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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Nov 21. 2021

영점설정자

나루시선, 49

영점설정자

                                        서나루





너의 슬픔을 적은 뉴스레터를

매일 여섯 가지 주제로는 보내고 싶다


알고 계셨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 모든 슬픔이 읽히지 않았다면

마지막 서러움의 제목까지 소리나지 않고

그 우는 도서관을 도둑맞지 못하였다면

나는 그 옆에 인쇄소를 차리고 네 슬픔의

대칭이 되는 발음들을 지어올릴게


설움이 다 인정받기 전까지

긍정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나는 희망이 없다는 말마저도

이제 다 끝났다는 말마저도 할 수 있어


모든 원칙을 어기고

하나의 목적을 살려야지

너를 살려야지


비참을 인정하고 너의 닫힌 현관에

가장 불운하게 던져진 주사위를 상상하며 몸을 말고

위선자라 부르면 그 말을 듣고

넌 날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파문을 당해도 

그 성벽 아래 나는 절하네


나는 절하고 읊네

내 모든 긍정이 물수제비처럼 들뜨고 가라앉을 때

이 호수가 얼 때까지 네 모든 슬픔을 다 읽어

빙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너의 것이었겠지

뼛속까지 냉수로 젖어도

수면에서는 네가 저녁을 먹는 방향으로 말하고

그 긴 슬픔이 다 마를 때까지 헤엄치리


찬 헤엄 속의 움직임이

네 느린 몸짓들을 거울처럼 비출 때까지

기억을 덮는 언어처럼

소음을 잡는 백색소음처럼

이 하얀 아픔으로 네 성곽의 그림자들을 훔칠게


내가 너의 모든 슬픔을 대신 읽고

우리 그림자가 월식처럼 겹치고

하염없는 울음과 하염없는 기다림이 공진(共振)하면


그늘은 억울하지 않을 만큼 어둑해지고

너는 그제야 미안함도 후회도 잊고

이제 그만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으며 나올까


나는 기다릴게

네가 언젠가 머리를 감기 시작하고

머리를 다 감고

머리를 다 말릴 때까지


딱 맞는 시간을 기다리며

흔들림은 영점으로 멎어가네

버렸던 희망조차 다시 시작될 0시를 향해 

마침내 초침은 오네


우리는 해도 그믐도 없는 언덕으로 가자

빛이 새어나오는 너의 영토 아래로 가자


그러면 나는 너의 눈물을 닦기보다는

너를 껴안고 같이 울래 

그러나 슬프지는 않게 이제 무너지지는 않게

설움이 없게 함께 모든 것을 영점에서 다시







Photo by Hasan Almas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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