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로 Jul 27. 2018

전세자금 7200만 원을 빌렸다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1 공이 대체 몇 개야


은행 창구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수현이와 나는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신청서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창구 직원이 체크해 준 곳에 공손하게 이름과 사인, 각종 정보를 기입하기만 하면 된다. 차근차근 공란을 채우다가 드디어 대출 금액을 적는 란에 이르렀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공을 하나씩 집어넣는다. 숫자 0이 늘어날 때마다 키가 1cm씩은 줄어드는 것 같았다. 금액은 72,000,000원이다.  


"숫자 말고 한글로 써 주세요.” 지그시 노려보는 창구 직원의 눈초리에 얼핏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다. 이런. 제길. 이렇게 어설프다니. 용지 다른 거 있을까요? 그냥 지우고 쓰면 된단다. 줄을 두 개 그었다. 그런데 가만있자. 한글로 쓰려니 더 어렵다. 몇 초 생각을 가다듬고, 칠천이백만 원. 정자로 또박또박 한글로 적어 넣었다. 이제 정체가 탄로 났다. 우리는 칠천이백만 원이 필요해 대출을 받으러 지금 은행에 왔다.   


신청서 작성을 마치고 준비해 온 서류를 하나씩 꺼내서 바쳤다. 신분증, 등본, 가족관계 증명서, 전세계약서, 계약금 지불 영수증, 집주인 통장 사본, 소득증명서. 빠뜨리지 않고 준비해 오느라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모른다. 왜냐면 한 번 ‘빠꾸’ 당한 적이 있어서 그렇다. 은행에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방문 때는 필요하다는 서류를 기껏 다 준비해 갔는데, 거절당했다. 이유인즉슨, 대출받는 사람이 등본상에 세대주가 아니라서 자격 조건이 충족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 대출받는 사람이 세대주여야 한다는 항목을 스치듯 본 기억은 있는데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 조건은 갖추지 못한 상태로 은행에 덥석 갔던 게 문제였다. 나중에서야, 왜 대출 신청인이 세대주여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은행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도 그 이유가 설명되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타당한 이유를 들어 서류 구비 사항이 안내되면, 듣는 사람 역시나 기억하기에 좋고 자연히 더 신경을 쓰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그럼 누군가 우리처럼 두 번 은행에 오지 않아도 되고 말이다.   



#2 공은 넘어갔다


자, 어쨌든 이제 모든 것이 우리의 손을 떠났다. 신청서도 작성해서 제출했고, 필요한 서류들도 모두 갖추어서 드렸다. 이제 처분만 기다리면 된다. 신혼부부를 위한 전세자금 대출은, ‘버팀목 대출’이라는 이름으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정책에 힘입어 폭은 넓고 금리는 낮은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혜택이 뒷받침되어 있다. 전세 계약금의 80%까지 대출을 해 주는 폭넓은 혜택과, 2%도 안 되는 저금리의 이자율로 2년 내지 4년 동안 대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동시에 주어진다. 그러니 어디 안 받고 배기겠나. 그저 고마울 뿐이다.


창구 직원은 우리가 낸 신청서와 각종 서류를 한참 들여다 보고, 복사할 것은 복사해 놓고, 이리저리 자판을 두드려 필요한 정보를 어딘가에 기입하고, 우리한테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래, 기다리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적은 우리의 몫이다. 숨을 죽이고 호흡을 가다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며 가만히 창구에 놓인 작은 자리에 잠자코 앉아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작업을 마친 창구 직원의 얼굴 표정을 먼저 살폈다. 일단 표정이 부드럽고 편안한 빛이 내비친다.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 됐다. 이제 관문을 통과했다. 창구 직원은 우리에게 금리 계산 결과를 알려줬다. 우리는 1.6%라는 믿을 수 없는 저리로 7200만 원의 대출을 받게 되었다. 2주 정도 뒤에 최종 확정이 되고, 대출금은 집주인 통장으로 바로 들어가게 돼 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은행이 주는 떡을 집주인이 받아먹는데 그것은 모두 그림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뿐,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구먼.  



#3 공수래공수거


우리는 이제 집을 얻었다. 집을 얻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다. 정부의 도움도 한몫을 했고, 은행 창구 직원의 제법 근사한 손놀림과 계산 결과가 최종 확정 판결을 이끌어냈다. 물론 우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서류를 준비하고 마음 졸이고 애태우며 기다려 왔던 시간과 노력의 보상쯤으로 스스로 자위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너무 터무니가 없고, 그저 일단 돈을 빌리는 것까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되었다는 사실만이 명확하다.  


이제 앞으로가 일이긴 하다. 저리의 대출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아니 너무 큰 금액을 우리는 너무 수월하게 빌렸고 그것의 무게가 채 느껴지기도 전에 집에 들어가 살게 될 것이다. 현실 문제를 떠올려 봤다. 한 달에 100만 원씩 얼마 동안 모으면, 7200만 원이 될까. 답은, 간단하다. 72개월. 72개월이란 말이다. 일 년 열두 달, 6년 동안 매달 100만 원씩 한 달도 빠짐없이 모으고 살아야 대출받은 것을 모두 갚을 수 있다.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난센스다.


살면서 아직 만져보지 못한 거액을 은행을 통해 빌리고, 집주인에게 지불하고, 앞으로는 차차 갚아 나가야 한다. 이보다 더 큰돈을 쓰게 될 날도 올까? 이상한 생각이지만, 한 사람이 살면서 융통하는 돈의 액수가 7200만 원, 이 정도까지 가서는 안 되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 정도의 금액을 여러 날에 걸쳐서 쓰는 것도 아니고, 한 번에, 한 자리에서 빌리고 보내고 갚아 나가는 것이 어딘지 낯설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공수래공수거라 하지 않았던가. 말도 안 되는 얘기긴 하지만, 시대별 통화 가치를 떠나서 지금의 셈법 그대로 했을지라도 집 하나의 가격은, 100~200만 원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동산 중개인 표정이 굳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