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299일째, 민성이 D+548
반년 전, 아내와 나는 서울 집을 팔고 군산에 내려왔다. 그때도 집값은 오름세였고, 팔지 말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견이 없었다. 여러모로 집을 정리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집을 내놓으면서도, 우리 집 재무장관인 아내는 말했다. "오빠, 이 집 아마 2억은 더 오를 거야." 아내 말대로였다. 지금 추세를 보면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다.
그 집은 우리의 신혼집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동네였지만, 아내가 가보자니까 그냥 데이트할 겸 집을 보러 갔었다. 그리고 그 날, 집을 보고 2시간 뒤 나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확실히 살 집은 따로 있나 보다.
생애 첫 대출을 억 소리 나게 받았다. 계약서에 내 이름을 적는데 손이 떨렸다. 이러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벌써 6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지금 같지 않았다. 집값이 곧 곤두박질칠 거라는 관망세, '존버' 분위기가 적어도 내 또래 지인들 사이에선 우세했다. 내 '영끌' 대출 소식을 듣고, 그들은 하나같이 날 위로해줬다.
그 당시 아내와 집을 보러 다닐 때 한 부동산 사장님이 그랬다. 솔직히 지금 집값 상투 잡고 사는 거 모두가 알지만 별 수 있느냐고. 상투 잡고 산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사장님은 틀렸다. 그때 집값은 상투 끝에 있는 게 아니었다. 무릎 정도나 됐을까? 이후로도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아내 말을 듣다 망했다고 날 위로했던 친구들은, 아내 잘 뒀다며 날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깔고 앉아 사는 집, 차익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감흥은 없었다. 다만, 내 집이 있으니 집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은 없었다.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그 마음의 평화가,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내년 1월에 다시 서울에 간다. 못해도 반년 전엔 다시 집을 알아봐야 한다. 혹시나 했던 조정장은커녕, 집값은 지금도 자고 일어나면 몇 천씩 뛰어오르고 있다. 아, 이런 스트레스였구나.
그러다 문득 집게로 블록을 집으며 해맑게 웃는 민성이를 본다. 하기사, 아이에겐 그가 놀고 있는 곳이 어디건 상관없을 것이다. 아무리 집값이 미쳐 날뛰어도, 우리 세 가족 몸 뉘일 곳 하나 없으랴. 잘되겠지. 잘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