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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Dec 18. 2022

신중은 잠들지 않는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은사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녁예불이 끝나고 사람들이 떠난 빈 공간을 나무 내음과 나직한 풀벌레소리, 선선한 바람이 채웠다. 음력으로는 아직 7,8월이지만 9월 7일은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 9월 22일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秋分이다. 계절은 늘 달력보다 한발 앞선다. 이미 가을이다. 


 문이 굳게 닫힌 밤의 판전은 적요하다. 그 앞을 지나가는 누구도 판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자정이 지나자 왼쪽 벽에 봉안된 신중도가 펄럭이더니 흰 소를 탄 대자재천왕大自在天王이 튀어나왔다. 대자재천왕을 시작으로 신중도 1열과 2열에 빼곡히 자리 잡은 20위位의 신중神衆과 3열과 4열에 선 천인天人들까지 총 39위의 신중들이 차례로 탱화 속에서 빠져나왔다. 신중들은 기지개를 켜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저마다 찌뿌드드한 몸을 움직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거나 지물持物(부처, 보살, 신 등이 손에 지닌 물건)을 살펴보는 신중들도 있었다. 신중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환담을 나누었다. 9월 초하루, 화엄성중華嚴聖衆 회의가 있는 날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회의를 주재하는 대자재천왕이 8개의 팔을 들어올렸다. 신중들은 잡담을 멈추고 둥글게 앉았다. 대자재천왕이 영롱한 3개의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다 모이셨죠? 출석 부르겠습니다. 존칭은 생략합니다. 집금강신, 신중신, 족행신, 도량신, 주성신, 주지신, 주산신, 주림신, 주약신, 주가신, 주하신, 주해신, 주수신, 주화신, 주풍신, 주공신, 주방신, 주야신, 주주신, 아수라왕, 가루라왕, 긴나라왕, 마후라가왕, 야차왕, 용왕, 구반다왕, 건달바왕, 월천자, 일천자, 제석천왕, 야마천왕, 도솔천왕, 화락천왕, 타화천왕, 대범천왕, 광음천왕, 변정천왕, 광과천왕, 이상입니다. 이름 안 불린 신 계십니까? 대리출석하신 신도 없으시죠?”

대자재천왕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9월 초하루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원이 많으니 발언하시기 전에는 꼭 이름을 먼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여름은 장마가 길어 홍수 피해가 심했습니다. 봉은사 도량은 어떻습니까?”

“봉은사는 별다른 피해가 없습니다. 아, 저는 도량신道場神(도량을 지키는 신)입니다.”

“도량은 안전하나 신도분들 중에는 수재민이 있을 수도 있고, 본인이 아니라도 주변에 피해를 입은 분도 있을지 모르니 신중들께서는 불자님들의 기도에 더 귀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주수신主水神(물의 신)입니다. 습기 때문에 신중도가 손상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009~2010년에 신중도 보존수리를 했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탱화에 붙어있던 촛농도 일일이 다 떼어내고, 벌레 먹고 찢어지고 긁힌 부분도 다 수리했지요. 덕분에 형태와 색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복구되었습니다. 그때 보존불사를 하지 않았다면 이번 같은 재해에 손상을 입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보문화재는 사중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으나 신들께서도 두루 살펴보시다가 이상이 생기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939년에 있었던 대화재에서 유일하게 판전만 불타지 않았던 일 기억하시죠? 항상 긴장합시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화재 이야기가 나오자 주화신主火神(불의 신)은 눈을 내리깔고 애꿎게 바닥을 긁었다. 대자재천왕은 그런 주화신을 흘끗 보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코로나19 대비는 어떻습니까?”

“집금강신執金剛神(절 입구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입니다. 봉은사는 물론이고 각 사찰에서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청정사찰 실천 지침’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습니다. 7월 광주 집단감염의 진원지로 처음에 광륵사가 지목되었지만 역학조사 결과 방문판매업체가 있는 금양오피스텔이 최초 감염원으로 밝혀졌습니다. 늦게나마 사실을 바로 잡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광륵사 외 집단감염이나 확진자가 발생, 방문한 일이 없어서 코로나19를 계기로 국민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줄 수 있었습니다. 장기전에 돌입했으니 흔들림 없이 방역수칙을 지켜야합니다.” 

“주약신主藥神(약의 신)입니다. 백신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고, 백신이 나온다고 해도 당장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으니 방역수칙을 지키는 것만이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한 예방법입니다. 사부대중의 건강을 위해 우리 신중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암울한 전망에 회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루라왕加樓羅王은 아까부터 코를 씰룩거리던 용왕龍王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루라왕은 새의 신으로 용을 잡아먹기 때문에 평소 용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용왕이 헛기침을 하자 가루라왕이 빽 소리를 질렀다. 

“기침할 때는 소매로 가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코가 간지러워 재채기를 한 겁니다. 기침과 재채기는 달라요.”

“기침이든 재채기이든 이런 시국에 조심성 없는 행동은 민폐입니다. 민폐!”

“앞뒤전후 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비난하는 건 꼰대나 하는 짓이지요.”

가루라왕과 용왕의 언성이 높아지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중재에 나섰다.

 “부처님의 법을 모신 판전에서 싸우시면 어떻게 합니까. 인도의 토속신이었던 우리가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법을 지키겠다고 서원한 일을 잊으셨습니까? 예전의 우리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악신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화엄경華嚴經』「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 등장하는 화엄성중이자 호법신護法神입니다. 우리 사이에 불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이야기는 꺼내지 맙시다. 왜 자꾸 지난 일을 들추십니까.”

 지난날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이었던 야차왕夜叉王이 투덜거렸다. 지근거리에 있던 구반다왕鳩槃茶王은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었던 과거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야차왕께서는 북방 다문천왕의 제일가는 장수將帥이면서 팔부중八部衆의 일원입니다. 누가 감히 야차왕을 비난하겠습니까? 우리 39위의 신은 하나의 무리이기에 신중神衆이라 불립니다. 화합만이 신중을 신중답게 만듭니다. 의상대사義湘大師를 수호했던 일 기억나시죠?

제석천왕의 말에 신중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대답했다.

“아이고,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 아닙니까. 중국 종남산에서 수행하던 도선율사의 계율행이 청정해서 매일 하늘에서 공양물이 내려오자 유학중이던 의상대사께서 같이 공양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셨지요. 그런데 시간이 되어도 공양물이 안 내려와서 의상대사가 결국 점심을 굶고 당신 절로 돌아가자 그제서야 천사가 공양물을 갖고 내려왔지요. 도선율사가 천사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으니 사찰 주변에 신장들이 꽉 차 가로막고 있어서 감히 들어오지 못했다고 말했답니다. 천사가 온 줄 알았으면 당연히 비켜섰을 텐데 우리가 무섭다고 숨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험상궂은 신중이 하나도 아니고 39위나 몰려있으니 목숨이 여러 개가 아니고서야 누가 감히 오겠습니까?” 

대범천왕이 손짓 발짓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말하자 신들이 유쾌하게 웃었다. 야차왕도 함박웃음을 지었다. 분위기가 너그러워지자 대자재천왕이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마지막 안건이 남았습니다. 올해 수능은 코로나19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일 목요일에 치러집니다. 지혜증장을 위한 판전 특별 100일기도가 9월 3일 입재해서 12월 11일에 회향합니다. 다들 일정을 숙지하셔서 기도시간에는 더 심혈을 기울여 판전 안팎을 수호해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기도를 이뤄줄 다양한 방편을 각자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과보가 광대한 제9 선혜지를 다스리는 광과천왕廣果天王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광과천왕입니다. 판전 기도의 영험함이야 이미 유명하지만 올해는 갖은 액난을 겪느라 지친 불자들이 가피를 많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들의 지혜와 집중이 깊어져서 원하는 결과를 얻고, 기도하는 불자들의 신심이 더 단단해지면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화엄성중은 불보살님과 불법을 수호할 뿐만 아니라 삼보를 믿고 따르는 사부대중을 보호해야합니다. 삿된 것이 도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부처님 법을 따르는 불제자들이 저마다의 서원을 이루도록 다함께 노력합시다. 다른 안건이 없으시지요? 그럼 이상으로 9월 초하루 회의를 마칩니다.”

 대자재천은 한켠에 엎드려 자고 있던 소를 깨웠다. 늘어지게 잔 소는 기분이 좋은지 크게 울었다. 소에 올라탄 대자재천은 두 손은 합장을 하고 나머지 6개의 팔을 늘어뜨린 후 탱화 속으로 들어가 1열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뒤이어 19위의 신중이 차례로 신중도 안으로 들어갔고, 금강저를 든 집금강신을 필두로 천인들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3,4열을 채웠다. 39위의 신중들이 사라진 판전은 다시 고요해졌다. 


 판전 좌측 벽면에 봉안된 신중도는 판전이 세워지고 1년이 지난 1857년에 봉안되었다. 신중도의 증명법사는 추사 김정희의 벗이자 다도에 관한 책인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선사이다. 보존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손상이 심한 화기와 그림 일부분은 복구가 어려워 대자재천이 탄 흰 소의 경우 형태만 남아있다. 세월이 지나며 그림은 낡아졌지만 화엄성중의 서원과 위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불법을 수호하느라 눈 감을 새 없이 늘 깨어있는 화엄성중을 그린 신중도는 내 안의 믿음과 소원에 빛을 비추는 길잡이이자 수호자이다.  



출처: 불교신문




(2020년 9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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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조성된 판전 신중도는 

2009년 7월부터 보전수리를 진행하여 2010년 3월 완료하였다.






사진 출처

1.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봉은사 판전 신중도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2_0&ccbaCpno=2111102300000

2. 불교신문, [한국 산사 불화기행] <5> 수도산 봉은사 판전 ‘비로자나불도’. 2020년 3월 26일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184




참고자료

1. 김현중, 「19세기 경기지역 신중도 연구」, 『동악미술사학』no 17,  동악미술사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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