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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성이 아빠 Mar 05. 2021

지루함이란 사치

휴직 309일째, 민성이 D+558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는 가만히 자신의 발가락을 꼬집어보았다. / 2021.3.4. 부모님 집


어제(4일) 오후, 민성이를 데리러 가려는데 창 밖이 흐렸다.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선다. 비도, 바람도 차지 않다. 이번 주말엔 낮 기온이 15도까지 오른단다. 하긴 벌써 3월이니, 봄이 올 때도 됐다.


어린이집 벨을 누르니 민성이가 맨발로 뛰어와 나를 반긴다. 그가 이리도 날 반기는 건 거의 이때뿐인 것 같다. 엄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없어야 아이의 사랑을 양껏 누릴 수 있다.


민성이를 안고,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우산을 들고 택시를 잡는다. 육아는 이래저래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는 평일 중 하루 '엄빠' 찬스를 쓰는데, 어제가 그 날이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민성이는 가만히 밖을 쳐다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내 무릎 위 앉아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휴직이 끝나도 기억될, 내가 손꼽는 순간 중 하나다.


할머니를 보자마자 민성이는 부리나케 그녀의 품으로 달려든다. 그렇게 나는 2순위로 밀려난다. 할아버지가 퇴근하면 3순위, 아내까지 오면 4순위가 되겠지. 모든 아빠가 이렇진 않을 텐데. 내가 문제인 걸까.


헛헛한 마음을 TV로 달래 본다. 한 프로그램에서 최근 유산을 한 연예인 부부가 출연했다. 눈물을 참고 참다가 샤워를 할 때 혼자 펑펑 울었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도 울고, 그녀도 울었다. 


유산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당장 주변에서도 적잖게 소식이 들린다. 그들이 겪는 고통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아내와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민성이가 별 탈없이 잘 자라주니, 가끔 내 생활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를 돌보는 일상은 끝없이 반복된다. 이 곳엔 내 친구도, 일탈도 없다. 아내와 나 사이엔 늘 민성이가 있다. 


하지만 이런 지루함은 내 삶이 안정적으로 잘 굴러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이는 잘 크고, 부부 싸움도 없다. 민성이가 우리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혹은 왔더라도 많이 아팠더라면, 내 삶에 지루함이 끼어들 자리 따윈 없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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