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성이 아빠 Jun 18. 2021

미래를 봐버렸다

휴직 414일째, 민성이 D+663

'난 가끔 이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곤 해. 넌 어때?' / 2021.6.16. 아파트 단지


난 민성이를 데리고 아침 8시, 혹은 8시 반쯤 집을 나선다. 아내가 일찍 출근하면 전자, 평소처럼 출근하면 후자다. 요즘은 아내와 헤어질 때 큰 어려움은 없다. 아이는 대체로 울지 않고 쿨하게 엄마를 보내준다.


그럼 이제 남는 건 어린이집에 가는 건데, 어떤 날은 그게 참 쉽고 어떤 날은 어렵다. 어떤 날은 어린이집으로 직행이고, 또 어떤 날은 하세월인데, 그 기준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아이 마음이다.


어제(17일)는 민성이가 역대급으로 늑장을 부렸다. 그는 집을 나와 아파트 인조 분수에서 한참을 놀다가 놀이터로 향했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나와 또 다른 놀이터에서, 그리고 또또 다른 놀이터에서 신선놀음을 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집에 핸드폰까지 두고 와서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었다. 놀이터란 놀이터는 다 돌아다니는 아이 뒤통수에 몇 번이나 꿀밤을 박아주고 싶었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래, 네가 놀면 얼마나 놀겠니. 나도 집에 가봐야 청소하고 빨래하는 거 말곤 할 일도 없는데. 마음을 비우고 세 번째 놀이터에서 하염없이 민성이 그네를 밀어주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엔 민성이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좀 어린 여동생,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엄마였는데, 그녀만큼이나 아들 역시 불만 가득 섞인 목소리로 뭔가를 웅얼대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이 때문에 엄마가 매우 짜증이 나있다는 건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 가방을 메고 있는 걸로 보아,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 가설은 적중했다. 엄마와 아이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노란 스쿨버스가 도착했는데, 아이는 미끄럼틀 위로 달아나버렸고, 버스는 아이를 조금 기다리다 끝내 그대로 떠나버렸다.


가끔 만화에 보면 사람 머리 끝에서 용암이 터지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는데, 어제 내가 본 광경이 딱 그랬다. 아이 엄마는 너무너무 화가 나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어쩌면 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성이는 결국 평소보다 1시간 늦게 등원했다. 지금이야 내가 휴직 중이니, 아이와 좀 더 놀아주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우리 부부가 둘 다 일할 때 아이가 저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딱히 방법이 있을까. 아이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육휴를 1년 넘게 쓰면 생기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