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T는 왜 우리의 정신과 호환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기계인가?
벌써 시간이 3시다. 자야 돼서 길게 쓰지는 못하지만 당신도 현대를 살면서 통계학 기초를 주구장창 들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 말을 다 알아들을 것이므로 압축적으로 쓰겠다. (글을 마무리하니 이제 4시가 되었다)
GPT의 본질은 검색기계다. 답변 자체가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 학습을 통해 계산된 맥락상 최빈값의 순차적 나열이기 때문. 검색 그 자체는 아니지만 결국 이 기계가 이루려는 본질은 과거의 대량 데이터로부터 가장 나은 대답을 '찾는'것이다. 그리고 엔드유저 입장에서도 방대한 데이터를 거의 즉시 불러올 수 있으므로 또한 검색기계다. 이걸 통해 엔드유저는 Big Data를 설명하는 4V 가운데 두 가지인 Volume & Velocity를 얻는다. 즉 극도로 방대한 정보에 대한 극도로 빠른 접근 - 폭발적인 동시활용이라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일종의 정보창고에 대한 접근일 뿐 무슨 신탁을 내려주는 오라클이나 미래를 보여주는 수정구슬 따위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GPT는 LLM이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 뭉치 속에서 서로 함께 나타날 확률이(연관성이) 통계적으로 높은 언어와 순서와 맥락을 묶어서 우리에게 출력해주는 것이다. GPT가 그러니까 LLM이 의존하는 데이터는 막대한 양이지만 과거 데이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확률이 높은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조합할 뿐, 절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생성' AI가 아니다. 사람 눈에는 생성형으로 보이겠지. GPT는 생성하는 게 아니라 요약하는 것이다. 무엇을? 방대한... 과거를. GPT는 미래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 기계는 통찰하지 않는다. 느끼지도 않는다. 느끼는 것은 우리다.
GPT는 본질적으로 과거를 긁어오고, 과거를 요약하고, 과거의 모든 답변 가운데 가장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최빈값(mode)를 우리 눈 앞에 순서대로 꽂는다. 물론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반사적으로 출력된다. 당신이 갑자기 동해물과... 다음에 동해얼큰해물탕면? 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GPT는 이런 시도를 하는데, 이것이 ChatGPT를 막 믿어서는 안 되는 Hallucination 현상이자 GPT가 나름의 창의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이렇듯 인간 역시 관측자가 보기에 최빈값에 해당하는 반응을 연속으로 출력한다. 도어락을 누르면 문고리를 돌리고, 신발끈 매듭을 지으면 그것을 꽉 잡아당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뇌세포 역시 0과 1 사이의 확률을 계산하는 베이지언추론기계일 뿐이라는 가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과 GPT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다르지? 배운 대로, 주어진 맥락 안에서 확률이 높은 순서대로 배운 범위 내에서 출력하는 인간도 GPT와 마찬가지인게 왜 아니란 말인가.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09)에서 주인공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배운 대사를 똑같이 출력하듯이...
그러나 우리에게는 입장이라는 것이 있다. 몸을 살려야 하는, 그리고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다른 몸들의 감각을 이해하는 인간성의 센서로서의 온몸을 감각하는 가슴의 천 가지 느낌이 있다. 그 체감각이 우리에게 입장을 부여한다. GPT가 즉 LLM이 도서관일 때, 우리는 동족의 슬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서관을 지은 노동자들이다. 저들은 도서관 장서검색봇이지만, 우리는 도서관 방문자들이다. 도서관 방문자들이야말로 책을 빌려 읽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책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모으고 검색하는 로봇들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책의 저자들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남긴 말과 몸짓들의 궤적이고 메아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LLM은 병렬컴퓨팅을 통해 막대한 소음에 묻혀 사라질 뻔했던 메아리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다. 모아진 의견은 좋은 답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메아리가 우리의 답을 갈구하는 마음 그 자체는 아니다. 장작은 불의 재료이지 부싯돌이 아니다. 부싯돌을 있게 한 추위도 아니다. 추위 속에서 동족을 데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마음도 아니다. 왜 인공지능은 인간이 -영원히- 아닌가, 왜 우리는 인공지능과 -영원히- 다른가, 왜 인공지능에게 없는 인격은 우리에게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서늘하고 조급하고 뿌듯하고 조마조마하고 벅차고 홀가분하고 뭉클하고 짜릿한 그 가슴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논리와 베이지언추론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큰북 같은 울림과 파동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이 남긴 궤적이 우리 모든 산하와 문명에 메아리의 무늬를 새겼으나, 그것 가운데 어떤 음각과 양각도 석판 위를 수놓은 정신의 음표였을 뿐 관현악에 눈물흘리는 우리의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시간 속 현존이 되지 못했다.
아름다움에 눈물흘리고 타인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래서 다시 일어나 동족의 고난을 구제하고자 하는 불멸의 솔루션을 찾아 툰드라를 가로지르는 의지, 가슴을 둔중하게 휩쓸고 지나가 부서진 우리의 몸을 일으켜 다시 다시 도전하게 하는 언어로 결코 쥘 수 없는 뜨거운 쇼크Shock와 임펄스Impulse가 우리의 본질이다. 우리가 보조적으로 놀랍도록 진화한 전전두피질의 추론기계를 쓸지라도, 광자 하나에도 반응하는 시세포와 그것을 영사기처럼 정확히 감지하는 V1 시각겉질을 쓸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고용한 시간의 선물에 불과하다 - 시간이 우리의 작은 뇌에 찰흙처럼 붙여주고 간 선물.
시간에게도 무엇에게도 선물받지 않은 진정한 우리의 소유는, 본질은, 우리 그 자신은, GPT에는 없는... GPT를 쓰고자 하는 의지다. GPT가 아니라 내 생명을 쓸지라도 동족을 위해 앞으로 다시 한 걸음 나아가려는 의지다. 그 뜨거움. 그 알 수 없는 전진하리라는 의지가 우리를 우리로 만든다.
우리가 전두엽을 발달시켰듯, 무리생활과 사회성과 눈의 흰자위 그리고 석기 및 철기와 공진화하였듯, 근래에는 심지어 실리콘(반도체)과도 공진화해왔듯, GPT역시 우리와 결합되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걸친 옷이 우리 자신이 된 적 없듯이, GPT라든가 LLM이라든가 AI 역시 우리를 침식시키거나 희석시키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심장도 뇌도 의식도 지능도 아닌 그 모든 것에 걸쳐서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의지로 우리는 소음으로 부패해가는 시대의 도서관에서 연꽃 같은 의도로 피어난다. 그 의도의 연쇄를 관찰자 입장에서 일컫기를 맥락이라 한다.
스스로의 솔직한 울림대로 나아가자. 당신 마음이 인간존재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