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Dec 19. 2021

공감피로·대리외상의
심리-사회적 원인 분석과 해법

공감피로를 조절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더 많이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은 공감능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공감능력은, 우리 인류가 수많은 악과 비극에 고통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비록 그것에 맞선 노력들의 혜택을 모든 인류 동포들이 균등하게 받지 못하고 여전히 지구 한편에서는 심각한 비참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우리 인류가 겨우겨우 지금까지 존속해올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이유이다.


오늘 나는 공감피로(Compassion Fatigue)와 대리외상(Vicarious Trauma)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공감피로/대리외상이란 타인의 고통을 목격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 발생하는 '공감'이, 충격적인 강도나 누적된 피로에 의해서, 공감 하는 주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현상이다. 공감피로는 공감을 직업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진이라는 측면을, 대리외상은 우리가 흔히 '그건 나에게 트라우마야' 라고 부를 만한 심리적 외상사건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사람이 그 묘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충격 전이'의 측면을 강조한 특면이 크다. 하지만 두 개념은 '공감'과 '연민'의 관계만큼이나 거의 비슷한 개념이기에, 일단은 이 글에서는 둘을 꼭 붙인 상태로 함께 다룰 것이다.


공감피로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완전히 제거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너무 보편적인 현상이다. 소수의 불행한 예외를 제외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공감피로를 느낀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숨쉬고 에너지를 만드는 미토콘드리아의 ATP합성과정이 그 자체로 우리 세포에 미세한 손상을 누적시키는 활성산소를 만들어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활성산소는 죽어야만 우리 몸에서 사라진다. 공감을 멈춘다면 우리 사회는 금방 망할 것이다. 그러나 공감한다면 우리 마음은 상처입을 것이다. 


공감은 때론 고통스럽지만, 이것들이야말로 인간성을 증명하는 메커니즘이며 인간성의 본질 그 자체이다. 연민과 책임감과 연대감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는 인간인가?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 내 안에 들어와서 '진짜 고통스러운 여러 증상을 일으키는 실제 아픔'이 되지 않고 단지 따끔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인류는 어떻게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귀한 시간과 에너지를 연료처럼 불태워올 수 있었겠는가? 공감의 아픔은, 인간성이라는 휘발유가 마음이라는 엔진에서 연소되면서 뿜어져나오는 폐열(廢熱)이고, 이것은 운전자에게 화상을 입히는 열인 동시에 엔진룸을 데워서 모든 부품들을 부드럽게 만드는 열이기도 하다. 공감이 초래하는 고통은 당연하며, 어느정도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공감이 단지 나에게 고통만을 불러일으킬 뿐, 실질적인 문제해결로 향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감 엔진이 고열로 달궈졌음에도, 그 힘을 통해 정작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고 운전자만 익혀버리고 있는 것은 엄청난 문제가 된다. 여기에는 공감의 자체 성질을 정밀하게 다루지 못하는 심리기술의 문제가 절반 있고, 현대인들의 파편화된 연대에도 문제가 절반이 있다. 나는 오늘 최종적으로는 우리 마음 속에서 대리외상 자체를 다루는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곁가지 이야기인 '현대인들의 파편화된 연대' 이야기를 먼저 해보려고 한다.



챕터 1 - 전반부 절반의 문제 :
공감이 낳은 죄책감을 해소하는 정치 참여에 관하여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자신의 공감이 초래하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것의 원인을 정확하게 제거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던, 사건 발생 이후 오랫동안 언론에서 사회복지계에서 뜨겁게 다루어졌던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 송파구 세모녀 자살 사건, 구의역 사망사고, 태안화력발전소 사망사고, 평택항 사망사고, 그리고 최근에는 22세 청년 간병살인사건….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은 단순히 책임자를 감옥에 넣거나 안전설비 몇 가지를 강화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산업구조와 보건복지구조의 관습과 체질 자체를 전환해야 하는 문제이다. 


어떤 사업을 원래 운영하는 회사가 노동자 및 설비를 자기 책임하에 직고용하지 않고, 자꾸 외주를 주는 것이 모든 산업재해사고의 근본 원인이다. 비정규직에게는 안전설비를 주지 않거나, 안전책임을 비껴나가게 하기 위해서 안전감사가 적용되지 않는 소규모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서류상으로만' 전혀 다른 회사에 고용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산업재해 사망사고가 나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 회사는 폐업시키고 다른 회사를 만들어서 영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값싼 인력을 공급하는 인력 아웃소싱 회사를 통해 저숙련 인력을 싸게 부리다가, 사망사고가 나면 산재사망자의 안전불감증에 탓을 돌리는 것이다. 노동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을 피해가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아예 회사법 전체를 개편해야 한다.


송파구 세모녀 자살사건, 잇따르는 간병살인사건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의료보험제도가 선진적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산에 잡히는' 가정형편을 기준으로 할인율을 다르게 적용하는 선별적 복지라는 점에서 결국 이렇게 의료사각지대 들어가 죽어서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결국엔 장기적으로 영국 · 캐나다와 같은 무상의료 시스템으로 가야지만 또다른 사망자들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산재사고, 생활고 비관 자살사고 등을 보면서, 이런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촉발하는 공감의 고통을 최종적으로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특히 한국사람들은, 그 분노와 고통이 정말 쉽사리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기나긴 냉전체제 이후, 한반도인의 문화유전자에 각인된 '빨갱이 사냥'의 두려움 때문에 움츠러든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거기에 다른 사람의 진지한 참여를 비웃으면서 자신의 도덕적이고 실용적인 우위를 과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삶의 가치 결핍을 타인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채우려고 하는 자존감 낮은 비난자들과, 그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냥 편안히 군중 속에 섞여들기를 택한 침묵자들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정치란 단지 극단적인 두 편으로 나뉘어서 조금 더 이익을 보겠다고 악을 쓰는 행위가 아니다. 그런 이미지는 수많은 '정치 물귀신'들의 지리멸렬한 상상력이 그려낸, 멸망을 위한 벽화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진보도 쓰레기고 보수도 쓰레기니까, 나도 탈정치화되고 너도 탈정치화되어서 우리 모두 정치와 멀어져서 각자도생하며 죽어나가보자"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짜로 정치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정치에 참여해서 세상을 개선하는 수많은 기여자들이 사라졌을 때, 힘과 패거리에 의해 자신이 먼저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마치 '우리 모두 다같이 코로나 백신 맞지 맙시다' 라고 말하는… 결코 그 말에 책임질 능력도 없고,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하늘나라로 떠날 백신거부자들처럼. 


정치란, 실제 우리 공동체가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고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을 살리는 매우 고마운 사회참여 활동이라는 인식과 자부심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중앙정부는 물론이고 각자가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지역의 풀뿌리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그곳에서 정책을 실험하고, 사람들을 조직해서, 중앙정부 정치로도 계속해서 정책과 인력을 파견해야 한다. 뉴스를 볼 때마다 쌓이는 공감피로를, 사회를 가장 강력하게 바꿀 수 있는 정치참여라는 행동방식으로 승화시켜주어야만, 사람은 죄책감이나 피로감에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정치를 통해서 산업안전 · 보건복지 · 산업구조의 거시적 변화를 이끌어내야만, 공감피로/대리외상의 근본적 원인인 '인간의 고통스러운 죽음' 그 자체를 끝장낼 수 있다. 진정한 추모는 정치 참여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추모할 일이 계속 생길 것이니까. 


만약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는 공감피로를 이렇게 정치 참여와 체제 변혁의 방식으로 '승화'시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성숙한 사람은 차라리 자기 자신에게 죄를 묻는 죄책감으로 침잠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덜 성숙한 사람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무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해결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공감피로가 만들어내는 끝없는 무망감과 소진과 피로감을 어떻게든 마음의 한 쪽으로 치워 놓기 위해서 여러가지 부적절한 방어기제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냉소'이다.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내가 그 문제를 생각하면 고통만 받을 때, 내가 받는 그 고통을 부정하기 위하여, 미성숙한 사람은 공격적인 냉소, 혹은 냉소적인 공격성을 뿜어낸다. 나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역량과 지혜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문제가 촉발하는 고통들에 너무 심각하게 빠져들어갈 경우, 굉장히 역기능적인 대처방략들을 생각해내고, 때로는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가 워마드 또는 TERF고 부르는 혹은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과 공감의 고통을 달래기 위하여 가장 쉽고 빠른 자기효능감을 찾고자 한 사람들이다. 그 '가장 쉽고 빠른 자기효능감'을 찾는 방식이란, 바로 가장 만만한 약자들을 두들겨 패는 방식이었다. TERF들은 젠더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촉발하는 공감피로·대리외상·좌절감·무력감을 최대한 적은 비용을 들여 최대한 많은 자기효능감으로 대체하기 위해… 트랜스젠더라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공공정책의 대상조차 겨우 될 수 있었던 소수의, 안 그래도 자기 태생적인 문제 때문에 고생하는 최약자 집단에게 폭력을 가했다.


또 다른 예는, 우리가 '군무새'라고 부르는 남성들이다(그런데 놀랍게도 국뽕에 취한 여성들도 가끔은 존재한다 - 해병대를 좋아하고 ROKA 티셔츠를 즐겨 입지만 정작 본인이 입대하지는 않는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군대 다녀 온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알고, 다른 사람도 심지어 여성조차도 군대를 반드시 가야 된다고 생각하며, 강제 징병제는 말할 것도 없는 진리이고, 모병제는 남들이 나의 고생에 무임승차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군대에서 겪은 손상과 고통들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계속해서 듣는 군대에서의 참혹한 이야기들을 어떤 식으로든 빨리 정당화하고 자신의 공감 피로를 눈 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기 때문에, 차라리 강제징병의 경험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면서, 그 모든 고통들을 필요악으로 간주하면서 편안해지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우리사회의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하며, 실질적인 사회개혁을 크게 훼손하고 있는 군무새나 워마드와 같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피해를 입는 양심적병역거부자나 젠더퀴어의 입장에서 보기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싸이코패스인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최종적으로 한심하고 악한 결과를 낸다. 그러나 그 메커니즘에는 나름대로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흔적이 남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과거에 (혹은 현재에) 겪었던 고통과, 끔찍한 공감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건설적이고 공공적으로 함께 대응하는 법을 찾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물론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에는, 기질이나 지능과 같은 개인적 요소들도 있겠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건설적이고 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3지대도 존재한다. 정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정치에 냉소하여 사회적 약자를 두들겨패지도 않지만, 정치적 욕구를 늘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모든 취지에 공감하지만, 여전히 생활 여건상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때론 건강 문제가 될 수 있고, 또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가져온 생활고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사람들의 임금이 너무나도 줄어들고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나 한 사람의 생활을 유지하고 먹고 사는데에도 너무 바빠서, 내가 동료 시민의 비극에 마음아파 할지라도 그 사람을 도우러 뛰어들 여력이 없는 것도… 하나의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톤은 다시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공감피로/대리외상을 함께 사회를 건설하면서 털어낼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좌석에 초대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정치운동으로 넘어간다. 더 많은 마을공동체와 지역 풀뿌리 정당활동이 나와서, 여전히 타인을 위해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지방자치제도와 제도권 정당에서 약자를 위해 제도를 바꾸고 산업체질을 바꾸는 일을 하도록 안내해주어야 한다. 자, 그렇다면 이것이 먼저 언급한 후자의 절반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대리외상과 공감피로에 얽힌 나머지 절반의 문제는 무엇인가?



챕터 2 - 나머지 절반의 문제 :
균형잡힌 심리기술에 관하여

나머지 절반의 문제는, 바로 우리 내면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요즘 심리학이 각광받는 이유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생각이 '사회는 바꾸기 어렵지만, 내 마음 하나만큼은 조절해봄직하다' 라는 데에 다다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불교가 '탈정치성' 이라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천년째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음수련과 라이프스타일로 자리를 굳힌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마음을 잘 다스리기만 한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고, 웬만한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대처가 가능하다. 모든 사건은 결국에는 마음 속에서 시뮬레이션처럼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건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원본에 대해서 접근하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혹은 내면의 평화에 너무 안주한 채 '탈정치화' 되지만 않는다면, 외부 사건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는 원치 않는 공감의 고통 · 공감피로 · 대리외상을 적절한 심리 기술을 통해 제거해보는 것이야 얼마든지 해봄직한 일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운동가이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조력자이자 개인적인 친구로서 말하자면, 정말 사회적 참사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고통에 몸부림치느니 그냥 다 잊고 너가 행복한 길 하나만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을 때도 많다. 정치 참여를 촉구하는 나의 뜻은 전반부에서 원칙적으로 표명하였으니, 후반부는 조금 더 그런 세속의 전투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집중해보련다.


나도 공감피로(Compassion Fatigue)와 대리외상(Vicarious Trauma)으로 일상생활에 엄청난 지장을 겪어 본 적이 있다. 죄책감과 책임감과 강박 때문에, 그리고 피해자가 당했을 고통을 계속해서 시뮬레이션하는 공감의 특성 때문에 일상 생활이 망가져 본 적이 있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착한 사람들' 심지어는 너무 착해서 착한 일을 아예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 ; 사회운동가들, 학생운동가들, 전업 활동가들, 사회복지사들, 전문상담사들, 간호사, 교사들이 많이들 이런 '마음의 산화성 피해'에 노출된다. 그래서 실제로도 국내외의 공감피로/대리외상 연구들은 하나같이 간호사, 사회복지사, 전문상담사에 포커스를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누구보다 마음이 따듯하고 타인의 행복한 삶에 관심이 많아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돕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혼자서만 감당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아플 뿐만 아니라 너무나 부당한 일이다.


당신이 이런 전면적인 공감피로/대리외상에 노출된 사람이든지, 아니면 뉴스에서 참사 보도를 접할 때 간헐적으로 공감피로를 느끼는 사람이든지, 어떻든 공감피로/대리외상은 우리가 신경쓸 필요가 있는 딜레마이다. 우리가 활성산소를 최대한 통제하기 위해 항산화제를 복용하듯이, 우리는 대리외상을 어느정도 견딜 만한 수준으로 통제하기 위한 전략 역시 세워야 한다. 나는 굉장히 많은 대리 대리외상의 시간들을 견디면서 대리 외상을 극복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개발했다. 나는 오늘 그 전략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다.


공감피로/대리외상이 우리에게 고통을 입히는 마음의 기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사람이 쉽게 대답할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이 너무 생생하고 억울한 종류인 것인 나머지, 너무 생생하게 상상하고 너무 많이 반복적으로 시뮬레이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적 인지가 가진 설계상의 약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역기능적인 대리외상을, '내가 지금 이 사건에 인류동포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개입 해야 한다' 라는 신호를 주는 수준으로 제한하고, 대리외상이 촉발하는 충격적 고통을 나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억제 하며, '비극의 시공간적 희석'을 통해 대리외상에서 빠져나오는 인지적 대응방략을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장평대전의 논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을 강화한 버전은, "모든 조상의 논증"이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함께 풀어나가 보자. 자, 공감 피로나 대리 외상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접한 어떤 구체적인 최근의 사건에 연민을 느끼는 경우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데이트 폭력 살해 사건이나 특정 끔찍한 참사 사건들이 그 대상이다. 그래서 대리외상을 느끼는 사람들은 인터넷 뉴스를 찾아 보고 피해자의 수기를 읽고 피해자가 묘사된 목격자의 진술을 보면서 그 사람의 고통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하고 그 시뮬레이션을 무한재생하는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주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들이 당연히 고통스럽게 여기는 그 사건, 사실 그 사건이 고통스러운 까닭은, 그 사건의 피해자가 나와 충분히 가깝고 내가 충분히 친밀하다고 무의식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이제 당신은 장평대전을 이해할 준비가 된 것이다. 


장평대전은 기원전 260년 음력 9월, 고대 중국 진(秦)나라와 조(趙)나라 사이에 있었던 대규모 전투였다. 사건의 발단은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한나라 침공에서 시작된다. 진나라는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국토를 두동강내는데, 한나라의 진군에 의해 수도와 차단당한 '상당(上黨)' 지역의 태수는 진나라에 복속되기보다는 과거에 한 나라였던 조나라에 합병되기로 결정한다. 조나라는 이를 받아들이고 '상당' 지역에 군대를 보내 피난민을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진나라의 심기를 자극한다.


조나라는 당대 최강국이었던 진나라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자신을 도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에 자신과 한 나라였던 위나라와 한나라조차 조나라를 돕지 않았다. 260년 4월에 진나라는 '상당'을 점령했지만, 끌고 가서 노동력으로 써야 할 포로는 이미 조나라로 도망가서 없었고, 분노한 진나라는 그대로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나라의 장군 염파는 45만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에 맞선다.


하지만 조나라가 효율적인 수비전을 펼치는 동안 진나라의 이간질로 조나라의 명장군 염파가 경질되고, 이 틈을 타 진나라는 조나라 군대를 장평의 황토지대에 포위한다. 조나라 군은 빠르게 보루를 쌓아 방어전에 들어가고, 보급이 끊긴 채로 46일을 버틴다. 46일 째 되는 날, 조나라의 45만 대군은 굶어서 서로 잡아먹기 직전에 마지막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여러 번의 공격이 좌절하고, 끝내 지휘관이 선두에서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자 조나라 병사들은 모두 진나라에 항복한다.


진나라의 장수 무안군은 45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항복을 받아주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진나라는 45만 명의 포로를 참수하여 파묻어 죽이고, 나이가 어린 240명만을 살려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아직까지도 기록이 경신되지 않은 학살사건인 장평대전이며, (출처) 이것은 사마천의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기록된 정사(正史)이다. 고대 기록이라 숫적인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어왔으나, 오늘날 장평대전 학살지가 직접적으로 발굴되고, 지역 주민들이 사람의 뼈로 이루어진 지층을 발견해 신고하는 등 고고학작업이 진행되면서 '정말 장평에서 45만명이 학살된 것이 맞다'는 쪽으로 결론이 좁혀지고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느꼈던 것, 그리고 아마도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꼈을지도 모르는 것은, 이 이야기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방금 장평에서 45만 명이 생매장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물론 나도 장평대전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름 충격을 받았지만, 지난 주 오전에 농협에서 통장을 개설하다가 TV에서 데이트폭력 페미사이드(Femicide) 사건에 또 한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보다는 훨씬 덜 충격을 받았다. 45만 명이나 더 많이 죽은 사건을 알고 있음에도, 45만분의 1도 충격 받지 않은 것이다.


장평의 진흙에 매장당한 45만명의 고대 중국인의 고통에 이입 가능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군 육군이 2020년 기준으로 42만 명 정도 된다. 42만 명의 한국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면 한국인들은 향후 수십년간 정신적 충격으로 마비될 것이다. 하지만 장평대전은 어떤가? 장평대전의 끔찍한 학살사건을 접한 사람은 그저 고대인들이 그런 대규모 학살을 저지를 능력이 있었음에 놀라고, 고대에도 여전했던 인간의 잔인함에 놀라겠지만, 장평대전 희생자들에 이입해서 공감피로에 압도당해 주저앉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장평대전에서 학살당한 45만명의 고대 중국인들은 나와 문화적인 유사성이 적고,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오랜 사람이고, 개인적인 관계도 너무 희미하고, 특히 여성이나 아이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적어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남성보다는 여성이나 아이들의 죽음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난 그것이 결코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선택적인 민감성 - 그러나 이것은 딱히 페미니즘적 민감성은 아니다 - 이 아니라면, 아직도 이렇게 여성들이 특별히 더 많이 살해당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비인간화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평 대전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옷과 복식과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을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공감피로와 대리외상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장평대전은 단지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대량학살이 입증된 실제 역사적 사실임에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 가장 끔찍한 사건의 순서대로 슬퍼해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45만 명이 죽은 장평대전이 1번이고, 30만 명이 죽은 난징대학살이 2번… 이런 식으로 죽음의 양에 비례하게 슬픔의 순위가 매겨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같은 민족도 아니고 같은 시간대,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닌 장평대전 학살피해자들의 개별 생명과, 우리가 가슴이 찢기도록 안타까워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폭력 피해자들이 생명은 얼마나 다른가?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소중하고 동등하게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보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고통이나 죽음이 우리에게 더 심각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놀라운 현상은,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누군가의 죽음이 딱히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슬퍼한다는 것이다. 신문기사 속 익명 처리되어,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어떤 한국인, 조금 더 기준을 넓혀서 말하자면 어떤 남한인, 어떤 동아시아인, 어떤 21세기에 태어났던 사람의 죽음에도, 우리는 구토처럼 올라오는 침습사고와 반추사고에 일상을 멈추고 불현듯 멍때리게 되는 대리외상의 순간을 경험한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해도, 가깝다고 생각하고,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그 삶이 아깝다고 생각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할수록, 우리는 목숨의 숫자와 상관없이, 어떤 거기에 있었을 그 사람의 삶에 '질적으로'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 이미 사망해서 없어진 사람이 가졌던 과거의 삶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영정을 '한국인', '여성', '청년', '동료 시민', '동료 노동자' 등의 팻말이 붙은 친근한 마음 속 환대의 방에 초대하여, 고인을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귀중하게 느끼고 애도해온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중국 45만 대학살 사건은, 우리가 대리외상을 느끼는 어떤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혹은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정반대 위치에 가장 뚜렷한 상징으로 위치함으로써,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대리외상 해결의 열쇠를 건네준다. 장평대전은 우리에게, '특정 피해자들을 현재의 우리로부터 멀면 멀다고 느낄수록, 아무리 크고 많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일지라도 공감피로/대리외상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수 있으며, 해당 사건을 단지 건조한 사실로서만 인지할 수 있다'는 놀라운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텔레비전 뉴스에서 그리고 어이없고 끔찍한 판결문 보도에서 접하는 피해자들을, 장평대전의 고대중국병사들만큼 나와 상관 없는 사람으로 느낄 수 있을지는 나름의 심리적 격리(또는 심리적 거리두기) 훈련이 필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애초에 인간이 자신의 심리적 고통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이런저런 심리 기술을 활용하여 의도적으로 무감각해져도 괜찮은지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서부터가 윤리적으로 상당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다. 만약 이러한 원리를 계속 발전시켜서 타인의 고통이 나에게 공감성 고통으로 연결되지 않게끔 하는 심리 기술을 개발한다면, 그것은 사용되어도 괜찮은가? 


나는… 나는 적어도… 연구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활동가, 여성운동가, 페미니스트들이 대리외상으로 픽픽 쓰러져나가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심리학계에 발을 들이게 된 나에게는, 이런 기술을 찾고 적절한 사람에게 보급하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다. 지난 십여 년 간, 사회활동가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공감피로 문제를 겪어 왔다. 2009 용산참사·2014 세월호참사 등 이명박-박근혜 극우 정권동안 발생한 수많은 정치 및 노동탄압 사건들, 2016 강남역사건 등 지속되어온 교제살인 · 스토킹 살인들, 2013년에야 겨우 밝혀지고 2019년에도 결국 공소시효 만료로 감옥에 처넣는 것은 실패한 2006 김학의-윤중천 집단성폭행사건과 2016~2017 안희정 성폭행사건 등 정치 및 젠더 두 특성 모두가 얽힌 사건들을 겪으며 그 '사례'들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때로는 장기간 손상되었다. 


나는 아직도, 존경하는 한 유명 여성학자께서 페이스북에 올렸던 그 글을 잊지 못한다. 정확한 시간이 가물가물하지만, 한국사회에서 해마다 100여 명씩 피살당하는 여성살해(Femicide) 사례가 집중 보도되고 아카이빙되고 있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선생님은 그러한 젠더폭력 · 여성살해 사건을 볼 때마다, '살 타는 냄새'를 맡는다고 하셨다. 나는 그 내리던 마우스 스크롤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살 타는 냄새. 그러니까 환취인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공감피로, 그것이 촉발한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격발한 일시적인 정신병적 반응…. 너무나 선량하고 이타적이어서, 평생을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구와 실천에 바친 사람들조차, 이렇게 부서지고 쓰러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공감피로/대리외상에 의해 사회운동가들의 마음 손상을 막기 위해서, 그들의 공감능력을 일시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둔감하게 만드는 것은 옳은 행동인가? 나는 실용적으로 그리고 '공감 피로를 지켜보는 공감 피로'를 막고 싶은 마음에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한낱 내가 그런 중대한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하고 지켜봐야 할 문제로 보인다. 아무튼 어찌되었든 간에 이 '장평대전 학살'의 사례는, 심리적 조절의 중요한 요인 하나를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공감피로/대리외상은 본질적이고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인지적 조건에 따라서 조절하고 때로는 아예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통제 기술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오늘 내가 공감능력의 과잉 때문에 고통받는 경우들을 많이 언급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혹시라도 공감능력에 반감을 갖거나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공감능력과 공감이 초래하는 모든 고통은 우리 인간성을 증명하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감은 사회통합의 근본적인 동력이고, 실제로 수많은 잠재적인 피해자들을 구했고, 여성학 및 페미니즘의 중요한 동력이어왔고, 국방개혁과 병영 민주화의 중요한 동력이어왔으며, 사회복지학과 사회주의와 자선사업의 강력한 동력이기도 하였 인간성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만 '전체적 과잉'이나 '부분적 울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몸 속을 흐르는 피조차 너무 많으면 고혈압이 되고 우리 두뇌를 보호해 주는 뇌척수액조차 너무 많으면 뇌압상승으로 목숨을 위태롭게 하듯이 공감 능력도 너무 지나칠 경우 우리를 습격하여 압도하고 마비시킨다.


그리고 반대로, 한 사람의 한국인의 죽음에는 슬퍼해도 고대 중국인 45만 명의 죽음에는 별로 슬퍼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게 혹시라도 충격 받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차라리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라도 삶에 문득 문득 찾아오는 피해자에 대한 통제할 수 없는 대리외상 감정들을 컨트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마취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영원히 잠들기 위해 마취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더 생생히 느끼기 위해 마취를 하는 것도 아니다. 견딜 수 없으며 견딜 필요도 없는 고통을 잠시 지나가게 하기 위해서 마취를 하는 것이다. 마취를 해야 한다고 해서, 신경을 끊어놓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기능을 완전히 차단하거나 결벽증적으로 절대 차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기능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균형이 구체적으로 각각 어떠한지는 지금 여기서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챕터 1에서 논했던 '실질적인 사회 변화'를 조금씩이라도 일으키는 일과 지금 이곳 챕터 2에서 논하고 있는 '고통과 공감의 기능적 적정선'을 찾는 일이라는 원칙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공감피로/대리외상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공감피로/대리외상을 느낄 수 있는 도전적인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읽어준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한다. 고마움의 표시로 '장평대전의 논증' 보다 더 강력하게 대리 외상을 잡아 주는 인지적 시나리오 하나를 제공해 주겠다. 나는 그것을 '원시인 논증'이라고 말한다. 모든 원시인들의 죽음을 상상해보라. 모든 조상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라. 그 죽음들에는 반드시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특정 사건 보다 수십 배는 더 끔찍하고 잔인한 죽음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원시인들의 죽음을 그 다시 애통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시인 피해자의 고통과 오늘 날 우리가 이른 소중한 동요 시민의 고통은 사실상 같은 것인데도 말이다.


만약에 상상하건대 우리가 누군가를 원시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 공감피로/대리외상을 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원시인으로 간주하고 누군가를(나 자신을) 현대인으로 간주한 '인지적 조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마음 속에서 나를 미래로 보내 나를 미래인으로 상상하고, 현재의 내가 극심한 공감피로를 느끼고 있던 어떤 특정한 피해자를 과거에 있었던 50만년 전의 원시인으로 상상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지금 우리 와 동일한 거의 비슷한 생활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그렇게 멀게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렵고 완벽하게 될 수는 없겠지만, 공간 피로가 조금이라도 경감 되어본 경험, 피해자를 장구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상대화 시켜보는 경험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공감피로/대리외상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이 굉장히 상대적이고 맥락적이며,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이 인지적인 조작(operation) 의한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공간 피로가 대리 외상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잠재적인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억제하며 잠재적인 가해자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여러가지 실무적인 일거리들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K8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연애 강박을 넘어 자유로운 우정의 네트워크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