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싱글파티에서 알게 된 디키의 친구이자, 몇 차례 함께 어울리며 저녁 식사에도 초대한 적이 있던 톰에게 문자가 왔다. 연말연시에, 사실상 처음으로 나에게 먼저 연락하며 다짜고짜 내가 가지고 있는 디키의 열쇠를 자신이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다. 디키와 소피와 함께 어울릴 때도 나에게는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던 사람이었고, 이사를 갈 때도 별 상관없는 사람처럼 인사도 없이 떠났으며, 가끔 마을에 부모님을 보러 올 때도 디키와 소피에게만 연락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정중히 안부를 묻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잠깐 보면 좋겠다고 예의상 인사치레를 한 뒤, 열쇠는 더 이상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고 디키에게 말했다고 전했다.
바로 '버렸다'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뭔가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다소 공격적일 수 있는 단어를 들이밀어 그때의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맡긴 열쇠를 버린다는 것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디키가 열쇠를 다시 복사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가 불쾌하게 굴어도 어른이니까 도리를 다하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역이용하는 것이 지겨워, 예상하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왜 톰이 이렇게 다짜고짜 개입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 디키가 징징대며 온갖 불쌍하고 억울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그는 톰과 소피가 같이 놀다 자버릴 것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지레짐작하며 떠들어댄 적이 있다. 처음부터 장문으로 ‘나는 이런 드라마에 끼어들기 싫다’고 비꼬며 물어봤으니, 나는 단순히 없다고, 그리고 디키에게도 이미 말했다고 말하면 그냥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톰은 다시 파고들었다. 누군가의 집으로 통하는 열쇠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실질적인지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갑작스러운 연락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처음부터 예고 없이 열쇠부터 요구한 그 문장들 때문에 이미 기분이 상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열쇠의 중요성 정도는 알고 있으며, 이미 버려서 없고, 앞뒤 맥락을 모른다면 더 이상 끼어들지 말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토록 소중한 열쇠를 맡긴 사람에게는 먼저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디키를 빗대어 전했다.
그 결과 나는 열쇠를 돌려주지 않고 버티는 사람일 뿐 아니라, 예의 없고 철없는 사람이 되었다.
화가 나 전화를 걸었지만 톰은 연거푸 거절했다. 가족 모임 중이라 통화가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할머니까지 함께한 가족 모임 자리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친구로 생각하지도 않던 누군가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것도 아닌 열쇠를 요구하며 실시간으로 답을 주고받던 마흔 살 기자.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식탁 밑으로 휴대폰을 내리고 거절 버튼을 누르고 있었을 모습이 그려졌다.
내가 예의는 그가 먼저 차리지 않았다고 하자, 톰은 자신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어봤지만 예의 없는 부분은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정도 선에서 대화를 멈추는 게 낫겠다고 한다. 문장만 공손하면 예의의 조건은 충족되는 것이고, 그 문장들 뒤에 놓인 위선이 불쾌하다는 감정이 드러난 나는 예의 없고 미성숙한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다른 무신경한 사람들처럼, 그는 가족 모임과 같은 바쁜 용무가 끝나고 나면 언제든 대화를 재개할 듯한 맥락으로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의 숱한 경험으로, 그가 다시는 이 문제를 제대로 상의하거나 오해를 풀려 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I’m not sure if you wondered how I was going before you did about the key.
I don’t think Dicky should have involved you.
I never said I wouldn’t see him or that he couldn’t visit my place.
I only told him he shouldn’t ask me to commit to things like dropping off the key after what happened — especially since I threw it away then.
It seems he made many assumptions and involved you.
If I ever find a key I clearly don’t have, I’ll handle it directly with Dicky.
It’s just a copy that costs five dollars to recut.
And if you truly don’t want to know the drama, I don’t expect you to lecture me about it.
Thank you sincerely.”
이 친구가 중계자 코스프레를 좋아하는지 이 전에 알았더라면,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던져주며 친해질 수도 있었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직업이 기자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그냥 지나친 것이, 지금 생각하니 아쉽다. 타인의 세계를 마음대로 침범하면서도 문장력은 예의 바른 반짝이는 돌멩이.
이렇게 돌이켜보니, 그 둘이 왜 친한지도 이해가 간다. 그저 정치가 딕키가 필요에 따라 기자 톰을 친구로 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찰떡궁합이 따로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