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323일째, 민성이 D+572
끽끽. 민성이가 타고 있는 그네에서 쇳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족히 20분은 넘은 것 같다. 그는 때론 정면을, 때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역시 아무 말이 없다.
날이 화창한데도 놀이터는 텅 비었다. 오후 3시 반, 아이들이 놀이터를 찾기엔 너무 이른 시간일까. 하긴 민성이 어린이집만 해도 원래 보육시간이 오후 4시까지니까. 놀이터엔 적막함이 흐른다.
나도 민성이를 따라 멍하니 서있다. 말없이 그네를 타는 아이 옆모습을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은 내가 아이 곁에 있지만, 나중에 내가 복직하면 민성이는 누구랑 그네를 타지?
예전에 아내가 그랬다. 아이가 커서 친구를 만나려면 학원에 가야 한다고. 학원은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지만 친구는 다르다. 친구는 없어도 그만이 아니다. 더욱이 민성이는 동생도 없다.
후일 놀이터에서 민성이 혼자 그네를 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다. 당장 내년이면 민성이는 아빠 엄마 모두 일할 테니,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오롯이 친구뿐이다.
민성이는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은 자연스레 난 어떠했는지로 이어진다. 난 내성적이었다. 좁지만 깊은 대인관계가 중요하다고 여겼다. 친구가 많진 않았지만, 그들과 깊은 관계를 쌓으려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난 사람을 넓게 사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방패 뒤에 숨은 것이다. '난 철학이 있어, 그래서 일부러 많이 사귀지 않는 거야'라는 방패 뒤에.
나이 마흔을 향해가는 지금, 그래서 그들이 내 곁에 남았느냐고 물으면 결국 한 줌이다. 남은 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내가 챙기지 못한 이도 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자연스레 멀어진 이도 있다.
자식이 더 낫기를 바라는 건 부모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난 민성이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기를 바란다. 마음이 더 넓고,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을 품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나갔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는 둘 다 일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고, 형제는 없는 민성이가 친구들이라도 많아 매일 북적이는 곳에서 지냈으면 좋겠다. 함께 그네를 타주는 친구가 그의 옆에 끊이지 않길 진심으로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