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공감 안 되는 예술작품이 있는가? 그 자폐성이 미술치료의 지렛대다
예술의 약점이 뭔가? 자신이 부여한 상징과 가치들을 감지할 수 있는 보장된 존재는 오직 창작자 자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정교하게 예술을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자기만 느낀다는 것이다. 그게 통상영역에서 예술의 부작용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자폐적 활동이며 그것 때문에 경이롭고 깊어지고 숭고하며 또한 그것 때문에 자아도취와 자아타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만족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심리치료의 모멘트를 가지고 있다. 자기가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을 만들고 그 상징의 (자기만 해석가능한) 압축된 정교함과 아름다움에 심취'하며 심지어 그것이 매우 쉽다는 예술의 본질은, (자기 자신이 만들었으므로) 자기 자신이 반드시 만족하는 자기 위로의 쓰기-읽기 순환고리를 매우 쉽게 만들 수 있다.
무지개 하나를 그려놓고도, 남이 그게 무슨 무지개인지 전혀 몰라도, 자기 자신이 거기에 자기가 꼭 필요한 상징들을 스스로의 의식과 무의식 동원하여 부여하고, 그 부여되어 실체화된 내 바깥의 대상이 존재함 그 자체에 공감과 위로를 받고, 그 존재를 구성하고 음미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공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매개)치료에 있어서 도화지란 혹은 인형이나 찰흙이나 모래상자란, 어린왕자에서 "니가 원하는 양이 이 안에 들어 있어" 라고 하는 숨구멍 뚫린 양 상자와도 같은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의 상처가 왜 생겼는지 어떻게 하면 메꿔질 수 있는지 본인이 대체로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상처에 가장 적합한 보강재와 열쇠를 그려낼 수 있다. 타인이 볼 수 있는 겉면의 시각적인 형상은 사실 그곳에 부여된 진정한 어마어마한 의미에 비하면 양이 들어있는 '박스의 겉면'에 불과하다. 상처받은 사람이 찾는 자신의 잃어버린 퍼즐에 완전히 들어맞는 의미의 '양(sheep)'이 외형적 표현이라는 박스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예술작품이 있는가? 예술에 내재된 바로 그 공감불가능성 덕분에, 타인이 읽을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타인이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자신은 그렇게 볼 수 있는 예술의 본질적 유연함 덕분에, 우리는 표현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하고 위로할 수 있고, 미술(매개)치료는 작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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