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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Jan 17. 2023

남호 영기 스님과 판전

남호 영기스님 진영

 


 칠흑 같은 새벽, 고아한 도량석이 울리고 대웅전으로 향하는 스님들의 발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도 영기스님은 어두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새벽예불 소리가 낮게 들려오자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일찌감치 싸놓았다. 짐이라고 해봐야 낡은 걸망 하나가 전부. 걸망을 멘 스님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판전에 도착했다. 며칠 전 주지스님이 겨울은 지내고 가시라 했지만 영기스님은 그저 웃기만 했었다. 미소 속의 뜻을 읽었는지 주지스님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어디로 갈지는 영기스님도 모른다. 봉은사를 떠나 걷다보면 알게 되리라. 

 어둠에 눈이 익으니 판전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스님은 벽면을 따라 ㄷ자로 배치된 판가에 가로로 켜켜이 꽂혀있는 경판을 눈으로 훑었다. 3천매가 넘는 경판經板(나무나 금속에 불경을 새긴 판)의 대부분은『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이하 『화엄경소초』)이다.


 1681년 중국에서 대장경을 싣고 일본으로 향하던 배가 태풍을 만나 전남 신안군 임자도에 표류했다. 배에는 당시 조선에 없던 『화엄경소초』가 실려 있었다. 『화엄경소초』는 80권본 화엄경을 주석한 소疏와 이를 더욱 상세하게 부연한 연의초演義鈔가 합쳐진 화엄경 주석서로 중국의 청량 징관淸凉澄觀스님이 지은 책이다. 백암 성총栢庵性聰 스님이 4년에 걸쳐 『화엄경소초』를 수집해 1690년 징광사에서 간행했지만 1770년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1775년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의 주도로 영각사에서 2차로 간행되었다. 『화엄경소초』는 조선의 화엄 교학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1854년 겨울, 영기스님은 망월사에서 화엄설법을 하고 있었다. 다음날 설법을 준비하기 위해 영각사본 『화엄경소초』를 보던 스님은 책을 탁 덮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구절이 너무 많았다. 80여년 전에 판각한 목판으로 숱한 세월 인쇄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글자가 닳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스님들 사이에서는 『화엄경소초』를 다시 판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단지 어느 사찰에서 누가 어떻게 불사를 할 것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나오지는 않았다. 『화엄경소초』는 분량이 많아 웬만한 사찰에서는 판각불사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나서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영기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나이도 겨우 30대 중반에 불과하고 판각불사도 몇 번 해보지 않은 내가 감히 나서도 될까. 내가 그럴 깜냥이 되나. 한시라도 급한데 도대체 언제 불사가 이루어질 것인가. 스님은 당장 내일 있을 설법준비보다 판각불사를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적임자가 나타났구먼. 불보살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리 영기스님이 화엄설법을 하다가 판각의 원력을 세웠답니다. 다른 사람 찾을 필요도 없어요. 바로 스님입니다.”

“아니, 내가 무슨 원력을 세웠다고 그러십니까. 저같이 미천한 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말만 많고 나서는 사람은 없으니 답답해서 하는 소리지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말 나온 김에 스님이 맡으십시오. 스님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장암에서 『아미타경』을 직접 사경해서 삼각산 내원암에서 간행하고, 『십육관경十六觀經』과 『연종보감蓮宗寶鑑』도 간행해 수락산 흥국사에 보관했으니 경험은 충분하지요.”

“스님이『아미타경』을 사경할 때 피를 먹물에 타서 한 글자 쓸 때마다 세 번 절하고, 세 번 부처님 곁을 돌고, 세 번 부처님의 불렀다는 일을 조선 천지에 모르는 스님도 있습니까. 있으면 그건 왜구 스님일겁니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자꾸 이야기 하십니까. 저야 성상대사를 따라했을 뿐이지요. 백번 양보해서 제가 나선다고 해도 보통 불사가 아니니... 대불사를 맡을 사찰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영각사는 덕유산에 있어 북쪽지방에서 왕래하기 힘드니 이번에는 한양 인근의 절이나 한양 북쪽의 절에서 맡아주면 좋겠습니다.”

“능침사찰에서 불사를 하면 좋겠네요. 흥천사나 봉선사나 용주사나 봉은사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앉아서 떠들기만 할 게 아니라 각 사찰에 의견을 물어봅시다. 우리 모두가 나서야지요. 이번에야말로 진짜 판을 벌여봅시다. 드디어 때가 되었나봅니다. 영기스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삼배라도 올려야겠습니다. 허허”


 그간 경전 간행 불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인허 성유印虛性維, 제월 보성霽月寶性, 쌍월 성활雙月性濶 스님은 영기스님을 격려해주었다. 여럿이 한뜻으로 힘을 모아준다 하니 든든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화엄설법을 끝낸 영기스님은 보개산 석대암에 들어가 기도를 하였다. 몇날 며칠 기도에 전념한 영기스님은 판각불사가 자신의 소임임을 깨달았다. 이번 생에 다시는 이런 대불사를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목숨을 내놓겠다는 각오로 임하리라. 전국을 다니며 선지식을 뵙고 경론을 배우던 시절 영기스님은 사찰에 보관된 낡은 경전이 늘 마음에 걸렸다. 나는 교학승도 율사도 아닌 간행승이 되어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널리널리 보급하리라. 마음을 굳힌 영기스님은 봉은사로 떠났다.


 봉은사는 판각불사에 선뜻 나서주었다. 앞서 함께 의견을 나누었던 스님들이 봉은사에 모여서 사중스님과 다시 회의를 했다. 논의 결과 『화엄경소초』를 판각하고 경판을 봉안할 판전도 짓기로 했다. 2년 안에 모든 불사를 끝내기로 결정해 할 일이 많았다. 만장일치로 영기스님이 책임자에 해당하는 도화주都化主를 맡았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14세에 출가해 산전수전을 겪고 율사로 널리 이름을 알린 영기스님이지만 도화주 소임을 맡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스님은 불사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 무거운 짐을 잘 내려놓으리라. 스님은 곧바로 일에 착수했다.


 왕실에서는 불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왕족과 상궁들은 큰돈을 시주했다. 고위 신료들과 이름난 가문의 선비들도 시주를 했다. 공덕을 쌓을 이런 좋은 기회에 어찌 높으신 분만 동참하리오. 영기스님은 백성들을 위해 직접 한글로 모연문인 <광대모연가>와 <장안걸식가>을 지어 퍼트렸다.



                                        수지독송  하려니와  선남선녀  불자들은 

                                        당대발심  결연하여  이리좋은  진묘법을 

                                        판각유포  하오시라




 왕가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에서 마음을 내어 시주를 했다. 시주를 모으는 한편  작업 준비를 했다. 각수刻手(나무 등에 조각하는 사람)와 목수 등 장인을 초청하고, 작업자들이 머물고 공양하고 작업할 장소를 마련하고, 각종 재료를 구하고, 겨울을 지낼 준비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 영기스님의 세세한 지도 아래 하나하나 준비되어갔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불보살님의 가피라고 말했다.


 전국에서 모인 실력 있는 각수들이 『화엄경소초』를 새겼다. 이전의 징광사본과 영각사본은 여러 사찰에서 판각되어 한곳으로 모여졌지만 봉은사본은 모든 작업이 봉은사 한곳에서 이루어져 감독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영기스님은 영각사본과 징광사본을 대조하여 그 결과를 정리한 「영징이본대교(靈澄二本對校)」를 수록하여 화엄경 연구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판전 건축은 당시 승속을 통틀어 불전 건축에 최고의 기량을 가졌다고 인정받는 침계 민열枕溪敏悅 스님이 도편수(우두머리 목수)를 맡았다. 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이면서 예불을 하는 법당으로 건립되었다. 과천과 봉은사를 오가며 스님처럼 지냈던 추사 김정희는 흔쾌히 편액을 써주겠다 약조했다. 1855년에 시작한 불사는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져서 1856년 가을에 끝났다. 새로 새긴 경판으로 찍어낸 경전은 정확하고 선명했으며, 추사의 편액을 단 판전은 고상하고 위엄 있었다. 


 영기스님은 불사가 끝난 이후에도 남은 일들은 마무리하기위해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렀다. 요란히 와서 바삐 머물렀으니 갈 때만큼은 조용히 떠나고 싶었다. 스님은 경판과 판전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봉은사에 온지 벌써 2년. 다시 판전에 올 수 있을까. 판전이 품고 있는 경판과 먹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부디 이 경전을 읽고 성불하는 이가 세세손손 나와 불국토를 이루기를. 영기스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판전을 나섰다. 새벽 예불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가운데 스님은 일주문을 지나 점차 봉은사와 멀어졌다. 날이 밝고 영기스님의 방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지 스님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기스님은 1860년 석대암에서 『지장경』과 『관심론觀心論』을 간행하고, 1865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2질을 인쇄하여 설악산 오세암과 오대산 적멸보궁에 봉안했다. 1872년  나이 52세, 법랍 39세로 입적했다. 법명은 영기永奇, 법호는 남호南湖이다.

 남호 영기 스님은 평생 동안 경전의 필사, 판각, 보급에 헌신했다. 불사에 경중이 있겠냐마는 『화엄경소초』판각 및 판전 건립 불사는 봉은사뿐만 조선의 불교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중요한 불사 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영기스님의 업적과 경판의 중요성이 추사 김정희가 쓴 편액의 유명세에 가려져있는 현실이 그저 애석할 따름이다. 

 남호 영기스님을 기리는 비석과 영정은 봉은사에 있다. 진여문을 지나 법왕루로 향하는 길 옆에 있는 부도밭에 남호대율사비南湖大律師碑가 세워져있다. 비는 스님께서 열반하고 3년이 지난 1875년에 세워졌다. 스님의 영정은 영각影閣에 모셔져있다. 남호 영기 스님을 기억하고 스님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일은 이제 모든 봉은사 불자들의 몫이다.                               



남호대율사비



(2020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사보 '판전' 게재)




사진 출처

1. 남호 영기스님 진영

『봉은사』, 대한불교조계종 봉은사, 2018

2. 남호대율사비

네이버 블로그, 「서울 도심 속 천년 사찰, 봉은사 1부..」, 느티나무와 꽃사과, 20160323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kwwoolim&logNo=220662855946




참고자료

1. 최형우, 「남호 영기의 가사 창작과 모연의도의 문학적 형상화」, 『어문총론』no 65,  한국문학언어학회, 2015 

2. 김종진,  「<광대모연가>에 창작배경과 문학적 특성」, 『한국시가연구』no 16,  한국시가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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