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성이 아빠 Feb 20. 2021

추피가 왔다

휴직 296일째, 민성이 D+545

'이 위험한 책들을 당장 불태워버리거라.' 후일 사람들은 이 사건을 분서갱유라 불렀다. / 2021.2.19. 우리 집


추피, 그가 왔다. 며칠 전, 코로나에 매일 아빠와 '방콕'하는 아들을 위해, 아내는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맘까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민성이가 볼만한 책을 찾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추피 시리즈를 추천했다. 물론 경고도 잊지 않았다. '아이가 한 번 맛 들리면 빠져나올 수 없으니 조심하세요.' 그의 명성, 아니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책은 생각보다 작았다. 내 손바닥 크기만 했다. 아이들 책이 그렇듯이, 추피 이야기 역시 별 특별한 내용은 없다. 펭귄인 추피가 자전거를 타고, 낮잠을 자고, 목욕을 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 동화다.


민성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거실 책장에 책을 꽂아놓았다. 크기는 작아도 권수는 50권이 넘었다. 책장 두 칸이 빼곡히 찼다. 추피는 참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은 펭귄이었다.


민성이는 곧바로 추피를 알아보았다. 처음 거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토끼눈으로 추피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오오' 소리와 함께 곧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책을 살 때도 예상은 했지만, 17개월 아이에게는 좀 빨랐다. 민성이는 책을 서너 권 꺼내 뒤적이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블록 상자로 달려갔다.


민성이는 책의 내용보다는 책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바닥에 쌓고, 다시 집어넣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추피가 아직은 낯설고, 책에 글자가 많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제껏 아이 장난감이나 책을 사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아이에겐 뭐든 적응하고 가까워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처음엔 재미있어하다가도 금세 흥미를 잃는 물건이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민성이가 요즘 잘 가지고 노는 블록도, 탑 쌓기 장난감도 처음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끼고 산다. 그러니 아직 추피 지옥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하긴 이르다. 선배님들의 조언은 늘 유용하다. ###

매거진의 이전글 잘하고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