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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Sep 01. 2024

연민하라. 누구도 강하지 않다.

추하고 사나운 타인을 불쌍히 여기면 문득 스스로 용서되고 자유로워진다.

우리 인생을 발목잡는 것은 

전쟁터에서 직접 폭격을 당하지 않는 한 (바로 이 지점이 불교가 멈추는 지점이다) 

원망과 죄책감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불교가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점이다)


나에게 냉혹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원망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도, 그 사람과 사실상 아무런 관련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도 진정으로 휴식할 수 없게 한다. 폭력이 없는 벙커 안에서도 천 개의 폭력을 머릿속에서 계산하는 지휘관처럼,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가장 안락한 공간에서도 누군가의 공격을 막고 반격할 워게임을 머릿속에서 돌리게 한다. 코르티솔 수치는 당연히 높아질 것이다. 휴식도 없을 것이다. 감사를 음미할 마음의 빈 바탕은 밀려날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그 사람이 내게 그렇게 행동한 이유만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한 원망과 전투시뮬레이션은 근본적으로 방어적이다. 방어적이라 함은 내게 가해질 수 있는 모든 공격경로를 창의성을 동원해 예상하고 차단하려는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망상적이다. 그러므로 원망은 방어욕구를 만들고, 방어욕구는 망상(시뮬레이션)을 만들며, 망상(시뮬레이션)은 물리적인 고통이 0임에도 그 개수만큼의 체험되는 (실재하지 않으나 실제로 간주되는) 여러 번의 피습 경험을 만든다. 모든 경험이 실재(exist)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경험은 실제(real)로 체험된다.


죄책감 역시 마찬가지다. 삶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보통은 양육자의 말을 통해 그것은 우리 마음에 심어진다. 때로는 교사, 친구, 뉴스나 모임에서 들은 말일 수 있다. 누군가가 최초로 우리에게 한 그 말은, 주삿바늘과 실린더는 버려지고 내용물만이 몸 속에 주입되듯, 누가 - 언제 - 왜 한 말인지도 모른 채 거두절미된 문장의 형태로 존재한다. 죄책감은 나 자신을 자유롭고 주도적인 사람으로 느끼기 어렵게 한다. 죄책감은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나를 증명해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죄책감은 자신이 하자 있는 인간이라서, 내가 받은 호의는 모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평이한 사람들을 의심하게 한다. 그러므로 죄책감은 삶을 두렵고 외롭게 한다.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내 마음에 주사되어 있는 과거 누군가의 비난의 말들에 저항하고 그것에 맞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마음 속 비난의 말은 내가 절대평가에 미달한다는 논리구조가 아니라 상대평가에 미달한다는 논리구조여서, 내가 그 문장과 자꾸 싸워이기려 하는 한(=존중하는 한), 절대 그 유령 같은, 출처도 저자도 작성일도 알 수 없는 찌라시에 적힌 저주의 말을 굴복시킬 수 없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나보다 부자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돈의 부족과 관련해서 가치없다는 말은 아무리 부유해져도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여유있는 자산가를 아는 한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절대평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누군가를 실망시켰다는 원망의 말이 마음에 담겼다면, 그것과 조금이라도 유사하거나 비슷(하다고 망상적으로 해석)한 불충족의 위험과 경험에서 우리는 자신을 번번이 처벌한다.


그렇다면 마음속에서 타인과도 싸워이기려 하지 않고 나 자신의 과거와도 싸워이기려 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가? 연민이다. 연민은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내 적들의 안쓰러운 점들을 생각해보라. 가늘고 긴 팔, 툭 튀어내온 배, 심술궂게 굳어진 얼굴 근육 움직임의 버릇들, 셀 수 없는 날을 신경쓰이게 하고 주눅들게 했을 흉터들, 내 앞에서 턱을 쳐들고 어깨를 떡 벌리고 말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연극적이고 눈에 다 보이는 제스쳐를 취하게 만들었을 피할 수 없던 사정들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극우들, 국가라는 권위적 상징 없이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긍지 가질 개별성도 없이 잔인하게 타인을 정복하는 언어만을 가진 머릿속 구멍가게 같은 제국의 주인들. 극좌들, 자원부족의 절박함과 역량부족의 열등감 그리고 깜깜한 미래전략의 삼각지대에 갇혀 사회 전체와 합의할 수 없는 제안만을 깃발에 새겨 광장의 구석에서 휘두르는 자신을 낙제시켜줄 교수를 잃은 학생들. 가슴을 열고 진정으로 사랑받는 방법을 잃어버린 냉혹하고 변덕스러운 경영자들, 오만 원 십만 원을 더 얻는 셈법에 갇혀서 울고 웃으며 오직 자신만이 펼칠 수 있는 창조성을 발휘할 단 한 번의 인생에서 똑같은 처지의 친구들을 적으로 만들고 작은 악인이 되는 것을 감수하며 핍진되어가는 노동자들.


그 모든 비난거리들이 사실 그들이 고통받는 원천이다. 그리고 그 모든 비난거리들이 사실 어떤가? 내 모습이다. 연민과 용서는 오직 대칭적으로만 작동한다. 자신의 비참함을 불쌍하게 바라볼 때, 나와 다를 수 없는 구질구질한 어려움과 결핍과 어리석음을 살아냈을 타인의 처지가 논리적이고 자동적으로 불쌍하게 여겨진다. 타인의 위태로운 잔인함과 어설픈 연극들을 안쓰럽게 바라볼 때, 어느 삶에서 똑같이 행위했던 나 역시 불행하고 약하고 방황하는 존재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인간에 대한 연민은, 마치 플라스틱 껍질로 감추어진 냉장고의 철을 자석이 끌어당기듯이, 시소가 평형이 되도록 균형을 잡으면 한 쪽뿐만아니라 다른 한 쪽도 자동적으로 수평이 되듯이, 물컵을 기울이면 입구 부분의 물도 비워지지만 바닥 부분의 물도 자동적으로 비워지듯이, 타인을 연민할 때 똑같은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게 되고, 나를 연민할 때 나의 모습이 너무나 비쳐보였을 그래서 더 짜증나고 역겨웠을 타인을 용서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갈비뼈 안에서 동일하게 기침하고 헐떡인다. 그들이 추하게 고통받고 번민하는 순간이 나에게도 똑같이 추하게 일어나왔고 일어나갈것이니. 타인의 추한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나의 추함 앞에서 괜찮다고 해주자. 타인의 안쓰러운 고통과 두려움의 표현들을 용서한다면, 내가 타인을 용서해보았기 때문에 내가 왜 용서받아야하는지 나는 이제 스스로 이해하리라. 그러면 잠깐의 눈물 뒤에 평화가 오리라.





사진: UnsplashMohammad Rah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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