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성이 아빠 Dec 18. 2020

빈 피자 상자는 누가 치울까

휴직 232일째, 민성이 D+481

'사장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듣고 있네. 말해보게.' / 2020.12.17. 우리 집


나는 아이를 보면서도 그때그때 집을 치우는 편이었다. 육아휴직을 시작한 이후로 쭉 그랬다. 집이 깔끔해야 기분이 깔끔하다. 집이 깔끔해야 우울해지는 속도도 더디다.


민성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전엔 종일 아이랑 붙어있으면서도 그게 됐다. 그가 어지럽히는 것보다 내가 치우는 게 더 빨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이의 저지레라는 건 애교 수준이었다.


민성이가 어린이집을 가고 나선, 아이가 없을 때 집을 치우면 됐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훼방꾼이 없으니 매일 내 마음에 들게 집을 정리할 수 있었다. 3주 전까지, 그게 내 일상이었다.


가정보육 3주째, 지금은 당연히 그게 안 된다. 집안을 걷다 보면 항상 뭔가가 발바닥에 들러붙는다. 거실에선 주로 아이의 단어 카드가, 주방에선 비닐 랩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


초반엔 조금 치워도 봤다.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 몸이 좀 피곤한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정녕 공허한 일이었다. 비닐 랩을 돌돌 말아 서랍에 다 집어넣을 때쯤이면, 민성이는 다시 내 옆에 와있었다.


예전에 동생이 해준 이야기다. 남학교 기숙사에서 피자를 시켜 먹고 나면, 항상 문제는 빈 피자 상자를 누가 처리할 것인지 라는 거다. 누가 상자를 치울까? 결국 그걸 못 견디는, 그 꼴을 못 보는 사람이다.


매우 놀랍게도 동생 기숙사에서 그 상자는 며칠째 굴러다녔고, 마지못해 동생이 그걸 치웠다고 한다. 나는 그를 안다. 동생이 견디지 못해 상자를 내다 버릴 정도면, 그의 룸메이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였단 말인가.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감도가 다르다. 빈 피자 상자를 보고 곧바로 불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 전자였던 나는, 요즘 조금씩 후자로 변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우려대로 코로나 확진자가 천 명을 넘어섰고, 어린이집 등원은 정말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민성이랑 오래오래 집에서 잘 지내려면, 곳곳에 널린 피자 상자를 방치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밖에 안 보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