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에서 의식은 있어도 자아는 없다는 것에서 배우는 고통 해방 기술
밤에 선잠과 꿈을 섞어서 하며 뒤척이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 자아, 고 개념이 대략 어떤 것인지에 대한 체험이었다.
나는 깨어나기 직전까지 여느때처럼 비현실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꿈과 어두운 이불의 감촉을 오락가락하고 있었지만 기억은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정신은 꿈에서 점점 현실로 옮겨왔고, 나는 결국 지금 여기가 어딘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자전거 체인에 힘이 착! 걸리는 것이 느껴지듯이, 뭔가 회전하는 동력원에 저항이 착! 가해지면 약간의 진동과 물살을 가르는 듯한 팽팽함이 느껴지듯이, 꿈속에서 꿈 내부의 허무맹랑한 고민거리들로 공회전 하고 있는 나의 정신에, 내가 깨어 있는 동안 수없이 하고 있던 상념의 기본값과 주된 걱정과 고민거리들이 차르륵 하고 로딩되는 것이었다.
꿈속의 논리 특유의 시덥잖은 것을 고민하며 공회전 하고 있던 나의 정신이, 내가 느끼는 이 감촉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즉시 내가 평소에 하던 모든 생각들이 뒤늦게 로딩하는 장면을 나의 기억이 다 목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꿈이었음을 깨닫자마자,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들이 로딩되자마자 나는 즉시 고통을 느꼈다.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들은 이 세상에 대한 걱정과, 요즘 편찮으신 어르신들을 보며 부쩍 늘어난 늙음과 건강에 대한 걱정과, 나에게 등돌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들이었다. 그것들은 습관적인 생각이었다. 습관적인 생각이 로딩되자마자 나는 익숙한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낮에 깨어 있을 때 느끼던 고통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은 내(의식)가 나(자아)라서 고통받은 적이 없었다. 그냥 공상적이고 허무맹랑한 그때그때의 세계에 대하여 내면 깊이 심어져 있는 윤리의식과 행동 스타일 대로 반응할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의 꿈은, 내가 어떤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 참가자가 자신의이 파벌을 만들고 있어서 이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현실에서 들으면 웃길만큼 비현실적이었고 나는 그때그때 자동 생성되는 꿈의 과제에 열심히 고민했다. 꿈이 기억에는 남듯이, 당시의 "나 없는 몰입"도 기억되고 있었다.
꿈 안에서의 의식도 나의 의식이었고, 내가 깨어있을 때 얻은 지식과 가치관으로 꿈에서도 행동했지만, 꿈 안에서는 내 자신이 살면서 누군가에게 버려졌고 거절당했고 배신도 당했고 그게 슬프고 이 세상은 큰 문제들에 얽혀 있으며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언젠가는 노화에 손상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상시적으로 하던 걱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얼'은 존재했지만, 지금 몇시냐는 생각, 내일 일어나서 출근 해야 되는 생각, 지금 몇 시간 잤지 하는 생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꿈이 깨고 내가 나임을 느끼는 순간 그 생각은 마치 상징처럼 압축된, 마치 예술작품의 주제의식과 같은 몇 가지 '주제감각', 컴퓨터로 치면 "헤더 파일"들이 떠오르며 주르륵 로딩되었고 그 모든 것이 주는 부담과 고통도 즉시 느껴졌다.
나 아니었던 의식에서 나의 특성을 대면하는 의식으로의 전환은 그렇게 운좋게 기록되었다. 나의 기억을 다 잊고 허무맹랑한 고민을 되풀이하는 평화로운 자동감각 상태에서, '나'의 기억을 로딩하자마자 자전거 체인에 실리는 힘처럼 착 걸리는 심리적 고통과 부담감은 "아, 내가 나로서는 것이 상당히 부담되고 고통인 것이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마치 만성통증이나 되풀이된 학대처럼 계속 있어서 당연한 것이라고 느껴왔을 뿐, 나는 나로 살았기 때문에 고통받아온 것이다. 잠깐이지만 의식을 나로 살지 않아보고, 곧이어 의식에 나의 기억과 정체성이 탑재되는 컴퓨터 부팅 같은 과정을 통해 나로 돌아와 보니, 나로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불교에서 그렇게 나와, 나의 아집과, 욕망과 후회와 미래와 과거를 버리라고 설파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깨달은 이 작은 인생 꿀팁을 페이스북에 올려야 할지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할지 브런치에 올려야 할지 고민했고, 자신이 이런 불교적 깨달음을 전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고, 무엇때문인지 외삼촌네 가족에 대해서 생각했고, 엄마 쪽 삼촌은 '외'라고 쓰고 아빠 쪽 삼촌은 '친'이라고 쓰는 차별에 대해서 생각했고, 세상에 존재하는 젠더화된 사건 사고들과 내가 싸우던 수많은 트라우마적 사건들과 공감피로가 생각났다.
이것이 내가 나로 사는 게 싫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올바른 목적을 위해 소명의식을 품고 살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직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어머니가 나를 낳아준 것에는 결과론적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나로 사는 것은 분명 괜찮은 일이고, 인류로서의 책임과 정의로움에 부합하는 삶이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그래도 이 세상에 나쁘게 한 것보다는 착하게 한 것이 많을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나쁜짓은 고치되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똑같이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나름대로 정직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은 고통스럽다. 즉, 나로 살아가는 한 좋은 것도 고통인 것이다. 나쁜 것은 더더욱 고통이고. 좋은 것은 좋음을 유지해야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무언가가 좋다면 그것을 동료 인류에게 전파하고 보급해야 하는 책임이 생기고 그렇지 못하면 부채감이 생기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무언가가 나쁘다면 그것의 확산과 전파를 막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부채감이 생기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좋으면 더 좋지 못해서 계속 좋지 못해서 좋음을 유지하지 못해서 고통스럽고 나쁘면 당연히 나빠서 고통스럽다.
나의 이 의식이 나라는 내용으로 살아가는 한 지속되는 고민과 고난과 싸움에 놓여 있고, 죄책감과 후회와 욕망과 집착에 놓여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는 인간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고 정상수준 안이며 또한 그다지 나쁘지 않고 무해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기본 고통 수준은 상당하다. 잠깐이나마 없다가 있어 보니까 그 차이를 알겠더라.
좋다고 다 개운한게 아니었다. 좋고 싫음에 대해서 고민할 일이 없을 때 의식은 개운했다. 내가 나로서 삶에 대해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떻게든 고민하고 행위해야 하는 지속적인 '여행자 상태' 즉 목표 미도달 상태에서, 할일들은 다 부담스러웠다. 내가 나를 구성하는 여러 사회적, 신체적, 정신적, 유전적 특성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그것들에 대하여 계속해서 고민하는 한 나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주는 정신적 긴장감과 고뇌와 고통이 없어질 일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당장 목숨을 끊어서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삶이 마음에 들고 해야 할 일도 많다. 고통스럽거나 말거나 더 큰 고통을 막기 위해서 할 일을 해야 한다. 부처도 해탈했다고 해서 자살한 것은 아니니까. 고통 속에서도 할 일은 있다. 왜냐하면 나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도와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인생의 본질을 비교적 명확히 알게 된 거 같다. 확실히 인생은 고통이다. 좋아도 고통 나빠도 고통. 고통스러운 좋음, 고통스러운 나쁨.
그래서 만약 내가 나를 이루는 생각과 정체성과 바램과 쾌락추구 같은 자아의 필수요소들을 놓아버릴 수 있다면, 의식으로부터 인간으로 살아가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통이 의식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이 해결되어서 쾌락이 되는 게 아니다. 쾌락이 강렬할수록 고통도 강하다. 쾌락은 쾌락이라서 인간을 짜증나게 한다. 자기가 평소에 짜증나는 종목들을 돌이켜보면 사실 대부분은 쾌락 관련 이슈일 것이다.
최고의 쾌락으로 손꼽히는 섹스나 스시 오마카세 같은 거에 대해 우리가 평소에 정말 실질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뻔하다. 섹스만큼 심리-성적 열등감과 인정욕구와 대인관계와 씨름하게 하는 동기는 없다. 그것도 평생동안. 끝내주는 셰프의 스시 코스요리 오마카세처럼 돈 걱정과 기름진 참치뱃살에 대한 갈망과 신분상승의 욕구와 거기 데려갈 사람을 고민하게 하는 원인은 없다.
정말 멋진 섹스나 오마카세를 하고 나면 언제 이걸 다시 하고 있을지 고통스러울 것이고, 못 하면 못 한다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고통의 반대라 쾌락이 아니라 쾌락이 고통이며, 그냥 쾌락에서 벗어남으로써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내가 사건과 욕구와 기억을 의식에 로딩하는 한 그것이 고통이며, 의식에 내 관련한 것들을 로딩하지 않는 한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과학이 제공한 통찰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 의식에 이러저러한 집착과 걱정을 로딩하는 것이 사실은 유전자 셋팅이라는 것을 참고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원래의 원본의 '참된 나'란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유전자가 빌드한 생체기계 속에 정보를 처리하는 흐름이 우리자신이고 우리 의식이라는 것을 알면 더 좋을 것이다. 다만 필수는 아니다. 3천년 전 불교가 유전학 없이도 자아성찰을 통해 자아와 고통에 대해 정답을 내놓았듯, 핵심 지혜를 얻는 것은 주관적인 자기관찰 통해서도 충분히 된다.
이 글조차 고통 속에서 쓰이고 있다. 이 글은 나름대로 중요한 통찰을 나누는 글이고, 누군가에게 상당한 유용함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익숙한 것이고 별 문제는 아니지만 이 글을 쓰는 과정도 고통스럽다. 나는 지금 오전 1시 7분에 휴대폰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밤에 휴대폰 봐서 눈 나빠질지 걱정하고 있고, 음성 인식 기능이 아직 미약해서 계속해서 수동으로 고치면서 귀찮아하고 있다. 그리고 모기도 있다. 이따가 불켜서 전기파리채로 잡고 자야 한다. 여기까지 쓰자 전기파리채가 왜 전기모기채가 아닌지 생각이 딸려 올라왔고, 이따위 것들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게 짜증나는 고통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상태다.
나는 속세를 떠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버리고 고통을 유발하는 집착과 애착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던게 있다면 다들 마저 하시라. 모든 사람이 생활속에서 자아를 가지고 고군분투하는 지리멸렬하고도 애틋한 인생을 버리고 고통 관련된 걸 다 버린다면, 문명 같은 것은 없을 것이고, 우리 인류에게는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짐승의 고통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분명히 물리적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물리적 현실에서 무언가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는 현실의 캐릭터를 통해 현실과 교섭하고 대응해야 한다. 나름대로 최적의 생존의 길을 찾아가는 인류의 각 개인의 의식들이 상당한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고통스러운 속세에 뛰어든 이유는 있는 것이다.
다만 쾌락도 아픔도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나로 사는 나를 놓아 버리지 못하는, 비록 이유가 있을지라도 나의 욕구와 캐릭터를 놓지 못하는 홀딩행동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트렁크처럼 좁은 캡슐 호텔에 투숙하면서 거기 영원히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거기가 캡슐 호텔이고 문을 열고 나오면 복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잠수를 하면서 영원히 물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스쿠버 다이빙 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딘가 작은 챔버 안에 들어가 있거나 유동체에 꽉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두려움이나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 바깥에 내가 온 자유로운 세계가 있고 거기로 다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당연히 알기 때문이다.
나의 정체성과 나의 인생은 나의 잠수복이고 내가 참여하는 세상은 내가 나름의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뛰어든 바다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우리는 잠수복을 벗고 물 위로 다시 나올 수 있다 자유의 세계로. 섹스와 오마카세 원할 수 있지만, 잠수복을 입어야만 즐길 수 있는 섹스와 오마카세를 놔버리고 자유로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잠수복이 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잠깐 선택한 '내가 입고 있음을 붙들고 있는' 슈트이지, 나의 원래 피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잠수복이 나의 피부라고 생각하면 잠수복에만 갇히는 것이 아니다. 바다속에 갇히는 것이다.
고통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면 된다. 자아가 의식의 전부가 아니며, 고통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알면 된다. 꽉 붙잡아도 붙잡는 나름의 이익이 있지만 놓아버리면 해방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고통스러운 삶의 아가리에 머리를 넣을 수도 있지만 원할 때는 언제든 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 관둬버릴 수 있음을 알면 고통스러운 쾌락적 섹스도 할 가치가 있고, 뱉어버릴 수 있음을 알면 고통스러운 감칠맛나는 오마카세도 아주 먹음직스러운 것이다.
내일 퇴근하면 스시를 먹으러 가야겠다. 오마카세 까지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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