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23일째, 민성이 D+272
얼마 전, 아끼던 앞치마의 단추가 떨어졌다. 단추와 천이 맞닿는 부분이 찢어져있었다. 불쌍한 내 앞치마, 얼마나 고생했으면. 아내가 사준 신상이 어제(22일) 도착했다. 카키색, 전보다 위아래로 긴 디자인인데 마음에 든다.
우리 집 앞치마는 내가 쓰는 것 하나뿐이다. 아내는 주방일을 할 때 앞치마를 쓰지 않기도 하지만, 그녀는 앞치마를 쓸 일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깝다.
설거지를 하는데 자꾸 옷에 물이 튀어 앞치마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와 아내는 익숙한데, 장모님은 앞치마를 두른 사위 모습을 꽤 생경해하셨다. 특히나 그녀들의 고향, 대구에선 더욱 흔치 않은 풍경이라던가.
우리 집에서 주방은 주로 내 영역이다. 내가 그 일을 아내보다 더 잘해서 그런 건 아니다. 오랜 자취 생활에 주방일이 익숙하기도 했고, 내가 그곳에 많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더 챙기게 된 것뿐이다.
우리 집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내 또래 부부들에게선 흔한 광경이다. 남녀가 합리적으로 집안일을 나눠하고,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을 따로 정하지 않는 시대로 분명 나아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보고 자란 민성이는, 앞치마란 당연히 '아빠가 두르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책에 앞치마를 멘 엄마가 등장하면 민성이는 손을 들고 지적할 것이다. "선생님, 그림이 이상해요."
앞치마의 주인은 정해진 게 아니라는 걸, 일찍이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어 뿌듯하다. 민성이의 세대엔 전통적 성역할이 더욱 희미해지겠지만, 혹 그때도 남아있을지 모를 고정관념을 뿌리 뽑는데 앞장설 아이로 키우고 싶다.
민성이는 아직 기호가 뚜렷하진 않지만, 후일 그가 핑크색과 인형, 소꿉놀이가 좋다고 하면 아낌없이 그를 지원해줄 것이다. 여자아이를 낳았어도, 그녀가 파란색과 로봇, 축구를 좋아했으면 난 당연히 응원해줬을 것이다.
민성이가 더 크면, 민성이의 앞치마도 사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도 조금씩 나눠할 것이다. 그가 아들이라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없다. 아들이라서 할 수 없는 일도 없다. 그걸 가르쳐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