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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성이 아빠 Apr 16. 2021

아이와 나, 그녀의 하루

휴직 351일째, 민성이 D+600

'테이블을 뒤집으면 이렇게 주차장이 된답니다. 놀이도 창의력이 중요해요!' / 2021.4.14. 우리 집


몇 시쯤 되었을까. 나는 민성이 옆에 다리를 쪼그린 채 앉아있다. 그는 주방 간식 찬장 바로 아래에서 우유에 적신 콘플레이크를 맨손으로 집어먹고 있다. 저녁도 제법 먹었는데, 그새 배가 고파졌나 보다.


간식을 꺼내 달라고 할 땐 열심히 내게 매달리더니만, 원하는 걸 손에 얻고 나선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참나. 난 멍하니 앉아 눈으로 주방을 훑는다. 군데군데 단풍잎 문양 같은 얼룩이 묻어있다. 민성이 손자국이다.


시리얼을 그릇에 담아줬더니, 우유도 부어달라고 성화다. 수저로 먹지도 않을 거면서. 난 아이가 우유나 요구르트를 손으로 집어먹을 때마다 마음이 초조해진다. 집안 모든 물건을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마법의 손이다.


그래도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기분이 좋다. 난 민성이가 무언가에 몰입했을 때 살며시 그를 껴안고 냄새를 맡는다거나 머리와 손을 만지작대는 걸 아주 많이 좋아한다.


어제(15일)는 저녁 6시가 넘어서 아내가 급작스레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청천벽력 같았겠지만, 이젠 괜찮다. 민성이가 제법 커서, 혼자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것도 많이 할만하다.


민성이 하원 후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 가장 힘든 건 아이 밥 먹이기다. 먹이는 것도, 먹이고 나서 그걸 치우는 것도 모두 만만치 않다. 하지만 어제는 매우 순조로웠다. 순탄하기로는 상위 10% 안에 들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원하고 나서 1시간 반을 밖에서 놀다 들어왔다. 민성이와 매일 가는 집 앞 놀이터에 갔을 때, 이제껏 봐온 것 중에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그곳에는 밝은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거기에 민성이의 에너지가 더해졌다. 이 정도 놀았으면 됐겠지, 싶을 때쯤 그는 또 다른 놀이터로 달려갔다. 그때가 다섯 시가 좀 넘었나 그랬다. 그곳엔 나와 민성이, 그리고 그보다 네다섯 살은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 한 명뿐이었다.


피곤했는지, 민성이는 저녁 8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로부터 1시간이 지나 아내는 집에 들어왔고, 같이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요새 부쩍 회사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아내는 많이 지쳐있었다. 그녀가 퇴근할 시간에 민성이가 엄마를 찾다 울적였다 하니, 그 말을 들은 그녀 역시 울적이다 아들 옆에서 잠들었다. 나와 그녀의 긴 하루가, 그리고 민성이에겐 짧은 하루가 그렇게 끝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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