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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감각을 타고, 돈으로 스며들지

마이 지저스 나무 아미타불

by 새벽바다

- 행복은 감각을 타고, 돈으로 스며들지.


장마가 시작된 섬.

겨우 눈 뜬 일요일 아침의 깨달음이다.


저기압은 솜 먹은 이불처럼 육신을 누른다.
습기 찬 공기가 폐포 깊숙이 들어와 무거운 숨을 남긴다.
나는 오래 누워 있던 관짝 같은 침대에서 ‘우울감’이라는 단어를 억지로 해석해본다.


그러나

세상은, 장마는, 구름은 죄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시한부 육신이다.


육신은 뇌에게 신호를 보낸다.
- 뭔가 필요해!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시그널.


이때 나에겐 ‘꿈’이 필요하다.


귀하디귀한 주말, 실체 없는 시간을 허망하게 흘려보내면
1년 후, 어쩌면 5년 후 내 모습이

사뭇 안타까울 것만 같아서


몸을 일으켜! - 라는 명령이 뇌의 뉴런으로 합체한다.


무겁고 고요하게 일어난다.

야릇한 냄새가 배어든 빨래감을 한 아름 안고
동네의 말끔한 빨래방으로 향한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면, 달큰하고 포근한 세제 향이 밀려온다.
향기는 곧 뇌를 깨운다.


- '어머? 이 향은..마치 내 꿈이 품은 향기랑 비슷한걸?'


희미하게나마 머릿속에 '이 하루가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라는 신호를 보낸다.


500원짜리 동전 열 개를 투입구에 넣는다.
딸깍, 딸깍, 딸그락.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안에, 빨래가 하얀 세제를 머금으며 부드럽게 돌아간다.


40분 남짓한 빨래의 시간 -


나는 종종 걸어서 특이한 이름의 카페로 들어선다.


에티오피아 고산지에서 자란 커피콩이 먼 길을 건너왔다.
따뜻한 머그 안에서 김을 피우며,
짙은 아로마 향이 콧속을 간지럽힌다.


그제야 눈앞이 맑아지니,
따뜻한 잔을 들고 까만 콩물 한 모금 들이킨다.

카페인은 위를 타고 피로 흘러 뇌에 신호를 보낸다.


그 속도감은 강렬해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증폭시킨다.


책장에서 슬쩍 집어온 '경제학'에 관한 책을 펼친다.
흰 종이 위 검은 활자를 따라 시선이 미끄러진다.
- 문장과 문장 사이,
세상의 모든 화폐가 회전하는 그림이 눈앞에 떠오른다.
경제란, 흐름이자 리듬이다.


문득 시간이 멈춘 듯 카페 안이 조용하다.

장마철 꿉꿉한 체온이 기계가 쏘아주는 냉기에 의해 -1도씨 되니,

쾌적한 공기가 피부에 닿아 상쾌하다.


무심결에 받아온 흰 영수증에 까만 숫자를 바라보니

- 아메리카노 HOT - 1 - 5,000


이 모든 것은

내가 지불한 다섯 장의 종이 지폐를 통해
'상쾌한 일요일 오전 11시 37분'의 장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지한다.


인간은 행복을 디디고 선다.
- 행복은 돈을 디디고 선다.
- 돈은 감각을 타고 흐른다.

- 감각은 다시 돈으로 스며든다.


결국 삶과 존재의 모든 것이 황홀한 감각을 통해 증명된다.

그것을 위해 돈은 탄생했다.


습한 장마 속에서도,
포근한 세제 향과 커피의 달콤하고 쓴 맛, 피부의 온도가 떨어지는 상쾌함,
책장 너머 펼쳐지는 꿈의 비전까지.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사주명리'라는 신묘한 세계에서
나는 오행 중 ‘토’가 많은 사람이다.


무엇이든 흡수한다.

마치 잘다져진 땅처럼, 세상의 온갖 감정과 분위기를 끌어안는다.


어쩌면, 사주명리 또한 타고난 '감각'의 능력치를 말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가 나를 깨우고, 교만을 깨부수고,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때로 상극의 속성을 가진 존재와 맞닥뜨려야 한다.


'경화'이든, '신금'이든, 타오르는 불이든, 차가운 금속이든.


인간의 사주조차 감각으로 표현된다.

감각의 황홀함이란 신의 축복일까, 게임일까.


나는 세상 모든 신을 믿는다.
그러니 부모를 여럿 둔 셈이라 할까?


빽이 많은 인생.


그래서 대부분 운이 좋았던 것일지 모른다.


타인의 숨겨둔 속내가
오롯이 내 땅에 흡수되어 때로 고통스러우면,
나는 여러 부모 중 해탈하기로 유명한 부처에게 기대어
그 모든 것을 ‘카르마’라 투정부리고 위로받을 것이다.


그러니 고통을 받는다 해도, 괴로움은 선택하지 않는다.


황홀한 감각이 선사하는 찰나의 상쾌함이

설득력을 가진다.


500원짜리 세제와 5,000원짜리 커피 아로마가
'어쨌든 인생은 아름답지?' 라며

자꾸 나를 살살 달랜다.


5cm 두께의 책 속에 빼곡한 검은 글자를 통해 전 세계 화폐 흐름을 구경하고,

그 흐름으로부터 하루를 사는 행복과 감각에 취해 사유하다 보니,

어느덧 40분은 훌쩍 지나있다.


빨래는 이제 다 되었겠지.


삑— 소리가 나면 세탁기의 동그란 문이 달칵- 하고 열린다.


그 후로

또 다른 감각의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다.


때론 고통스럽게,

가끔은 황홀하게,

대부분 상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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