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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로 Jul 30. 2018

참을 수 없는 '장모님 표 백숙'의 무거움

그래도 맛있게 먹었어요

#1 가는 날은 언제나 장날


수현이 어머니, 말하자면 ‘장모님'의 한번 집에 들르라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다가오는 주말 일정을 모두 비워 두었다. 햇볕이 뜨겁다 못해 무겁게 내리쬐던 지난 토요일 오후, 한 시간 거리의 그곳에 마침내 당도했고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반가움에 겨운 ‘왔어~’ 하는 인사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온몸을 감싼다. 집에는 훈김이 가득했다. 좀 전까지 불을 때는 요리를 한참 하셨나 보다. 백숙을 하셨다. 아직 결혼 전이지만, 얼마 전 상견례도 마쳤고 집도 얻었으니 이제는 어엿한 사위가 아닌가. 장모님은 복날도 되고 했으니 사위 몸보신 좀 시키겠노라 마음을 먹고 이날 상을 차리신 것이다.


장인어른은 집에 안 계셨다. 아침 일찍 밖에 나가셨다는데 어디 가셨는지 알려 주지 않으신다. 그런데 왠지 자리를 피하신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나를 초대하는 문제로 장모님과 실랑이를 하신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결혼 전인데 너무 부담 주는 거 아닌가 하는 장인어른의 핀잔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장모님은 스스럼이 없었고, 오로지 딸과 사위의 복날 맞이 동반 입성에 마냥 반갑기만 한 눈치였다.


처제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 낼 과제 마무리 작업으로, 정신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굳이 말을 안 해도 알 만한 분위기였다. 처제는 그러고는 좀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처제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고, 지금 왜 그런지 언뜻 짚이는 데도 있고 해서, 다음에 또 보자고 하면서 그런대로 어설프게 배웅을 했다.



#2 실하디 실한 백숙 한 상  


그리고 백숙 한 상이 내 눈앞에 떡, 보란 듯이 펼쳐졌다. 장모님은 장인어른과 처제가 모두 바깥에 나간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백숙과 사위에게만 정신을 집중시키고 계신 것 같았다. 밑반찬의 호위를 받고 대접 한 가득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등장하는 백숙은 그 자태가 대단히 장엄하고 묵직하고 등등했다.


자,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장모님은 백숙을 준비했고, 나는 이 백숙을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그나저나 그놈 참 실하기도 하다. 동네 인근 시장을 샅샅이 뒤져서 토종닭을 얻기 위해 장모님이 얼마나 공을 많이 들였는지가 첫 술을 뜨기 직전, 전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어머니는 상 주변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어머니는 안 드세요? 아니, 나는 아까 뭘 많이 먹었어. 그래도 같이 드세요~ 아니야, 나는 배불러. 그래도... 하나마나 한 대화였다. 결국 이 커다란 대접 위의 백숙은 오로지 나와 수현이의 몫이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우리 둘이 맛있게 배불리 먹으면 되겠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장모님 표 백숙.


야심 차게 첫술을 떴다. 그런데 갑자기 수현이가 일어섰다. 자기는 죽만 먹겠다는 거다. 따로 대접을 가지고 와서 죽을 펐다. 참나. 이러긴가. 야속하기 그지없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좀 도와주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응답은 없었다. 나는 솔직히 지금 이 백숙이 순수하게 음식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속으로 그렇게 얘기하면서 사정 아닌 사정을 했지만, 수현이는 죽만 먹었다. 백숙은 그야말로 몇 점만 죽에 얹은 채로.


옆에서 수현이는 잠자코 죽을 뜨고 있었고, 장모님은 밥상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그럴듯하게 밥상을 주시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에 앉아 계셨다. 그렇다, 나는 혼자였다. 백숙 앞에 선 고독한 사내. 그나마 아침을 덜 먹고 오길 잘했다. 평소 먹는 양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급하게 먹으면 빨리 포만감이 오니까 속도도 조절하려고 했다. 나름대로 컨디션은 좋았다.



#3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한 점 한 점 백숙을 씹어 먹으면서, 맛있다, 정말 맛있다, 리액션을 하면서 숭고한 이 밥상을 나는 최대한 경건한 자세로 대했다. 놀라운 것은, 이미 배가 가득 찼음에도 나는 더 먹을 수 있었고 이제는 그것에 대한 즐거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온전히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숙이 처음에는 넘지 못할 큰 산처럼 느껴졌다면 이제는 유유자적 헤엄치며 노니는 호수와도 같았다.


그렇게 접시를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장모님의 흡족해하는 기운이 내 살 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을 받았다. 만족과 보람이 온 방안을 가득 매웠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며,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복날에는 장모님 표 백숙을 꼭 먹으리라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한 마리도 거뜬히 혼자 먹음직스럽게 싹싹 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결혼이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고, 복날 되면 내 생각을 하는 분이 이렇게 또 한 분 계시는구나 하는 실감이 찾아들었다. 결혼은 그렇게 만남이 만남을 낳는 새로운 장인가 보다. 그나저나 장인어른은 그날 식사는 제대로 하셨나 모르겠다. 처제도 과제를 잘 마무리했기를 바라며, 다음에 맛있는 거 같이 먹으면서 인사를 제대로 다시 한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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