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시선, 68
서나루
영원과 순간은 완전히 다른 종족에 속한 것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라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순간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자들은
다른 순간들에 대하여 묻지 않는다.
구슬 안에 파도치는 깨어있음들과
구슬들이 굴러가는 벡터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헤엄과 물을,
앎과 정보를,
파도와 해류를,
견주려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영원의 눈으로 힐끗 본
덧없는 찰나를 살다간
행복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복원해봤자
그들의 웃긴 저녁 한 끼도 알 수 없다
장구한 역사적 조망 이 같잖은 것으로는
구질구질하게 덧없음을 관음하려는
우리의 상대적 박탈감을 감출 수도
에어컨과 항생제 없이 살았던 그들을
한 번 불쌍히 여겨볼 수도 없다
그들도 우리를 내다보며 비웃지 않는다
미래의 누군가도 정중한 마음으로
우리를 함부로 상상하지 않아 줄 것이다
순간이 있었고
찰나가 있었고
구슬 안의 찰랑거리는 파도가
어느 순간 자기의 찰나를 보고 놀라워할 때
순간과 찰나는 가정될 필요조차도 없다
이때 영원이야말로 가장 하찮은 상상이다
여기가 아닌 어디로 가고픈가
자꾸만 길어지려 하는가
유리에 유리를 부어 길게 늘여보았자 유리 이상이 되겠는가
우주가 파도치는 구슬 안에서 나가고 싶은 게 아니면
왜 열 번째 은하를 정복하고 싶은가
100과 무한(∞) 사이에서 1000이 되면 그리 좋은가?
사라짐에 관한 질적 경험이 촉발시킨
기쁨이라는 질적 경험.
우린
죽음과 쾌락을 맞바꾸었고(맞바꾸어졌고, 맞바꿈당했고)
자연수(自然數)임과 의식을 맞바꾸었고(맞바꾸어졌고, 맞바꿈당했고)
광막한 해변에서
찰나와 찰나의 경험들을 함께 선물처럼 주워들었다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이다
삶을 사랑하는가
바로 이 삶이기 때문에 그것들이다
무엇이 아쉽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