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시

나루시선, 53

by 나루

생일시

서나루


여름이 생일인데 8월은 잔인하게 온다

구태여 인간의 잔인까지 가지 않아도

해일까지 가지 않아도

소빙하기까지 가지 않아도 한 달이 간다

사람이 휘두르는 칼은 차라리 빗나갈 여지라도 있다


쏟긴 수은전지처럼 흩어진 삶의

밀린 일기들. 보내야지 생각만 하는 안부들을

레고 무더기처럼 쏟고 조립하고 투-두 리스트를 꾸역꾸역 채우면

오라던 나의 OCD 차도는 오지 않고

삶이 어른처럼 밀물든다 무섭고

자랑스럽고

징그럽다

숙제로 나온 우체국 7호박스의 레고 더미

안에서 눈이 마주친 농발 거미 같다

긴 발이 삐져나와 있었다

해는, 그 큰 놈이 눈에 보이지도 않게 사라지고


놈의 눈 안에는 내가 버젓한 남자라는 관념이 있다

자꾸 누굴 죽이라고 소총을 쥐어준다

야이새끼야 너도 이나라의 군인이야 아니면

기립하시오, 당신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그런 악몽을 깨는 새벽마다

나의 권리가 목덜미를 기어다닌다

왜 나에게 술을 파나요


골다공증처럼, 강철보다 단단한 두개골처럼

자꾸 어엿한 뼈는 자라고

거울을 보면 나도 어깨가 남자처럼 보이고

우욱


아무런 어른됨도 바라지 않았는데

더럽게 장성한 것들이, 번듯한 나의 완비들이

그럴듯하고 우습고 버젓하고 징그러운 것들이

우체통으로 숨어들어와

현관 비밀번호 소리에 배게 밑으로 숨는다

요정처럼 내 피부를 기어다니려고


내가 외출했을 때도 주황 햇볕이 드는 자취방

그러나 먼지 밟은 발바닥을 털고 매일을 출근해도

아무 저항도 못할 줄 알아

내가 서명이 아니라 이름을 적은 서류는 모두 거짓이다







Photo by Vadim Bogulo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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