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출근은 어젯밤에 이루어졌다. 일을 좀 더 해 줘야 할 것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엊저녁 일정이 끝났을 때, 도저히 집에 가서 씻고 어쩌고 다음날 지하철에 다시 한 시간을 갇혀가지고는 곧장 날 밝으면 내 놓기로 한 일을 끝마칠 자신이 없었다. 23 : 30에 곧장 회사로 갔다. 경비원 아저씨가 세콤을 이미 다 잠궜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도저히 여기서 돌아갈 순 없어서 문제 안 일으키고 불도 안 켜고 얌전히 있겠다고 사정사정을 했다. 입주사 기술팀인데 남들 다 잘 때 일하는 직무라고. 맞는 말이었다.
일은 04시에 마무리됐다. 내가 여기서 즉시 기절해도 업무시간까지 6시간도 잘 수 없다. 다행히 빌딩 한 구석에 아는 쇼파가 있어서, 장갑과 목도리를 끼고 잠을 청했다. 패브릭 쇼파라 가운데가 불룩해서, 등을 대니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난방 없는 12월 빌딩은 추위 안 타는 체질에게도 잠들기에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침 옆에 전신을 뉠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있었고(주로 직원들이 일하다가 숨으러 오는 의자였다), 길이에 맞는 방석도 씌워져 있었는데, 그 방석을 뽑으니 납작한 침낭 같았다. 그걸 머리끝까지 덮으니 발이 시렸다. 발을 덮으니 비상구 등 때문에 눈이 부셨다.
마하트마 간디가 "현대문명은 짧은 이불과 같아서, 발을 덮으면 머리가 춥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시리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정말이었을까, 진짜라면 현실 고증이네, 라는 생각이 담담히 떠올랐다. 나중에 유머소재로 써먹고 싶었는데 웃기지는 않았다. 내가 이걸 몇 번 더 하면 멘탈이 못 버틸까? 라는 생각도 했는데,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폭격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건방진 투정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결에 전등이 몇 번 켜졌다가 꺼지는 것을 느꼈다. 근처에 누군가 다녀갔지만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전세 재계약 서류가 들어있는 가방만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중앙이 불룩한 쇼파라 도저히 누워 잘 수 없어서 옛날에 외로움 많이 타던 시절 버릇처럼 왼쪽으로 누워 내 팔을 베고 잤다. 더 이상 외로움 자체는 그리 느끼지 않는다. 이제 내면까지 사회화된 남자가 되어서 그다지 결핍이랄 게 없는데, 그만큼 기쁨도 별로 느끼지 않는다. 기쁨 뒤에 오는 슬픔들에 쩔쩔매던 세월, 어느날 문득 그 둘 사이의 정해진 순서관계를 의식해버리게 되고부터, 이제 모든 기쁨은 슬픔의 예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기뻐할 것들은 모두 미래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쇼파 이음새에 끼워둔 휴대폰 알람이 미간에서 울렸다. 낚시의자에 방석커버를 다시 씌워놓고 미팅장소로 달렸다. 하루종일 기술영업 전화와 메일을 돌렸다. 내 업무방향에 좀 판단미스가 있었다. 삐라 돌리듯이 해야 하는 기술영업을 연애편지 쓰듯 했다. 내 마음의 친정 같은 기관에다 보내는 제안이라 좋은 일 하겠다는 마음이 너무 들어갔다. 비즈니스는, 한 사람을(기관을) 꼬시는 데 드는 힘은 최소한으로 하고 대충 한 놈만 걸려라 전법으로 스팸메일 뿌리듯 해야 한다. 스레기 같은 남자들에게서 좀 배웠어야 하는데 늘 섬세한 에겐남인 게 문제였다. 시간은 시간대로 까먹고, 몇 군데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번번이 거절당하고, 연말까지 KPI를 달성해야 하니 주말에도 좀 더 신경써달라(일해라)는 말을 - 그 부담스러움을 - 곱씹으며 모두가 퇴근한 빌딩에서 우두커니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노동자 편이라고 해서 사업자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대표이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내가 모든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그런 동시에, 마치 북미 선주민 설화에 나오는 빛의 늑대 · 어둠의 늑대의 씨름처럼,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 일은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나는 자신의 삶을 낭비하지 않는 업무에 배치되어 있나? 그러나 회사의 성장곡선을 생각한다면… 내가 지금 팔자에도 없는 영업 콜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기는 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인생은 제대로 가는 게 맞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 층은 어젯밤처럼 어둑해졌다. 나는 낮에 수면부족과 쎄븐잡의 과로로 스트레스 받아서 주문했던 와플대학 젤라또와플 포장지를 비닐재활용 칸에 쑤셔박았다. 배달원 분이 구김 하나 없이 가져다 준 봉투였다. 한국은행 신권처럼 빳빳하고 반듯하여서 버리기엔 죄책감이 들었다. 챙겨뒀다가, 출근길에 편의점 줄김밥 먹을 때 기름양념 묻은 비닐껍질 담는 용으로 쓸까 했는데, 말아서 가방에 다시 넣기에는 바닥에 한 번 놓인 것이라 좀 그랬다.
비닐부터 유리병까지 열 종류나 있는 재활용 쓰레기통이 죄책감을 덜어 주었다. 이미 내 주둥이에 와플 하나 처먹겠다고 생면부지의 남을 시켜 위험천만한 오토바이를 태우고 3천 미터나 배달오게 했지만… 분리배출된 비닐이 얼마나 바이오디젤이 될지도 알 수 없지만…. 사회적 공공성 어쩌고 업계에 있다 보니, 지옥갈 죄는 똑같이 지으면서도 죄책감 적게 살 수 있어 좋았다. 스타벅스 가면 꼭 마시는 (이스라엘산)자몽허니블랙티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 19시가 되었다. 언제 추가해놓은지도 모를 알람이 울렸다. 무슨 비즈니스 특강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내 본업 아닌 일에 하나뿐인 인생을 줄줄 녹여버리고 있다는 생각, 내 본업도 아닌데 지나친 고평가를 받고 과분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 내 본업이 아니라 내 진정한 영혼으로 해 줄 수도 없는데 내게 책임지우게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사람은 자꾸 현재 아닌 미래를 살게 된다. 요즘은 온통 소셜미디어에 허풍 떠는 창업특강 뿐이라, 나도 "이번에는 혹시?"라는 마음을 갖고 출퇴근길에 온갖, 사기에 가까운 창업특강을 듣는 게 일이다. 특강이 많기도 하지만, 죄다 사실관계도 알 수 없는, 비참한 자신의 과거와 외제차 끄는 현재를 비교하며 당신도 이렇게 만들어주겠다는 못믿을 이야기여서, 자세히 보지도 않고 혹여나 쓸모있는 정보가 나올른지 기대하며 라디오처럼 틀어만 놓는다.
좋아서 듣는다기보단 듣지 않으면 불안해서 듣는 것이다. 그렇게 출처도 모를 돈 된다는 정보를 저장강박처럼 허겁지겁 끌어모으며 산 지가 오 년은 되었다. 내가 구독하는 뉴스레터는 안 세어 봤는데 아마 40 종류는 될 것이다. 하루에 이메일이 열다섯 통은 온다. 그 가운데 서너 통은 그놈의 창업특강 "1달 안에 매출 3천만원 만들어드립니다" 스팸이다. 물론, 내 손으로 구독버튼을 누른 것이긴 하다. 그러나 동의라고 해서 동등한 품질의 동의는 아닌 것이다.
난 이걸 페미니즘 수업에서 배워서 10년째 잘 써먹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전에도 알고는 있었다. 뭐, 애인에게 동의를 받으세요? 세상 편하게 산 소리.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 따위는 없어. 을의 입장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용약관 전체동의'를 누를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탭 키와 스페이스바가 눌린 채로 태어나, 서류를 만나자마자 모든 빈칸에 자동으로 주르륵 체크표시가 된다고. 그들에게는 차라리 동의서를 찢어버리는 것이 다른 선택을 하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른단 말이야.
TV프로그램 『고딩엄빠』를 볼 때마다 난, 서양철학의 홀로주체성을 비판한 김상봉 교수의 담론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가슴 짓이겨지도록, 단일하고 자기동일적이며 자유의지 있고 자주적인 주체성은 오롯한 거짓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김상봉 교수가 서양적 주체성의 나르시시즘과 자기중심성을 폭로했다면, 나는 서양적 주체성이 그냥 뭐 대놓고 하는 거짓말임을 설파하는 것이다. 자기결정이라……. 열 번을 생각해도 웃기는 소리다. 러시아 폭격기로부터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나비 지뢰는 자신을 실어나르는 풍향은 물론 주택가를 향해 비산되는 자신의 날개모양조차 통제할 수 없다. 만약 나비 지뢰에 자아가 있다면, 자신의 본질이 폭발성이라는 사실은 터지기 전과 터진 후에도 영영 모를 것이다.
사형존치국에서 사형당한 수많은 (앰네스티도 구제를 망설일, 하나도 억울할 게 없는, 명백한) 사이코패스들의 정신을 곰곰히 시뮬레이션해보고, 또한 선하게 헌신하고 희생하다 사망한 수많은 인간 천사들에 관하여 애도하며 묵상하건대, 나는 그들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피할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유일한 길을 갔다. 그들 앞에 갈래길이 있었다 한들, 거기서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 죽었겠는가?
누군들 예외이겠는가? 우리는 모조리, 안전핀과 뇌관이 째깍째깍 순서대로 꽂혀 있는 DNA가 빵처럼 부풀어 오른 존재들이 아닌가. 울룩불룩한 논비건 빵이지만. 우리를 빵틀처럼 전자동 바게트 커터처럼 누르고 또 절삭하는 우리 그 자신의 역사와 우리 그 자신의 속성들 그 바깥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없고, 단 1초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예외인 채로 살 수 없다. 그곳에 진정한 자기결정이 어디 있는가?
어둠의 (그러나 어둠을 밝힌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는) 유튜버 카광이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삶에 관하여 내놓은 인터뷰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있다. 검색은 직접 해 보라. 『고딩엄빠』는 약간 나은 한 칸 위일 뿐이다. 옆 칸에는 산재사망사고가 있고, 건너편 칸에는 디시인사이드 우울증 갤러리가 있으며 그 맞은편에는 조선일보 댓글창이 있다.
이 운명들에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원하는 버전이 나올 때까지 뽑을 추첨권을 새로 줄 수 없는데 어떤 자기결정권이 있겠는가. 성적 자기결정권도 정치적 자기결정권도 없는데 경제적 자기결정권인들 존재하겠는가? 태극기부대가 나라(라고 불리는 모든 트라우마적 경험과 비인간적 인터렉션의 총체)에 전 존재를 약탈당하고, 사실은 그 나라가 자신의 삶을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빌려간 것임을 - 그래서 언젠가 나랏님이 재림예수처럼 돌아와 자신의 고통에 빛나는 이자를 쳐서 돌려주고 황금면류관을 씌워줄 것임을 - 믿을 때, 그것은 정치적으로 스스로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야만의 시대가 그들의 슬픈 반추와 받아들일 수 없는 회고마저도 찢어놓은 것인가?
계엄령 정당화론자들, 극우에 투표하는 빈민들, 게임중독 치료 패러다임에 대해 '게임은 질병이 아니'라고 분노하는 게이머들, 운 좋은 지능과 학력으로 간신히 버티는 고도적응형 알콜중독자들, 담배 끊으라는 말에 분노하는 흡연자들, 당사자성 충만한 성노동론자들, 히잡 쓴 페미니스트들, 곧 시장경제가 붕괴하고 소련이 부활하는 데에 (정확하게는 소련이 부활한다는 전제로만 유지되는 생계비 파이프라인에) 인생 전부를 배팅한 서울대 졸업 후 지하조직에서의 25년이 흘러버린 공산주의자라고 다르겠는가?
그리고 나란들 다르겠는가. 양복과 넥타이가 내 정신적 근본의 가난을 숨겨주지는 않아서, 하나하나한 60분짜리 헛소리 특강을 들으며 인생을 또 줄줄 녹일 것이다 - 정작 회사에 쓰는 시간은 아까워하면서. 이번에는 또 다른 지식의 로또가 터질 거라 기대하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 시간 세 시간 잔 지난 주 언젠가 비몽사몽하며 추가해둔 알람을 따라 비즈니스 특강엘 들어갔다. 정확히 뭐였는지도 당시에는 몰랐다. 19시 시작이라기에, 습관처럼 5분~10분쯤 전에 발송되는 비대면 접속 링크를 받으러 이메일을 열었다.
르코. 신경쓰이는 이름이었다. 옛날부터. 르코-렉스 레터라는 소식지를 발행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글의 정보 밀도는 도무지 공짜 뉴스레터에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보다는 맥킨지 컨설팅의 수천만 원짜리 보고서에 훨씬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쓰레기통에서 장미를 찾으려 구독해둔 수많은 쓰레기 같은 뉴스레터들 가운데서도 이 사람들 메일만 오면 읽어보거나 아니면 훗날 사업을 시작할 때 읽을 교본으로 저장해두곤 했고, 무엇보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고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 알고픈 욕망도 메일함 한 켠에 묻어두고 있었다.
스스로를 학자형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하나의 강점이자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더 나은 인간을 자세히 알고 쫓아가려는 열망이다. 앞선 자들을 알아보는 최소한의 안목에 더하여, 그들에 대한 강렬한 (좋은 의미에서의) 질투 섞인 선망과 속속들이 파헤치고 싶은 존경심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길을 따라 걷고 싶기 때문에. 더 왜냐하면 그 길에는 진 · 선 · 미(진리, 선함, 아름다움)가 있기 때문에. 그 관심에는 계란 껍질만큼은 얇으나마 열등감도 있을 것이고 질투도 있을 것이나, 사실은 세상을 더 나은 곳 ·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그 올곧고 위풍당당한 권능에 대한 숭앙과 흠모가 물결치는 것이다.
그런 최소한의 명예는 있어서, 그렇게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 오늘마저도 익명의 시청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선물은 받는 것 자체가 예우이듯, 어떤 순간은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도 예우를 표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난 종종 해 왔다. 지하철 안이라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면과 마이크를 켜고 정중하게 인사드렸다. 참 인연이란 게 재미있는 것이, 불금이기도 하고 탄핵시위도 있고 해서인지, 내가 비즈니스 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로 꼽는 르코렉스 레터의 두 집필진이 모두 참석한 어마어마한 기회의 Q&A 세션에 온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처음 20분 정도는 아마추어 한 명이 묻는데 슈퍼 프로 두 명이 답변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마치 엔비디아의 젠슨 황과 AMD의 리사 수에게 2 : 1 과외를 받는 듯했다.
나는 세부적인 마케팅이나 브랜딩 스킬 등은 시기와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감안하여, 주로 2020년대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플랫폼의 흐름(해류)에 관한 질문을 드렸다. 답변을 듣고 나니, 내가 기존 업계 상황을 파악해온 전반적인 그림이 크게 틀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했다. 내가 고집할 장인정신이 있는 한, 선택할 수 있는 극약처방에는 윤리적이고 컨셉적인 제한이 있음도 교차검증할 수 있어 기뻤다. 그래, 내가 보잘것 없는 인간이긴 하나… 유령법인 세워서 민간자격증으로 돈벌이하고 타로카드와 사주팔자 상담을 팔아치우느니 DSM-5로 내 머리를 쳐서 자결하는 것이 낫다는 정도의 명예는 알고 살지 않는가?
아무튼 르코렉스 레터와의 Q&A 60분은 6분처럼 흘렀다. 마케팅방법론과 브랜딩 플랫폼의 환경이 대륙이동하듯 서서히 그러나 명백히 변화하고 일부 잠정적이나마 고착됨에 따라, 우리가 플랫폼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여건은 이미 결정된 것이었고, 그 중 해류의 전반적인 방향 정도는 오늘 전해들을 수 있었다. 고객관계관리 마케팅이라고 하는 Customer Relationship Marketing. 어느 영업팀에서나 CRM, CRM, 말은 하지만, 심지어 나의 직무영역 가운데 하나도 CRM인데…, 나는 오늘의 만남이 CRM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진솔하고 유익하다고 느꼈고, 르코렉스 레터 Bacth 반에 가입해서 돈을 내고서라도 이렇게 유쾌하고 유능한 사람들과 더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떠오른 나의 마음을 보면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그러니까 무언가를 무엇이라 말하는(이름붙이는 혹은 의식하는) 순간 본질이 살아있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한다는 노자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분명 오늘의 대가없는 도움과 만남이, 구매로 유도하고 고객풀을 관리하는 리드마그넷과 퍼널링을 위한 CRM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고 이 Q&A세션이 일종의 무료 CRM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마저 느꼈다.
무료가 아니라 '값없는' 이고(예수가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했을 때 "무료로 주리니"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지 않은가?), C.R.M.이 아닌 그저 R.(Relationship)이라고. 왜냐하면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격의 없이 그저 구독자들과 만난 사람들의 순수한 공동체성과 기여의 마음을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이 존중되는 것은 인간 공동체 전체에서 예외없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유효하게 작동하는 CRM은, CRM이 아닐 것이어야 함을 느꼈다. 결국 CRM은 마케팅의 목적에 의하여 제한받는다. 예컨대 기밀정보는 우회적으로 표현될 것이고 셀링포인트(USP)는 강조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두 작가들에게서 그러한 방어전술과의 '상관 없음'을 느꼈다. 물론 내가 그렇게 깊이 들어갈 질문을 하지 않은(못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말 실력있는 사람들은 앎이 아닌 실천을 팔고(이루리라는 약속을 넘어선 이뤄지는 효력을 팔고), 그래서 실천을 팔기 위해선 오히려 사람들을 계몽해야 하니 특급 지식이야말로 천하에 오픈소스로 내놓게 되기에, 숨길 영업기밀 자체가 크게 없겠다는 - 그래서 행보가 더 자유롭고 더 고객과 얼굴붉힐 일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건 마치 뜨개질 공방에서 여는 뜨개질 클래스 같은 것이다. 뜨개실, 뜨개바늘, 뜨개법에 1급기밀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모든 개별적으로 서술가능한 기술이 천하에 알려져 있는 상태에서(혹은 본인이 폭로를 해버린 상태에서), 각 고객들이 그 기술을 삶에 활용하고자 스스로 익혀 가는 과정에서의 지지 · 교습이라는 발맞춤을 제공하고, 팔고자 해도 고객의 참여와 맥락 없이는 출현할 수조차 없는 일기일회(一期一會)의 판단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통달자들이 아무런 비법도 숨기지 않는 까닭이고, 진정한 컴퓨터 천재들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운동을 옹호하는 까닭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지켜낼 성이 없다. 온 세상이 그들의 성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CRM은 CRM이 아니라는 내 말의 참뜻은, CRM으로서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CRM의 본령과 본질이 공존과 상호번영에 있음을 감안하건대, 마케팅이 거래를 초월하여 플레이어들에게 창의성을 임파워링하고 생태계를 확장하는 길이 되려면, 무언가를 지키거나 설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CRM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상대를 C.(Customer)로도 M.(Management)대상으로도 보지 않고, R.(Relationship)에 있어서도 사업적 거래의 맥락이 아닌 비구조화된 고민을 상담하는 놀이의 맥락이자 놀이판 확장의 맥락으로 받아들여 함께 참여하는 것, 그리고 오픈소스 정신으로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공유되는 지식 도서관으로의 초대를 통해, 독점과 배타성이 아닌 오직 그 자신의 노동과 창조성 · 고뇌와 그 대가로 주어진 고유한 입각점의 놀랍고도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그 유일하고 소중한 관점을 살아내느라 고생해줘서) 고마운 참고가능성에 의거하여 개인의 소유를 형성하고 인정하는 것, 그러한 동시에 유기체와 같은 상호협력을 이루는 공동의 도시를 만들면서 공진화하는 것은, CRM이라는 개념이 그 자신의 비즈니스 형식에 숨겨진 본질적 형상의 압도적 계시를 깨닫게 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그리고 르코렉스 레터의 르코님과 렉스님은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배포하는 그 알찬 고봉밥 같은 뉴스레터 시절부터, 이러한 오픈소스를 통해 공진화하는 거대한 지식산업의 메갈로폴리스를 만들고 있었다. 그 앞에 서면, 국가자격증 몇 개 따고 학회자격증 열심히 취득해서 내 프랙티션 · 내 사업 하려고 했던 나의 좁은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한 것이다.
그런 마음에서, 나는 59분이 되어 마무리하는 시점에 1분을 남기고, 스크린샷 하나를 보여드렸다.
이것은 내가 지난 몇 년간 구독해오던 스크린샷이었는데, 나는 화면공유로 이 창을 띄워 놓고 말씀드렸다. 내가 구독해 온 뉴스레터가 수십 종류 수천 편은 되는데, 나는 이 뉴스레터들 속에서 A4용지만큼의 지면이 있다고 하면 그 가운데 세 줄 이상 새롭고 의미있는 정보가 적혀 있는 뉴스레터를 보지 못했다고. 보통은 알듯 모를듯 했던 (심지어 검색하면 다 나오는) 헤드라인 세 줄을 적고, 각각의 소제목 아래에 삼척동자도 아는 내용을 열 줄 적어놓은 형식이 대부분이라고. 하지만 르코렉스 레터는 달랐다고. 두 필진께서는 정말 컨설팅 회사들이 유료고객을 위해 발송하는 실제 내부자 정보를 지면에 꽉꽉 채워서 발송해주셨다고. 나는 그것을 교과서로 쓰고 있다고….
나는 단지 "고객에게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마워요" 라고 하려고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르코렉스 레터의 활약은, 사람들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소중한 정보를 세상에 무료로 배포하는, 인류에 대한 기여라고 말씀드렸다. 그래서 구독자로서가 아니라, 함께 세상을 위해 일하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기여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했다. 진실로 기쁜 마음으로 드린 칭찬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밝고 즐겁게 받아주신 르코레터 운영자분의 밝은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작별했다. 르코님은 작은 칭찬에 화답이라도 하시듯, 어느덧 서너 명 정도 모인 구독자들께 매월 Q&A 모임이 열릴 테니 다음에도 참여하시라고 안내해주셨다. 가치 있는 일을 열린 마음으로 진실되게 하는 사람들과 또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만큼 더 행복한 약속이 있을까?
그런데 그 순간, 활짝 웃는 모습으로 작별의 손짓을 보내며 화상회의에서 빠져나오는 그 순간 문득, 아까 무거운 마음으로 내 직무의 의미와 내 삶의 가치를 저울질하며 집에 돌아오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아, 내가 르코와 렉스님에게 보낸 가치에 대한 관점과 그 인정을… 그 관점의 빛을…, 나를 위해서는 어째서 비추어보지 않았던가? 요즘 나의 노동이 제아무리 전공이나 본업과 아주 직접적인 상관은 없다고 한들, 어떻든 내가 오늘 머무는 이 업종과 사업아이템과 직무와 직책이, 내가 르코-레터의 필진을 칭송하였던 바로 그 이유… 인류에 대해 기여하고 헌신하는 측면이 있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내가 꾸역꾸역 사업 제안서를 쓰고 제품 도입 조건을 협상하던 그 순간에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 신나지는 않았을지언정, 내가 소개하는 이 제품이 '명백히 작동하는 에어백'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구조가능한 모든 사람을 건져내는 데에는 이 회사의 생존 역시 필요하고, 내가 매일 하는 일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세상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그럭저럭 큰 도움이 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타인에 대한 그 판단은 그 주인의 인정과 기쁨으로 전환해줄 줄 알았으나, 나 자신에 대한 그 판단은 나 자신의 인정과 기쁨으로 전환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종종, 아니 사실 대부분의 삶의 인지와 선택의 국면에서, 정말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마음의 역동은 (감정 그 자체라기 보다는) 감정의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통속적인 유사심리학적 패배주의와 분간하기 위해 말하자면, 우리 삶의 중요한 결정을 감정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마음과 언어적-비언어적 통찰이 결론과 확신에 도달하면, 그것은 감정의 형태로 우리가 그 결론을 행위로 이행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몸을 밀어내주는 것이다.
감정도 하나의 이해와 학습이 가능한 내수용감각(Interoception)이라 할 때, 내가 르코렉스 레터의 집필진을 향해 헌정한 숭고에 대한 뜨거운 찬사는,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대상(thing)으로 감지가능하고 또한 과거의 관련된 기억과 나란히 놓고 음미해볼 수 있는 성찰의 재료가 되었던 듯하다.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맡아 본 냄새가 아주 오래 전 그 공간으로 순간 나를 데려다 놓듯, 르코렉스레터의 진정성과 문명사적 임팩트를 마땅히 칭송하면서 마음속에 소환된 그 뜨거운 인류애의 감각이 오랜만에 하나의 대상으로서 느껴지자(마치 촛불을 켜는 행위와 켜져 있는 촛불이 서로 별개의 실체이듯), 아, 이것이야말로 - 인류에 대한 헌신과 기여의 여정이야말로 - 사실 나의 집이어왔고 꿈이어왔으며 길이어왔음을 기억해낸 것이다.
퇴근을 못 해서 거실에 쌓여가는 빨래라든지 욕 먹을까봐 불안해서 방어하고 싶은 나의 영업실적들에 대한 답답함과 불안은, 자꾸 나를 단순히 고통을 피하는 존재로 살라고 몰아가고 있었다. 내가 잠도 못 자고 밥도 불규칙하게 먹으며 여러 법인의 업무를 쳐내고 있는 동안, 나는 그런 정신의 두더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크게 노는 사람들을 보고 크게 노는 것에 경이를 느끼다가, 사실은 나의 게임 역시 큰 놀이터였다는 것을 기억해냈다(그런 측면에서 사실 모든 싸움은 기억의 투쟁인 것이다).
큰 관점에서,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큰 보법의 측면에서, 이 짐들은 내가 피해야 할 것도 아니고 적당히 대충대충 시간때우면서 할 것도 아닌, 뚫고 들어가서 뚫고 나와야 하는 지금-이곳(Here & Now)에서 내게 맡겨진 나의 명예로운 기여임무인 것이다. 인류를 구하는 정신문명의 메갈로폴리스 프로젝트는 단순히 지하철이나 고가도로로 이어져있는 것이 아니라, 글로 · 음악으로 · 시대를 넘어 · 언어와 문화를 넘어 · 삶과 죽음을 넘어 연결되어있고 또한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다.
물리적 현실에는 없는, 그러나 시대와 국경을 넘어 모든 정신이 접속하는 순간마다 열리며, 그 안에서 인지되고 연결된 존재들느 서로를 납득하며 공명하는 정신의 메갈로폴리스에서, 우리를 사유하고 움직이고 이뤄내게 하는 유일한 연료는 호연지기(용기)이다. 나는 오늘 내가 짐작하기조차 힘들 만큼 장구한 노력과 탐구라는 용기의 궤적으로 모두를 환대하는 호연지기의 장을 펼쳐 준 르코렉스 레터 집필진 덕분에 내가 잊고 살았던 (더 잊고 살았으면 위험할 수도 있었던) 뜨거운 가슴의 고동을 되찾을 수 있었다.
노력도, 끈기도, 성공도, 호연지기에서 오는데, 호연지기는 미리 그것을 가진 넉넉한 거인의 너그럽고 호혜적인 초대로부터 일깨워지고 전파되고 복제될 수 있으니, 나는 그렇다면 이 호연지기로 기술을 길러 역량있는 사람이 되고 나면 어떻게 선배들을 따라 넉넉한 거인이 될 것인가? 나는 결코 내가 받은 이 축복의 빚을 잊지 않겠노라, 내가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너그럽고 관대하게 값없이 베푸는 삶으로 갚을 빚을 기억하겠노라 다짐하며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