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Nov 14. 2021

초밥예술비평

무모한초밥, 《메가초밥》, 2021, 밥상 위에 복합재료, 19900원

오늘의 현대예술 : 
무모한초밥, 《메가초밥》, 2021, 밥상 위에 복합재료, 19900원(₩)


예술이란 무엇인가? 어떤 대상으로부터 예술적 체험이 발생하는 계기는, 전통적으로 '예술 자체에 내재된 예술적 속성'이 있기 때문 인것으로 간주되어왔다. 하지만 대륙철학에서 칸트 미학이, 그리고 영미철학에서 듀이의 체험주의적 예술철학이 제안된 이후로, 그리고 미술사에서 마르셀 뒤샹의 『샘』 · 음악사에서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가 발표된 이후로, 우리가 대상을 예술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이제 더 이상은 물체에 내재된 속성이 아닌 감상자의 주관에 의한, 적어도 예술작품과 감상자의 상호주체성 속에서 출현하는 어떤 체험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바, 이제 예술비평의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는 목적물의 한계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물론 예술의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는 목적물의 제한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의 자격'은 모든 대상에게 잠재적으로 주어지게 되었고, '예술적 체험과 예술비평의 자격'역시 모든 사람들에게 열리게 되었다. 마치 1907년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가 L-글루탐산나트륨이 격발하는 시원한 국물맛 '감칠맛'을 발견하고 정제한 이후로 이제 사람들이 누구나 감칠맛을 만들고 · 맛보고 · 삶에서 '핸들링할 수 있게' 되었듯이, 2013년 와우테크그룹(WOW Tech)이 『우머나이저』를 출시함으로써 여성에게 완전히 새로운 체험적 지평이 열렸듯이, 현대 예술철학은 예술의 계기가 언제 어디서 무엇에게나 가능함을 명시적으로 정당화하고 그 다양한 사례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적 체험을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체험 속에 깃들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최근에 우연히 방문하여 식사하게 된 한 초밥집의 세트메뉴를 먹으며, 이것은 하나의 종합예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첫 번째 요건은, 바로 '낯설게 하기'이다. 여기서의 낯섬이란 단순한 생소함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습과 관성에 따라서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필연성 · 당위성 · 정당성 · 목적 · 효용에 대한 기대들로부터 어떤 불일치를 체험하는 것을 포함한다. 당연하게 이어져야 하는 어떤 체험의 연쇄, 또는 당연하게 창출되어야 하는 목적물로부터의 어떤 체험이 결렬되고 배반당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이 합목적성에 따라 정렬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반성 없는 '동시대적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고, 그 체계를 반성적으로 그리고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배반된 체계들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19,900원의 가격을 가진 이 '초밥 32피스 세트'를 주문하고, 그러한 '예술적 낯설음'의 지평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음식의 지평을 초월한, 하나의 현대예술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초밥 세트는 예술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인 기대들을 비웃으며, 그 기대로부터 미끄러져 '배반된 체계들의 공간'으로 탈출해 나아간다. 앤디 워홀이 『캠벨 수프 캔』(1962)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각예술의 형식적 요소인 평면 · 공간 · 색 · 선 · 조형성 · 대상성을 모두 갖춘 시각예술이, 심지어 대상을 평면상에 재현한다는 원칙을 충족한 재현예술이, 어떻게 예술성이라는 최종적 체험을 배신할 수 있는지 보여준 명징한 증거이다. 



워홀은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의 요건을 충족하면 예술이라는(즉, 예술적 대상이 예술성의 원천이라는) 전통적인 예술관을 크게 비웃으며 그것으로부터 미끄러져 빠져나왔다. 워홀의 '수프 깡통'은 시각예술의 모든 형식적 요소를 갖춤으로써, 그 모든 것들이 '전통적인 미학적 예술관'을 충족시키기에는 사실은 전혀 충분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후 워홀의 작품은, 단지 '잘 팔리기 때문에 비싼' 팝아트로 유명세를 타고 고가의 경매에 부쳐지게 되면서, 전통적인 예술의 계기가 단순히 해체됨을 넘어 예술적 애호와 경제적 애호를 더 이상은 구분할 수 없는 '예술의 거대한 자본주의적 오염'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징조가 되었다.


Andy Warhol, Campbell's Soup Cans, 1962, MoMA 제공


이 스시도 마찬가지다. 뭉쳐진 밥 위에 올라간 생선, 육회, 조개, 유부, 계란말이…. 이것이 우리가 초밥을 형성하는 형식이라고 간주하였던 전부다. 그러나 이 스시는, 그 모든 초밥의 구성요건을 단지 형식적으로만 충족하면서도, 우리가 기대하는 초밥의 체험을 비껴나간다. 그 비껴나감 속에서, 우리는 뒤늦게야 '존재의 형식만으로는 그 존재의 모든 체험적 실질(實質)이 보증되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초밥 32피스 세트'는 한국 외식산업의 거대한 패러디일 뿐만 아니라, 이윤 본위의 시장경제 안에서 상품의 계기(교환가능성)와 예술적 계기(장인정신)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상품이 어떻게 '시장적 상품'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편의 우화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술의 형식을 최대한 강조하고, 그러한 동시에 교환(판매)가능한 상품으로서의 시장경제적 형식을 최대한 억제하여 온 외식업계의 문화적 고집과는 정반대의 시도이다. 우리가 보통 식당에 가면, 음식이 강조되는 대신 가격은 은폐된다. 음식은 일종의 장인의 생산물로서 예술적으로 취급되며, 그것에 가격이 매겨져 있다는 것은 부끄럽고 불경하며 '인건비는 건져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우리가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시키면, 종업원은 일반적으로 계산영수증을 클립보드에 끼워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무심히 '덮어서 준다'. 마치 이것은 섹스 사이에 존재하는 샤워와 콘돔이라는 '섹스 그 자체보다 더 머쓱하고 민망한' 불가피한 절차를 어쩔 수 없이 진행하는 것처럼, 모두가 알지만 못 본 척하며 천연덕스럽게 수행된다. 이러한 외식의 예술화 경향성의 끝에, 심지어 외식의 심미적 경험에 극단적으로 집중한 레스토랑에서는, 메뉴판에서 가격을 아예 빼버리는 시도마저 일어난다.



이러한 일반적 미식 경험과는 정반대로, '초밥 32피스 세트'는 "당신, 초밥을 값싸게 많이 먹고 싶지?" 라는 자본주의적 최대화의 욕망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음식계산은 관습상 데이트에 초대한 사람이 조용히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계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상생활 속에서의 수줍은 배려의 게임들도 허용되지 않는다. 메뉴는 입구에 설치된 키오스크의 전자화면을 통해 선불로 결제된다. 모든 메뉴는 표준화되어 있으며, 가격도 선명하게 병기되어 있다. 음식의 양과 가격의 비는, '음식예술가이신 주방장을 우리 식탁 앞에 초빙하는' 영예로운 경험과 그 환산되기 힘든 가격을 포괄적으로 값매긴 '스시 오마카세' 관점의 완전 반대편 끝자락에 존재하는, '19,900원만 내면 '초밥' 32개를 줄게. 완전 값싸지?' 와 같은 '흥정된 단가'의 관점으로 제시된다.



음식이 흥정 가능하고 또한 양에 따라 단가가 매겨질 수 있다는 일종의 '외식 포디즘(fordism)'은, 자본주의적 최대화의 이념을 그대로 반영한 '양적으로 증식된' 포드주의적 메뉴구성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 8개씩 4줄로 배치된 초밥은, 마치 '2만원을 결제하셨으니 그 대가로 32개가 나가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는 듯 표준화되어 있다. 또한 오른쪽에 마치 컴퓨터의 옵션 버튼처럼 '기호에 맞게' 제공된 5가지 기본 반찬과 국은, 자본주의의 획일화된 상품시장이 비록 질적 깊이는 몰라도 규모의 경제가 약속하는 양적 증식을 통해서 적어도 와사비 · 락교 · 초생강 · 김치 · 간장이라는 '자본시장이 포괄가능한 기호·취향의 체계에 들어온 사람의 모든 선호' 정도는 만족시켜 줄 수 있음을 과시하는 듯하다.



나는 이 현상을, J.하버마스의 개념을 빌려, 생활체계와 경쟁하는 시장체계가 거둔, '상품과 체험의 형식에 있어서의… 그러므로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완승'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시장체계는, 이마트의 '노 브랜드'라는 하나의 상징이 보여주듯이, '브랜드' 혹은 전통사회에서 '장인'이 선사하는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한 질적 경험에서 벗어나, 사용가치의 기본 형식 및 개념을 적어도 최소한만 충족하는, '브랜드에 매겨진 가격을 최소화한 최저가 상품'이라는 하나의 거래습관을 우리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제는 그것의 거울쌍마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상품에 매겨진 가격을 최소화한 최저가 브랜드'이다. 



'상품에 매겨진 가격을 최소화한 최저가 브랜드'란 무엇인가? 수많은 벤처기업 브랜드가 광고하지만 사실 똑같은 중국 공장에서 만들어져 상표만 다르게 찍혀나오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상품처럼, 브랜드가치의 최저가 획득을 위해 상품의 기본 형식 및 개념을 최소한만 충족하는, 상품을 최저가에 공급하기 위한 브랜드가 아닌, '브랜드를 최저가에 공급하기 위한 상품'. 한국에서 그것의 대표 상징은 바로 백종원표 식당이다. 



물론 한 사람의 요리사 - 그리고 지금 맥락에서는 요리'예술가'이자 전통적 의미의 '장인' - 인 백종원 개인은 여전히 그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백종원의 이름을 걸고 론칭되는 한신포차 · 새마을식당 · 역전우동 · 홍콩반점과 같은 회사들은 백종원의 예술성 그 자체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백종원의 예술성을 제공하는 것은 그가 출연한 TV 요리 프로그램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대신 이러한 회사들은, '백종원의 브랜드가치'를 최저가에 느끼게 해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당연히 백종원 프랜차이즈만의 경우가 아니다. 이것은 브랜드와 품질이라는 두 보석 중 하나를 가격이라는 문지기에게 갖다바쳐야만 시장경쟁의 문을 통과할 수 있는 모든 대중브랜드의 딜레마다. 맥도날드는 맥모닝을 통해 최저가에 맥도날드를 먹게 해 준다고 광고하며, 버거킹은 버거킹앱 할인쿠폰을 통해 최저가에 버거킹을 먹게 해 준다고 광고하고 있다. 스타벅스는 e-프리퀀시 스탬프 17개를 다 모으면 스타벅스표가 찍힌 중국산 굿즈를 주겠다고 광고한다. 알라딘 굿즈를 소유하고 싶어서 책을 주문하게끔 유도하는 온라인서점 알라딘은 또 어떤가?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맥모닝과 할인된 치킨패티 버거, 스타벅스의 니맛도 내맛도 아닌 커피 그리고 알라딘 한정판 굿즈에, '진정한 음식-예술적 가치' 또는 '진정한 예술-상품'을 찾아보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부족분은 그만큼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된 '브랜드로의 초대 좌석'이 갖는 프리미엄이 메꿔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유경쟁시장이 제공하는 사회적 후생'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단지 공산주의 체제에서 되풀이되는 유동성 경색과 공급부족 사태와의 비교우위 속에서만 겨우 정당화되는, 얄팍하고 단기적인 구매 만족감이라는 제한적인 측면에서만 인정하고 싶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가장 값싼 사용가치'와 '가장 값싼 브랜드가치' 라는, 모순되지만 일관적인 거래습관을 동시에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순은 최종적으로는 '교환비 최대화'라는 점에서 화해되며, 모든 교환대상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상대할 수 있는 교환비의 최종 심급은 '가격'임이 드러난다. '노 브랜드 팝콘'이 보여주는 것처럼 브랜드가 할인되든, '맥모닝'이 보여주는 것처럼 품질이 할인되든, 어쨌든 가격은 최저화되는데, 어떤 것이 할인되든지 간에 반드시 가격이 그 할인의 정당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모든 경험적 · 체험적 · 질적 가치가 가격이라는 통용가능한 양적 가치의 할인을 위해 지속적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저가 대비 최대 효용'이라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강박. 그리고 그 강박을 최저가라는 약속으로 충족시키는 이마트의 '노 브랜드'가 사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등록된 상표(출원번호 40-2015-0020874)라는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최대화의 정신을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는, 우리의 예술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희극인 것이다.


자료사진 출처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제 예술은 할인의 대상과 판매의 대상이 되었다. 스시 전문점들이 굳게 지켜 온 '장인이 하나하나 꼭꼭 말아쥔 밥알에 사시미 칼로 정갈하게 저며 올린 스시'라는 개념은, 이제 '식판에 담긴 초밥' 혹은 '플라스틱-위의-초밥'의 모양으로 '할인된다'. 마치 유명 아이돌을 배우로 기용해서, 그 배우의 인지도만 믿고 막 찍어낸 양산형 영화들이 영화예술과 플롯의 최소한의 형식만을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영화예술의 장르성을 무너트려왔듯이, 초밥이라는 하나의 음식예술의 장르성은 최저가를 위해 희생되고, 초밥이라는 개념을 단지 사전적으로 구성하는 형식 - 즉 '클리셰' 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하지만 이 초밥집의 이러한 '초밥 32피스 세트'가 여전히 하나의 전위적 예술작품이라고 느껴진다. '메가 초밥'이라고 이름붙여진 이 초밥 세트는, 마치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업장인 '공장(The Factory)에서 찍어낸, 돈에 대한 가식 없는 솔직함이 그 자체로 예술성을 구성하는 팝아트 작품들이나, 영국의 작가 뱅크시가 키워낸 상징적 인물인 티에리 구에타가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2010)에서 '미스터 브레인워시'라는 필명으로 수행하는 친-자본주의적인 일탈, 그러나 친-자본주의적 행위가 노골화될수록 풍자의 위력도 더 강력해지는 비판예술적 시도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메가 초밥'에는, 모든 허례허식을 철폐하는 근대주의적 합리성과, 노골적인 '자본주의적 최적화'(이것은 단순히 전통적인 좌파적 맥락에서 되풀이되는 '자본의 탐욕적 이윤 추구' 비판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라는 현대성의 정수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초밥을 판매한다는 것을 핑계로 수행하는, 고도의 풍자적 은유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스시라는 테마를 가장 자본주의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스시의 최소한의 요건은 결코 훼손하지 않은 채? 그것이 바로 '메가 초밥'이라는 예술작품인 것이다.



이 32피스의 초밥이 담긴 플라스틱 식판은, 그 작품의 제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음식 전체로부터 미학성 · 예술성을 깨끗하게 제거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적 비판을 수행하는 비판적 모멘트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비판의 첫 번째 측면은 바로 예술의 구조에 대한 풍자이다. 초밥의 통상적인 '장르성'을 기대하고 밥상 앞에 앉은 감상자의 심미적 경험을, 식어터진 재료와 굳은 밥알을 통해 지속적으로 '낯설게 함'으로써 예술의 체험성과 수행성을 일깨우는 '차이-되기'의 예술비평. 이 비판적 뒤틀기는, 우리가 음식예술을 비롯해 어떤 예술적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예술적 체험이 단지 그 작품을 구현하는 예술적 형식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미처 '형식' · '클리셰' · 그리고 (심미적으로 정당화되고 보편화된 클리셰로서) '장르성'이라고 부르는 예술적 형식이라는 인식의 프레임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고 보증하지 못하는 어떤 예술적 경험의 여분이 있는지를 묻게 한다. 



좋은 초밥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모든 좋은 초밥과 같은 형식과 클리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같은 장르로 넣기에는 불충분한가? 모든 초밥과 식품공전상 그리고 사전상 전혀 다르지 않은 형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한 미식적 체험을 제공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드는가? '플라스틱 위에 올려진 초밥'이 아니었다면, 그 핵심적인 질문을 튀어나오게 하는 '낯섬'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32피스의 초밥'이 촉발하는 두 번째 비판의 측면은, 우리가 예술작품을 반복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 원본을 인지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원본을 감지할 수 있는가? 애초에 원본을 신경쓰기나 하는가? 발터 벤야민의 예술철학에서 '유일무이한 원본'이 갖는 예술경험의 계기인 '원본의 아우라'는,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한 예술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체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음식예술의 지평에서는, 그 원본의 '아우라'라는 것이 예술가의 일회적인 공연과 같은 '주방장 오마카세'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재료의 신선함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기술복제가 불가능한 시대에 존재하였던 단 한 번 뿐인 클래식 공연에도, 복제가 가능한 '악보'는 존재했다. 음식예술에 있어서 레시피는 복제 불가능한 시대의 '악보'일 뿐, 레시피대로 신선한 재료로 갓 만든 요리를 해먹는 한, 원본의 아우라는 언제나 새롭게 생성되게 된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매번 원본의 아우라를 생성해내는 고유한 '아우라'의 계기를 가진 음식예술이, 이제 갓 만든 신선한 재료가 아닌, 원본의 복제로 조리되어 밥상에 나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원본과 완전한 물리적인 동등성을 가진 복제(예컨대 소고기를 본뜬 소고기 배양육)가 아닌, 우리 불완전한 감각의 허점을 이용해 원본의 체험만을 겨우 모사한 원본 경험의 모사체라면? 



바로 이 지점에서, '와사비 없는 와사비'와 '게살 없는 게맛살초밥'이 등장한다. 우리는 와사비 페이스트에서 와사비 맛을 느끼지만 그곳에는 실제 와사비가 거의 없으며,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와사비로 간주한다. 또한, 게맛살은 실제 대게살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시 세트에 의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정당화됨으로써, 이제 원본을 대체한 하나의 오리지널이 된 모사체'로 간주하여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이것은 벤야민적 의미에서, 아우라의 빛을 잃어버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인가? 아니면 주방장에 의하여 매번 새롭게 조리됨으로써 탄생하여 씹어 삼킴을 통해 완성되는 고유한 한 번의 예술적 행위가 형성하는 '아우라'를 지닌 한 번의 예술인가? 



이것은 예술철학 전체에 있어서, 원본과 복제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음식은 원본 음식의 모사체이기 때문에 예술이 아닌가, 아니면, 모든 모방된 식자재는 원본의 모사체라는 하나의 패러디를 수행하는 예술인가? 그렇다면 메타버스와 NFT는 단지 원본의 복제로써 원본과의 유사성이라는 계기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갖는가, 아니면 원본의 복제물이지만 원본과는 전혀 상관 없이 예술적 가치를 갖는가? 패러디는 원본에 어느정도 종속되어 있는가, 아니면 원본이 사멸하거나 변질되더라도 패러디 그 자체로 예술적 계기는 살아남는가? 가상세계는 원본세계에 얼마만큼 의존적 · 종속적인가?



'32피스의 초밥'이 촉발하는 세 번째 비판의 측면은, 이것의 정치성이다. 이 저렴하지만 32피스나 되는 '메가' 초밥은, 예술로부터 무언가를 자꾸 빼는/삭감하는/할인하는 동시에 원본으로부터도 무언가를 자꾸 빼는/삭감하는/할인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그러한 태도에서 말 그대로 '더 뺄 것이 없는' 완벽함을 이루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개념들; 원본 · 예술성 · 완성본 · 정수 · 표준 · 규준 · 정통 · 전통 · 원칙 · 대의 · 헌법 · 강령 · 도덕성 · 윤리성 · 권리 · 인권 · 기본권 · 국제기준 · 국제합의 · 기본성 · 기초성 · 완결성 · 완전성 · 총체성 · 정석 · 포괄성 · 이념성 · 진품성 · 진정성 · 진심 등, 우리가 어떤 행위의 원칙이나 어떤 인간 활동 생산물을 포괄적이고 근본적으로 통제하고 규제하는 대원칙이, 현실의 이익에 따라 얼마나 '할인되고' 생략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슬라보예 지젝은 '알코올 없는 술'과 '카페인 없는 커피'처럼,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단지 혁명의 흉내만 내려고 하는, 아무도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가짜 혁명의 시대'를 콕 집어 비판했다. 여기서 슬라보예 지젝이 감수하라고 말한 '카페인과 알코올이라는 대가'는 사회운동에 있어서는 '진짜 혁명에 뛰어듦으로써 발생하는 삶의 낯선 변화들'이다. 하지만 상품 및 예술에 있어서 그 대가는, 예술성과 품질의 진품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격이다. 그 가격을 회사측에서 좀 더 부담하든지 소비자측에서 좀 더 부담하든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법제도에 있어서 그 대가는, 모든 시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하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조력하고 육성하기 위한 사회복지비용인 것이다. 



하나의 초밥 메뉴 · 예술작품 · 판매 상품 · 사회적 제도 등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콕 집어 지정할 수 있는 '단위존재' 들은 그것이 최초로 제안된 설계단계에서, 그것을 제안한 사람과 그 제안에 동감한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구현해내고자 한 특정한 목적과 가치가 있다. 나는 그것을 '존재의 정수'라고 표현하고 싶으며, 그 '존재의 정수'를 지켜내기 위한 비용은 모든 단위존재들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비용 절감을 위해, 경제적 합리성을 위해, 혹은 단지 '최소한의 형식만을 남겨놓아도 존재가 존재처럼 보인다' 라는 합의만으로 단위존재들에게 계속해서 비용을 절감하고 삭감하면 어떻게 될까?



가격에서 가치를, 스시에서 맛을, 식사예술에서 심미성을, 락교와 초생강에서 식간(食間)의 휴식을 제거한다면, 초밥이라는 한 끼의 음식예술에는 무엇이 남는가? 또한, 대중이 일식에 기대하는 '일본적 정갈함'을 자본주의적 노골성과 합리성으로 대체하고자 8X4의 격자 안에 삽입한 스시로 대체한다면 일식이라는 하나의 장르는 어떻게 되는가? 나뭇결과 조약돌 그리고 어두운 판석(板石)으로 상징되는, 정갈하고 고요한 일본적 정신을 표현하는 갈색 인테리어를 '초밥적 예술체험'에서 제거하면 어떻게 되는가? 대신 그 자리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상징인 파란 배경 위에 강조된 빨간 레터박스를 가져다두고, '무모하게 값싸고 무모하게 양 많은' 것을 강조하는 극대화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소구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장면에서 양적으로 극대화된 형식 - 그러나 그 체험만의 '고유한 실질'은 없는 형식 - 을 제하고 나면, 고유한 경험의 질(quailty)은 어디에 있는가?


고유한 체험의 정보값으로서의 '질(quality)'이 할인된 자리에 들어온 얼버무려진 만족감 '스펙터클(spectacle)'


바로 이것이, 32피스의 2만원짜리 '메가 초밥'이 하나의 예술로서 나를 감동시킨 계기였다. 혹자는 나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래서 맛이 있다고, 맛이 없다고?" 그러나 난 결코 그 질문에 예 혹은 아니오라고 답해 줄 수 없다. 이것은 하나의 고유한 예술적 체험이었기 때문이다. 때로 예술성 안에서 끊임없이 침잠하게 되는 깊은 맛의 경지가 있다. 그것은 음식예술의 맛있음과 맛없음이라는 하나의 범위 또는 대역폭 안에서 펼쳐지는 경험이다. 그런데 '무모한 초밥'이 제공하는, 이 놀라운 하나의 메타-예술적 예술비평은 맛있음/맛없음의 이분법에서 빠져나와서, 맛이란 무엇인가? 초밥이란 무엇인가? 음식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과 사회의 관계는 무엇인가? 라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우리가 (음식예술을 포함한) 예술 문화를 어떻게 소비/향유하고 있는지, 우리가 기대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예술 소비는 무엇인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안에서 누구나 바라는 비용절감 · 효용극대화 · 근대적 합리화의 극단적인 추구가 실제로 각각의 제분야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변주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기대가 정말 극대화 된 상태로 우리에게 제공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체험 혹은 어떤 결과를 맞이할 것인지, 작품 《메가초밥》(무모한초밥, 2021, 밥상 위에 복합재료, 19900원)은 보여주고 있다. 형식과 실질 모두에 있어서 극한으로 압축된 상징과 압도적으로 정교한 은유를 한 판의 플라스틱 초밥 통에 담아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 《메가초밥》은, 2021년 최고의 비판예술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악인들의 솔직한 고백을 응원하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