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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Dec 18. 2021

연애 강박을 넘어
자유로운 우정의 네트워크로

관계의 본질 : 공통의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는 것

연인이라는 관습적 관계맺기 방식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과도한 일반화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과도한 특수화의 측면이다. '과도한 일반화'란 이것이다 -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요구하고, 즉 한 사람에게서 자신의 대부분의 애착과 인간관계로부터의 혜택을 다 얻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과도한 특수화'는 이것이다 - 이것은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그렇게 전폭적인 요구를 하는 것에서 모자라서, '애인'이라는 범주에 있는 한, '애인'으로서 할 여러가지 개인별로 맞춤화되지 않고 사회적 관습에 따른 경직된 요구들을 제시한다는 점이며, 후자는: 그 요구조건 중에 하나라도 충족이 안 되었을 때, 그것 이외에 충분히 자신을 충족시켜주던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과의 전체 관계를 한 번에 다 파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폭력성이나 성격장애 같은 것이라면 당연히 헤어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정작 그 문제가 발견된 것에 비해, 발견된 사례들이 실제 이별로 이어지는 비율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비율(100%)에 비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로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른바 애인의 '외도'나 애인의 다른 이성관계(애인관계) 문제 때문에 헤어지는 비율은, 그 커플 관계가 유지됨에 따라서 창출되는 다른 압도적인 혜택보다 애인의 외도를 관계에 치명적인 것으로 서로 합의하여 혹은 자체적으로 간주하지 아니하는 비용이 훨씬 더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간주함으로써 중대한 인적 손실을 감수하고 이별을 강행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이 정도는' 존재할 것으로 어림짐작되는 비율(10%?)에 비하여, 실제로는 너무나 너무나 많은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안 맞는 이유가 있을 수 있어도, 그 안 맞는 이유를 정말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다. 물리적인 공격성과 파괴성 때문인지, 열정적 사랑이 식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이 평소에 하던대로 지속적으로 애착의 대상을 탐색하는 것을 단지 나와 사귄다는 이유만으로 멈추지 않아서인지, 그렇다면 그것이 나에게 가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손상은 어떤 것인지, 혹은 그 손상이 단순히 상징적이고 또한 관습적인 것인지 점검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실질적인 위협에 둔감한 것은 그것 자체로 문제이지만, 그야말로 상징적인 콘트라스트라고 부름직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단지 상징적인 불만, 단지 의미적인 - 저 사람은 지금까지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과 섹스해왔지만 하필 나랑 사귈 때 다른 사람이랑 섹스했어 - 라는 형이상학적 불만사항 때문에 그것 빼고는 다 좋고 서로에게 있어서 그것 이외에 전혀 문제가 없는 애인과 헤어지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 내가 사귀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귀거나 섹스하는 것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손상을 나에게 입히지 않는다면, 또한 동시에, 내가 중대한 상징적 · 문화적 · 관습적 타격을 상대방의 '외도'로 인하여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때, 나 자신의 그 분야에 대한 입장과 내 애인과의 합의에 있어서 그러한 상징적 · 문화적 · 관습적 순결의 요구사항들을 폐지함으로써 '금지할 필수적인 필요가 없고 그것을 금지할 때 발생하는 위반의 긴장 그리고 위반이 발생했을 때의 위반 자체로부터 오는 계약 위반의 불만' 이라는 불필요한 관습적 요식행위 및 그 심리적 반응을 중단하고 인간의 본질적 자유로움을 서로에게 허용할 수 있다면, 재래식 사회가 새로운 세대들에게 빠짐없이 강요해 온 이 성찰 없는 '유사-일부일처제-주의'로서의 '보수주의 연애관'을 왜 굳이 수고롭게 고수할 것인가?


내 애인이 다른 사람과 섹스하는 것이, 나의 무엇을 파괴하는가? 그것은 오직 가상적이고 문화적인 계약을 위반함으로써, 가상적이고 문화적인 실망과 분노를 만들어낸다. 자기 애인의 섹스는 자신 또는 자기 애인의 어떤 측면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나와 내 애인이 섹스를 할 때 거기에는 손상이 일어나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대부분의 정상적인 섹스는 보통 건강을 창출할 뿐이다. 당신의 애인이 또다른 사람과 섹스하고 들어온다면, 그것은 일종의 헬스 PT를 받고 들어온 것과 다름없는 효과를 창출한다. 인간으로서 더 많은 복지를 누리고 더 건강해져서 당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피해라고 생각하기 전에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 폭력과 폭력피해, 예를 들어, 가스라이팅이나 데이트폭력이 당신에게 입히는 피해를 없다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을 없다고 간주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은 실재한다. 객관적인 상황과, 조작당한 피해자가 갖는 인지의 불일치라는 객관적 피해사실이 존재한다. 데이트폭력은 실재한다. 피해자에게 존재하는 여러 층위의 손상은 객관적인 실재이다. 그런데 일부일처제는 실재하는가? 한 사람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만나야만 한다는 성찰 없는 문화적 전승은 실재하는 것인가? 한 쪽이 그것을 어겼을 때, 기존의 여러가지 관계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관계는 깨지는 것으로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는 실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수많은 성찰 없는 일부일처제주의자들에게 체험되는 '실제(reality)'이지만, 실존하는 '실재(existence)'는 아니다. 누군가 자기 애인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일부일처제의 완결성이 침해당했다고 해서, 아니면 조금 더 고전적으로, 예컨대 누군가 결혼 전에 섹스를 한 판 했고 자신의 '순결'이 만료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구성된 실제'라고 해서, '실재'의 층에서 그들이 손상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 손상되었다고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줄여서 부른다. "강박".


인간 존재가 이왕 태어난 바 최대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 최대화'의 가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건대, 한국인들 나아가 전세계의 수많은 연애-일부일처제 주의자들이 고수하는 질문받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연애의 관습이라는 것이, 실제 인간의 구체적인 인지 및 행위로서의 사랑을 통조림처럼 짓누르고 폐쇄시켜왔다는 점은 너무나 명백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대체 보수적으로 살면 무슨 혜택이 돌아오는가? 그것이 나의 바탕 물음이다. 그렇다면 되묻건대, 대체 진보적으로 살면 무슨 혜택이 돌아오는가? 그 이익은 명백하다. 


우리는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종적 특성을 포함한 지구라는 보편적 셋팅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몸과 정신이라는 개별적 자산을 가지고 태어났다.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단지 적용받을 뿐인 지구의 셋팅을 지렛대 원리를 다루듯이 최대한 지혜롭게 쓰고, 우리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자기 몸·정신의 기질적 요구사항을 잘 충족해주어야 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법칙·심리법칙을 존중하는 상태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소유한 자산을 충족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데에 있어서, 결국 우리가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은 유연성과 개인 맞춤화 접근이다. 진정으로 '개인별로 맞춤화된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결국 우리는 그 선택을 대부분 제한하는 가부장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관습세계의 망령을 거절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날 가부장세계의 프레임워크를 벗어나지 못한 전통적 결혼관의 '베타 버전'에 지나지 않은 일부일처제 연애관, 아무런 실익도 없이 행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동아시아적 연애 관습, 자신조차 다스릴 수 없음에도 타인을 길들일 수 있다고 믿는 불교적 어리석음,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환상 속의 독점적 연애, 그 모든 독점적 연애가 깨질 것을 경험으로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단 한 명의 모든 것을 올인하고 모든 욕구를 다 충족시켜주는 완벽한 애인을 찾을 거라는 동화적인 상상, 지금 사귀는 애인이 내가 상상하는 그 완벽한 애인이 아님을 알면서도 경로의존성과 현실적인 계산 때문에 그냥 사귀는 전념적 사랑의 실패, 이 사람이랑 언젠가 헤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일단 사귀는' 이중적 태도, 모든 마음 주지도 못하겠고 언젠가 끝날 관계임을 아는 사람을 나의 가장 중요하고 전인적인 결합 관계에 놓아야 하는 자괴감과 열등감. 한 사람하고만 모든 사랑과 모든 기능과 모든 혜택을 나누겠다는 불가능한 구시대의 관습은 이 모든 어려움을 만든다.


해답은, 결국 이 모든 일부일처제 독점적 모노가미 연애관의 불리한 점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그냥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도입해보는 데에 있다. 애인에게 왜 모든 마음을 주지 못하는가? 불가능한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 사람에게는, 진정으로 전념으로 사랑하는 칠칠치 못한 오랜 친구들이 하나씩은 있다. 우리는 그 친구들과 전통적인 의미에서 '연애하듯이' 사귀지 않음에도,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오랜 친구이기에 내 모든 마음을 준다 - 사귀는 사람에겐 절반의 마음조차 주지 않을 때조차도. 왜냐하면 우리는 오랜 친구들에게 불가능한 기대를 걸지 않고, 주지도 못할 형태의 마음을 억지로 짜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 어떤 슈퍼히어로가 와도 16분의 1도 채 채우지 못할 요구사항이 없었기에 언제나 100%의 비율로 만족하고, 각자의 생김새와 타고난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할 수 있는 시공간 만큼 함께하기에, 그 고유한 형태대로 마음의 산호가 자라고, 유리병이 먼저 있고 주스가 그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솟아오르는 주스의 키에 딱 맞는 유리병이 생기는 것이기에, 친구와 함께하는 서로의 마음은 언제나 100% 꽉 차게 기쁘다.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니, 헤어질 걱정도 없다. 검은머리 파뿌리될때까지 백년해로 해야 한다는 고집이 없으니, 1년도 내다보기 힘든 사람으로서 100년이라는 무책임한 약속을 걸고, 서로 거추장스러워하고, 큰 기대만 많아지고, 그러다 그 관계가 부담스러워서 깨먹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특히 사회복지가 발달하지 않은 중진국에서는 -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90세 이상 나이가 들어서 적적하고 혼자 거동이 불편할까봐 일종의 서로 노후를 책임져주기 위해 결혼하겠다는 사람도 많다. 이것은 (사회복지 전공자로서) 더더욱 웃긴 발상인데, 일단 가족을 노후대비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부터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우며, 사회복지 서비스는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받는 거지 동년배들끼리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친구를 찾는 시도도 너무 좋은데, 한 명의 내 반쪽을 쭉 데리고 간다고 해도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 생애발달주기에 맞게 친구는 계속 사귀는 것이지 지정말동무담당자 같은 컨셉 하려고 한 사람과 평생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진정한 노후대비, 실버 케어, 나이가 들어서의 친구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솔루션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해서 중앙정부의 사회복지정책에 참여하고, 일찍이 지역사회 노인복지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효과가 확실하다. 애인은 사회복지정책이 아니다.


또한, 나를 소유하지 못하는 불교적인 통찰로부터, 타인을 내 것으로 가질 수는 없겠다는 실천은 나온다. 그 실천은 타인에게 자유를 느끼게 하고 존중받는 느낌을 주며, 또한 자발성을 보장함으로써 '자발성을 통한 동기부여'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구속된 애인은 자신이 수행하는 당신에 대한 헌신이 의무에 의한 것인지 자발성에 의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고 그래서 동기(motivation)에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롭게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곁에 머물 것을 강요받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당신에게 하는 매 순간의 행위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것임을 곱씹고 음미하고, 그것 자체에 기뻐하며, 또한 자신이 선택했다는 그 사실 자체로부터 또 하나의 추가적인 동기와 확신을 얻는다.


그러므로 자유는 사랑을 증폭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놔 두면, 자유롭게 당신을 선택한 사람이 당신에게 하는 모든 행위는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확신임이 보장된다. 이것은 유일한 '완전무결하게 정당한' 행위의 형태이자, 사랑의 가장 순수하고 치밀한 형태이다. 또한 자유는 자유의 향기를 맡은 친구들을 벌들 가운데의 꿀처럼, 시내 한가운데의 스타벅스처럼 불러모은다.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당신에게는 당신과 여러가지 측면에서 윈윈할 수 있는 고유한 재능과 특성을 가진 친구들이 찾아온다. 일부일처제식 단 한 사람의 애인은 그 모든 친구-포트폴리오가 제공하는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완벽한 애인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해도, 한 시대 한 문화권에 태어난 한 관점의 인간에 불과하다. 


인류의 힘은 함께라는 데에서 나왔고, 언제나 그랬고, 그것은 앞서 언급한 '지구의 셋팅'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법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들을 다양하게 사귀고, 마치 뉴질랜드 소처럼 나의 친구들을 '풀어 놓고 사귀고', 폭넓은 친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고, 애인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데로 살고, 애인이 섹스를 하든지 말든지 궁금하면 후기나 물어보고, 자유 속에서 오직 인간의 참된 긍정적인 본성을 육성하는 자유 속에서 나와 친구의 동반성장과 공동이익을 위해 분발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본질은 함께 좋은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며, 그것을 보다 단순화하자면 공통의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공통의 하고 싶은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그 '팀의 매칭'에 있어서는 자유롭게 하고, 그 사람을 찾아서 사귀고 때로는 헤어지는 데에도 자유롭게 하며, 애인의 어떤 특별한 애착이 찾아왔을 때조차 그 애인을 '애인이라는 특별한 애착을 나누는 자유롭게 함께하는 친구'로 생각하여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자유할수록 관계는 더 신뢰로워지고, 더 튼튼해지고, 우리 삶의 생각지도 못한 체험과 아름다움들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






페르시아의 왕비 아롯사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가 그리스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묻는다.

"누가 저들의 목자로 군림하며, 그 군대를 지배하는가?" 

신하가 답한다. 


"그들은 누구의 노예도, 누구의 신하도 아닙니다."

- 아이스퀼로스,『페르시아인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Simon Maag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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