼손되기도 해서

2012년 9월부터 보수, 수리를 진행하여 2013년 7월 6일 점안식을 하였다.






사진 출처

1. 문화유산채널, 봉은사 비로자나불도

http://www.k-heritage.tv/brd/board/242/L/CATEGORY/337/menu/246?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37&bbIdx=9099&brdType=R&tab=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은사 비로자나불도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2111102320000



참고자료

1. 윤선우, 「조선후기 불화 초본 연구」, 『동양미술사학』no 12,  동양미술사학회, 2011 

2. 신광희, 「조선말기 화승 경선당 응석 연구」, 『불교미술사학』제4집,  불교미술사학회, 2006

3. 자현, 『사찰의 상징세계』, 불광출판사, 2012

4. 한국불교미술사학회, 『봉은사 - 사원구조와 문화』, 한국불교미술사학회 학술총서 10권, 2008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응석(應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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