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일 년 중 만물이 가장 왕성한 생명력을 뿜어내는 때이다. 달이 차면 기울듯 절정에 이른 생명은 차츰 쇠퇴해 간다. 편안하고 아름답게 스러지고 싶다면 절정의 순간에 쇠퇴를 대비해야 한다. 삼라만상이 빛나는 여름은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음력 7월 15일은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백중百中이다. 절집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일화가 끼사 고따미의 이야기이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유명한 이야기다.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 사왓띠에 끼사 고따미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친정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시부모와 남편은 그녀를 구박했다. 힘들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고따미는 아들을 낳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난생처음 행복을 느꼈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막 걸음마를 뗀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정신이 나가버린 고따미는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마을을 헤매며 “우리 아이를 살려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 이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한 사람이 부처님께 찾아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알려주었다. 고따미는 그 길로 부처님께 달려갔다. 고따미의 절규를 들은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을에 가서 한 명도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 부모도 자식도 형제도 그 누구도 죽은 적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약을 알려주겠다.”
희망에 찬 고따미는 한 집 한 집 문을 두드리며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았다.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만 그런 집은 찾지 못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사방이 어둠에 잠긴 가운데 죽은 아들을 껴안고 있던 고따미는 홀연히 깨달았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그녀는 아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들의 몸뿐만 아니라 슬픔과 죽음에 대한 집착도 내려놓았다. 고따미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출가하여 훗날 깨달음을 얻었다.
이 일화를 듣고 고따미를 비난하거나 한심하게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은 사람을 격렬히 뒤흔든다. 평범했던 사람이 눈이 뒤집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고따미 같이 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다. 일본 영화 <아주 긴 변명>에는 사고로 아내를 잃은 두 남자가 나오는데 둘의 태도는 극과 극일 정도로 다르다.
2017년에 개봉한 <아주 긴 변명>은 소설로도 나와 있다. 니시카와 미와西川美和는 직접 쓴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소설로 써서 출간하는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소설과 영화는 같은 내용이지만 아무래도 소설에 세세한 설명과 장면이 더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보면 인물이나 상황이 더 명확하게 그려진다.
스키 투어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산길을 돌다 벼랑 아래 호수로 추락했다. 운전사를 포함한 39명 중 11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로 기누가사 사치오는 아내를 잃었다. 기누가사 사치오는 광고와 TV에 자주 얼굴을 비출 정도로 대중에 알려져 있는 인기작가다. 아내의 부고를 알리기 위해 경찰이 집으로 전화를 했을 때 그는 애인과 함께 있었다. 뜨거운 밤을 보낸 두 사람이 마침 TV로 사고 뉴스를 보며 희희낙락거리던 참이었다.
경찰의 질문에 사치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어디에 갔는지, 누구와 갔는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신 안치소에서 아내의 신원을 확인한 그가 경찰에게 한 말은 참으로 엉뚱했다. “호수 바닥에서는 사람을 끌어안고 꺼내나요, 아니면 로프 같은 것으로 끌어올리나요?” 유류품을 찾으러 갔을 때 그는 어느 물건이 아내의 것인지 골라내지 못한다. 결국 면허증과 신분전화가 들어있어 아내의 것이 확실한 숄더백 하나만 가져온다. 가기는 싫지만 얼굴이 알려져 있어 어쩔 수 없이 참석한 피해자 유가족 모임에서도 그의 태도는 유별났다. 울고 화내는 유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차분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내와 사이가 멀어진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사실을 모른다. 사치오는 아내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성가시다. 그는 집안이 너저분해진 것 외에는 큰 차이 없는 하루를 보낸다.
오미야 요이치 역시 이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피해자 유가족 모임에서 가장 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요이치는 마냥 슬픔에 젖어있을 수가 없다. 두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도맡은 아내가 죽자 집안이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계수단인 트럭 운전사 일을 그만둘 수도 없다. 요이치가 장거리 운전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큰 아들 신페이가 4살 여동생을 어린이집에 등하원 시키고, 밥을 챙기고, 빨래와 청소를 한다. 겨우 11살인 신페이는 엄마를 잃은 슬픔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집안 살림을 맡았다. 신페이는 역시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는데 다 포기하게 생겼다. 요이치의 가족은 살얼음을 걷듯 불안한 하루를 버텨내며 산다.
사치오의 아내와 요이치의 아내는 친구 사이로 같이 여행을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사치오는 요이치의 아내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반면 요이치의 가족들은 사치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사치오는 아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내가 죽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는 뒤늦게 오랫동안 외면했던 부부 관계를 들여다본다. 그 안에는 자격자심, 열등감, 미움, 허세, 자책감 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감정들은 부부 사이에 있는 게 아니었다. 사치오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사치오의 감정일 뿐, 정작 아내가 이 어긋나 버린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사치오는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는다. ‘아무튼 살아있는 동안에는 노력이 중요하겠지.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사람은 후회하는 생물이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건 어째서일까.’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후회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는 후회에 집착하지 않기로 한다. 작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계속 나아가겠노라 다짐한다. 자신도 인정하듯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살아온 그가 이런 결심을 내린 데는 요이치 가족의 역할이 컸다.
피해자 유가족 모임에서 스치듯 지나간 후 제대로 만난 자리에서 사치오는 요이치에게 제안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자신이 아이들을 돌봐주겠다고. 뭐 때문에 그렇게 하냐는 요이치에 질문에 사치오는 답을 하지 못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소설에서도 따로 설명이 없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좀 의아하기도 하다. 결국 사치오는 아이들을 돌봐주게 되고 아내와 엄마를 잃은 네 사람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의지하며 가족처럼 지내게 된다. 이 관계로 가장 크게 변한 건 사치오였다. 실로 오랜만에 충만한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이다. 훗날 죽은 아내에게 고백하듯이 ‘그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사치오에게 생긴 것이다. 나중에 요이치 가족과 자신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자 사치오는 극렬한 질투 때문에 보기 딱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삶을 함께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사람과 건강한 유대감을 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내를 잃어도 몰랐던 사치오는 힘들게 배워나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후회를 곱씹으며 살아가곤 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하더라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과연 가능할까. 최소로 후회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 외에 중생이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후회는 결코 0이 될 수 없고, 노력은 결코 10,000점이 될 수 없으니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아쉽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린다.
이번에 다시 끼사 고따미의 일화를 읽으니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점이 눈에 들어왔다. 고따미에게는 울면서 슬픔을 비울 시간이 필요했다. 숨을 거둔 아이를 품에 붙들고 얼마나 많이 울고, 얼마나 많이 후회했을까. 처절하게 슬퍼하고 고뇌했기에 고따미는 한 점 후회 없이 아이도 집착도 내려놓고 새로운 오늘을 향해 나아갔으리라. 하지만 슬픔 속에 계속 갇혀있는다면 그것 역시 사치오의 말대로 ‘살아있는 시간을 너무 우습게’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남은 이는 결국 오늘로, 살아있는 시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망자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사찰을 장엄했던 형형색색의 등은 백중이 다가옴에 따라 망자를 기리는 흰색 영가등으로 바뀐다. 올해는 흰 등을 보며 과거의 아픔보다는 함께 했던 즐거움을, 지난날의 잘못 보다는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더 많이 떠올려 보면 좋겠다. 또한 아직 가슴속에 슬픔이 많이 남아있는 이라면 그 슬픔을 충분히 비울 때까지 자기 자신을 기다리고 다독여주면 좋겠다. 바람에 나부끼는 영가등이 말한다. 후회 없는 오늘을 살라고. 바로 지금부터.
사진 출처
1. 위키피디아, Kisa Gotami
https://en.wikipedia.org/wiki/Kisa_Gotami
2~3. 다음영화, 아주 긴 변명(2017)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5871
4. BBS, '봉은사, 백중 ‘영가등’ 아래 ‘연꽃’ 만발..."모두의 행복 위해 기도"', 2020년 7월 16일
https://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6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