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1편: MBC 애니메이션 작가의 탄생
2012년 겨울, 스물넷의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무언가 하나쯤은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남기고 싶던 그 시기,
나는 인생 최초의 방송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는
MBC에서 방영되는 아동 교육용 애니메이션
〈안녕, 토토비〉 4기로 제작되었다.
대단히 실력이 뛰어나서 작가로 뽑힌 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긴급함이 있었고,
그 시기 내가 영화학도로 썼던 단편영화 시나리오들이
대체로 좀 판타지적인 측면이 있어
애니메이션과 통하는 구석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나를 뽑은 PD님은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튼,
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작고 귀여운 어린 토끼인데 수컷이다.
이름하여 '토토비'였다.
토토비가 아니라,
'토토로' 혹은 '뽀로로'를 썼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겠지?
처음 쓴 만화 대본의 줄거리...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땐 그냥..꽃향기에 미쳐 있었다고 변명하겠다.
내 인생 10살의 어느 날,
동네 아파트 입구에서 불어온
코끝이 온통 황홀했던 그 향기,
그게 만리향인지 천리향인지도 몰랐지만,
갑자기 떠오른 그 향기 때문에..
뭔가 중요한 대박의 징조가 거기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 적인 느낌만은 그때는 확실했다!
'그래! 그거야!'
그렇게 나는
향기에 홀린 토끼 한 마리,
토토비 시나리오 1편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토토비는 알 수 없는 꽃향기에 이끌려 집을 나섰어요."
대망의 시작.
토토비는 친구들을 불러
꽃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작당을 벌였고(?)
그 향기를 쫓아 학교에서 질문을 하며
과학적 탐구정신, 자연에 대한 호기심, 협동심까지 알려주는
지극히 유익하고 명확한 교육용 시나리오로 완성시켰다.
분명 그랬는데..
대본을 전송한 직후 PD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저기...작가님..?
그..대본 내용이 쫌.. 수정을...해야할 것 같거든요?
이게..쫌... "
당시 부천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만난 PD님은
내 대본에 퍽 당황한 눈빛이었다.
'뭐지? 이건 뭐지? 얘는 뭐지?' 라는 눈빛 이랄까....!
10년도 전 이야기지만, 그때 죄송했어요 PD님. 헤헷.
그러나 놀랍게도,
몇 차례 수정과 피드백을 거친 후에도!
내 대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그렇게
어느 평일 오후 4시,
TV 속에서
수컷 토끼 '토토비'가 텔레비전 속에서 정말 꽃향기를 맡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진심으로 뿌듯했다.
“야, 이게 되네?”
그 순간 - 4년을 다녔던 유망 대학 영화 연출 전공자의
과거 기억들이 파노라마로 스쳐갔다.
‘잠깐.. 이건... 세상에서 가장 명확한 시나리오야!’
만화 시청률이 몇 프로나 나왔을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처음 썼던 이 아동 교육용 만화의 시나리오가
그토록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당시 내가 처해 있던 정신적 배경 때문이었다.
나는 영화 연출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교복입고 팔랑대던 14살 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품었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영화과 대학생이 되어
이제 뭔가 위대한 걸 찍게 되겠지?
나는 10년, 혹은 20년 후, 걸작을 탄생시킨 영화감독으로,
세상에 널리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게 되겠지? 꿈결을 걸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째서인지
쪼끔 삐딱한 노선을 타고 있었으니!
겨우 내 나이보다 두세 살, 혹은 대여섯 살쯤 많은 선배들이
무언가에 심취한 눈빛으로
모호하고 추상적인 시나리오를 선보인 후 진지하게 토론하는 일이
내가 선택한 학업의 주된 분위기였다.
“이건 남녀 사랑의 욕망에 대해 해체하는 이야기지..”
“권력에 맞서는 서민들의 짓밟힌 꿈에 대한 메타포..”
"인간 내면의 고뇌와 고독이 내제적으로 드러남을 강조하는 미쟝센.."
나는 아무튼 대단한 시나리오를 읽고,
그에 따라 제작된 아마추어들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입 안에 세제가 끼는 기분을 느꼈다.
침인 줄 알고 삼키려는데 혀 끝에 퐁퐁 거품이 짜릿한 그런 기분.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그 거품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대단한 시나리오의 탄생.
나는 ‘유리 남자’라는 초단편 시나리오를 썼다.
내용은 단순했다.
어떤 성인 남자가 큰 유리를 이리저리 옮기다 결국 깨트리는 이야기.
그리고 꿈에서 깨는 결말.
솔직히 말하면, 인간 내면의 철학적 고찰은 별로 없었다.
주인공 남자는 직장인이었으나 나는 직장을 다녀본 적도 없는 20살의 여대생이었는걸?
그저 떠오르는 이미지에 따라 의식의 흐름에 맡겨 썼다.
그런데 예술영화계에서 나름 인지도를 쌓고 추앙아닌 추앙을 받던 강사 한 분이
진지하게 평을 했다.
“묘하군, 유리를 든 남자라... 결국 깨진 후 허망해 하는 침묵이라.
역시, 인간 내면의 연약함과 존재를 지탱하는 투명한 감정의 은유가 유리로 표현되었나?”
주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고,
나는 그 순간 어정쩡한 얼굴 근육으로 미소지으며
"아하...네에.." 하며, 또 한 번 혓 속의 퐁퐁을 삼켰다.
어느 날은 선배가 찍었던 그 '방귀' 영화도 뇌리에 남아있다.
‘회식자리에서 여자 후배를 꼬시려는데, 방귀가 멈추지 않는 남자’라는 단편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감상했다.
천만다행히 장르를 코미디라 했기에, 퐁퐁은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다.
또 다른 날엔,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가 집에서 손톱을 뜯고 매니큐어를 칠하는 영화’를 보며
그 손톱 색깔에 사랑의 잔향과 여성 내면의 성장 서사를 반영한다는 해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랴.
이게 인생인 걸.
'영화'의 시작은 기술의 발전이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을 보고,
관객들이 실제와 착각하고 도망을 갔다.
기술이 파생시킨 예술.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
나는 그것들이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 경험에서 주목한 사실 하나는
영화가 아니라 철학을 전공했어야 한다는
내 인생의 어떤 깨달음에 관한 것일 뿐이다.
아무튼 그렇게 영화라는 예술의 거품에 혀가 아려오던 시기에
돈 벌려고 지원한 애니메이션 작가 채용공고에 덜컥 합격을 했으니
주인공 수컷 토끼가 내 시나리오대로 뛰어다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토토비가 꽃향기를 맡고, 학교에 가서 자랑을 하고, 그것에 대해 배우고,
명확하고 소소하고 현실적이고 따뜻한 목적을 향해 살아가고 성장하는
우람한 한 마리 토끼의 성장, 그리고 동물 친구들!
그때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세상은 결국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음을.
극사실적이고 비현실적인 뉴스,
위대하고 허무한 예술의 의미,
선한 정치도, 악한 영웅도,
모두 누군가 만든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걸 아는 순간,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거품이 어쩔 수 없다면, 그 거품을 진짜로 만들어 버려야지.
아니라면, 거품을 걷어내고 진짜를 일으켜야지.
나는 최소한 1명의 진짜가 되어 이야기를 쓰자.”
그 날,
꽃향기에 홀린 주인공 ‘토토비’와 함께
내 인생의 우주 궤도에도
첫 번째 레이저가 “띠링!” 하고 발사되었다.
하나의 파동, 그리고 그와 동일한 파동이 겹쳐지면
배수의 법칙으로 증폭된다.
하나의 파동,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파동이 겹쳐지면
서로를 상쇄시켜 제로(0)가 되어 버린다.
무용지물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하나의 파동, 그리고 그와 동일한 파동을
계속, 계속 쌓아나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쌓아온 미약하고 동일한 파동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거대한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이 세상을 푸른 파도로 뒤덮을 것이다.
그게 내가 진짜 원했던 위대한 '시나리오'로 만든 '진짜 영화'가 될 것이다.
_ 최소 1명은 재밌어 할 내 인생 우주 레이저 쏘는 이야기. 2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