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419일째, 민성이 D+668
나는 민성이가 하원하면 주로 아이를 따라다닌다. 나란히 걸을 때도 있지만, 앞서 걷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향할지는 순전히 그의 선택이다.
내가 하는 일은 길 위에 위험한 물건이 없는지 살피고, 그가 원할 때 안아주는 게 전부다. 그렇게 질리게 돌아다니다 보면 보채지 않아도 아이는 알아서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기까지 평균 1시간쯤 걸린다.
나는 아이가 어디로 가든, 무엇을 만지든 웬만하면 놔두는 편이다. 물론 판단이 안 설 때도 있다. 예컨대 민성이가 도로를 건너서는 안 된다. 바닥에 있는 강아지 응가를 만져서도 안 된다. 그런 건 명확하다.
그러나 아이가 길가에 핀 들꽃을 꺾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민성이가 어렸을 땐 못하게 했다. 꽃을 꺾으면 꽃이 '아야 아야' 하니 그러지 말자고 했다.
이 세상 모든 생명체를 귀히 여겨서라기보다는 아이가 일상의 작은 일에서부터 공감 능력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꽃을 너무 쉽게 꺾는 아이는, 나중에 친구들의 팔도 쉽게 꺾지 않을까 싶었다.
휴직 1년 하고도 두 달째, 민성이와 매일 산책을 다니다 보니 내가 너무 극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 정도는 우리 아이 손에 들려도 괜찮지 않을까. 꽃은 꽃이고 친구 팔은 팔이니까.
꽃 때문인지, 요즘 민성이는 인도로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조그만 다람쥐처럼 아파트 화단을 온통 헤집고 다닌다. 물론 잔디나 꽃으로 정성스레 꾸며진 화단이라기보단 풀밭에 가깝지만, 어쨌든 그곳으로 다니는 사람은 민성이와 나뿐이다.
아이에게 위험하거나 주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그는 못 갈 곳도, 못 할 것도 없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민성이를 1년 넘게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날로 단단해지고 있다.
몇 년 뒤 민성이는 이제 그의 길을 선택해 나아갈 것이다. 아이의 뒤에서, 혹은 옆에서 같이 걸어줄 순 있지만 앞에서 걸을 생각은 없다. 그의 무한한 가능성에 비하면 나의 유한한 경험은 매우 얕고 편협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못 갈 곳도, 못 할 것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