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263일째, 민성이 D+512
며칠 전 일이다. 술을 잘 못하기도 하고, 잘하지도 않는 아내가 회식에 갔다가 웬일로 취기가 꽤 올라서 돌아왔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가져온 술이 입맛에 잘 맞더란다. 소곡주라는데, 생전 처음 들어봤다.
나에 비하면 미슐랭급 입맛을 가진 아내가 워낙 극찬을 해서, 조만간 꼭 마셔보겠노라 이를 갈고 있었다. 이번 주말, 서울 사는 동생이 군산에 내려온다길래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인터넷으로 소곡주를 주문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소곡주는 곡주의 일종으로 '누룩을 적게 사용해 빚은 술'이란 뜻에서 유래했고, 옛 백제 영토였던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소곡주의 명맥을 이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히는 한산소곡주라 부른다.
그제(16일) 부모님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드디어 소곡주를 개봉했다. 일단 색은 맑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소주처럼 맛이 강하지 않고 달달했다. 그러나 도수는 소주와 비슷했다. 그래서 앉은뱅이 술이라 불리는 건가.
술이 술술 들어갔다. 한 잔씩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을 때마다 소곡주의 달콤한 감칠맛이 혀 끝을 맴돌았다. 1.5리터짜리 한 병을 사 왔는데, 이걸로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만큼 맛있는 술이었다.
그러나 처음 우려와는 달리, 술은 부족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 동생, 성인 남자 셋이 술을 마셨는데, 나중엔 오히려 남겠다 싶었다. 술이 너무 달다 보니 서서히 마시는 속도가 떨어졌다.
그게 더 좋았다. 부모님 집에 가서 소주나 맥주를 마시면, 늘 내 주량보다 많이 마셔서 다음날 숙취로 고생했는데, 소곡주는 그러지 않아도 됐다. 맛있는 술을, 저절로 적당량만 마시게 됐다. 당연히 속도 편했다.
어제, 동생을 버스터미널에 데려다주는 길에 둘이서 이 얘기를 했다. 술이 달아서 맛있는데, 너무 달아서 많이 안 먹게 된다. 그래서 더 좋다. 그리고 내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약간 육아랑 비슷해."
애를 보고 있으면 눈에서 절로 꿀이 떨어진다. 하지만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지나치게 달아 질리기도 한다. 문제는 소곡주는 질리면 그만 마시면 되지만 육아는 그럴 수 없다는 거다. 육아의 단맛에 너무 취하지 않으려면, 결국 스스로 완급 조절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