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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성이 아빠 May 10. 2021

또 하나의 역사

휴직 375일째, 민성이 D+624

'엄마, 이 쪽으로 와보세요. 여기 신기한 게 있어요!' / 2021.5.9. 군산 카페 틈


휴직 375일째, 그동안 나는 총 374편의 육아일기를 썼고, 지금 이 순간 375번째 글을 쓰고 있다. 천 자 내외의 짧은 글이지만,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글의 주제를 정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어제는 그제 같고, 오늘은 어제 같은 휴직 기간, 매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일상을 포착해 일기에 담아낸다는 건 꽤 고된 작업이었다.


주제가 금방 떠올라 일필휘지로 일기를 써 내려가는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어떤 날은 백지장처럼 하얀 컴퓨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그곳엔 늘 마우스 커서만 야속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어제(9일)는 기록적인 날이었다. 동이 틀 때쯤 이미 그 날의 주제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날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제가 바뀌긴 쉽지 않을 거라고, 나는 직감했다.


민성이는 어제도 6시쯤 일어났다. 주말 아침, 아내와 나는 침대에서 최대한 뭉그적거려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는 연신 엄마 아빠를 외치다 아예 제 방문을 열고 뛰쳐나와 우리 침대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일요일이지만 평일과 비슷한 시간에 아침밥을 먹고, 아내와 난 후식으로 카페인을 몸속 깊이 집어넣고 있었다. 그때, 거실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던 민성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매우 뜬금없이 책장을 잡고 살짝 다리를 꼬았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얼굴을 책장 깊은 곳에 집어넣기도 했다.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인과관계가 상당히 부족한 행동, 귀여운 모닝 응가 시간이다.


"오빠, 이리 좀 와봐. 엄청나!" 민성이를 안고 화장실에 간 아내가 소리쳤다. 내가 이제껏 본 것 중에 가장 거대했다.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게 아이 배 속에 들어있었을까.


동그랗게 뭉친 것이, 조그만 멜론이 떠올랐다. 변기에 멜론을 떨어트렸더니 구멍이 가로막힐 정도였다. 와 이러다 막히는 거 아냐, 라고 아내에게 웃으며 물을 내렸는데,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난 계속 웃을 수 없었다.


물이 변기 끝까지 차올랐다. 찰랑찰랑할 정도로. 부모님 집에 가서 뚫어 뻥이라도 빌려와야 하나 싶을 때 기적적으로 물이 내려갔다. 2021년 5월 9일, 그의 생애 처음으로 변기가 막힌, 역사적인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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