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남성성을 길들이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심청이들을 위해
[이 글은 전부 사람이 직접 썼으며, AI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음]
자신의 남성성을 길들이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심청이들을 위해
오늘의 3가지 논점
남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위로 - 남자도 남자로 살기 힘들다
벤처적 인생은 왜 위기인가? - 거대 AI 기업의 벤처기업 대행
다수 여성의 사회순응적인 커리어패스는 왜 AI 시대의 선취점인가? - 진정성 있게 자신의 위치를 지켜온 이익
무게를 견디는 남자들
남자로 산다는 것은 무게를 견디는 일이다. 젠더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나, 여성이 겪는 삶의 무게가 주로 구조적 성차별에 의한 것이고(그리고 내 친구들의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자연에 의한 성차별 - 그러니까 월경에 의한 것이고), 성소수자가 겪는 삶의 무게가 민간의 주술적 편견과 혐오까지 더해진 것이라면, 남자로 산다는 것은 아무런 사회적 차별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왜 내가 저 형만큼/누나만큼 성공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어드밴티지 없음에도 이기지 못하는 수치심"을 견디는 일이다.
본인에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나 성별 분업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과 선호가 있든 없든, 남자는 사회로부터 1인분의 남자구실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물론 그것은 본인이 택하는 일이 아니다. 본인이 남성 페미니스트이든지 아니면 안티페미니스트나 심지어 인셀(Incel)이든지, 우리가 방에 틀어박혀 사회생활을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다는 점에서, 가족이 있든 없든, 결국 주위 사람의 평가와 평판에 영향 받는다는 점에서, 맨박스(Man Box)의 압박은 동등하게 가해진다. 당신이 게이이든, 테토남이든, 에겐남이든, 마초이든, 초식남이든, 메루치든, 근돼든, 상관없다. 트랜스 남성이라고? 두 배로 환영한다. 안 그래도 남자들을 까마득히 앞지르는 고학력 하이퍼포머 누나들 너무 많았는데, 내가 제쳐야 할 누나가 한 명 줄어서 다행이다. 여자를 이기기도 벅찬데 자기 자신의 구질구질함을 먼저 이겨야 하는 남자들의 식탁에 어서 와서 앉기를 바란다.
당황하는 남자들
지난 10년간 시민사회, 공공, 대학에서는 다채로운 젠더 스터디와 성평등 담론이 제공되었다. 우리는 삶의 초반기를 겪으면서, 삶의 초반기가 아니라고 해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젠더평등 웨이브를 겪으면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잘 배운 민주시민의 상식이라고 아는 것들을 재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소지니(Misogyny), 유리천장, 구조적 성차별, 맨박스, 가부장제, 마이크로어그레션,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어쩌고저쩌고, 다 아는 얘기들. 그것들을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급외의 인간이 아닌 한, 짧게는 지난 10년부터 길게는 30년까지의 세월간 우리는 현대 시민적 젠더의식의 상식 식립(植立)기를 살아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문민정부 이후 1세대 시민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희호 회장이나 김활란 총장의 진짜 1세대 페미니즘 시기부터 세지는 않기로 하자 너무 옛날이니까….)
시민사회의 젠더 및 젠더 롤 담론이 재정비됐던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남자들은 사회적 언어로 재정의된 자신의 불가피한 모든 것들에 대해(죄든 영광이든, 득이든 실이든, 정해진 어떤 생명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불가피한 일이다) 때로는 저항하기도 부정하기도 수용하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더욱 악에 받쳐서 더욱 극우화되고 여성을 저주하는 문화지체와 퇴행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대부분은 더 젠더적으로 조심하게 되었고, 곤혹스러운 사회적 물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상대화하게 되었다.
억울한 남자들
하지만 그런 담론의 폭풍과 내파(Implosive)적 수용은 한 가지 터널비젼을 만들었다. 젠더 담론과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가하는 추궁이 강력하게 느껴지다 보니, 자신의 온 삶의 어려움이 다 젠더적인 이슈에 대응하느라 이렇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사실상 전 시민이 다 적극적으로 읽고, 그들이 추천 버튼으로 여론투표를 하는 인터넷 게시판은 언제나 남자로 살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이야기들이다. 왜 어려운가? 그 주장은 대부분 이렇다; 여자들은 잘났고, 결혼은 비싸고, 집은 내가 해 오라 그러고, 여자친구는 눈이 높고, 남자는 힘이 없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 경우도 많고 아닌 경우도 많을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아직도 점령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사람들의 수많은 유익하고 성장가능한 시간들을 빼앗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인간 삶의 본질적인 어려움이, 아니 더 좁혀서, 남자들의 본질적인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딸 키우는 부모들이 음모론 속의 방사능 전파무기라도 가동해서 체계적으로 남자들을 약화시킨 것인가?
강한 남자들
남자로서, 그리고 나 역시 남자로 살아온 삶을 솔직히 돌이켜보면, 정작 남성은 여성과 젠더/성적인 어떤 무엇과 관련된 일로 부딪히는 경우가 거의 별로 없다. 우리네 인간관계는 대부분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로 채워져 있고, 사회적인 관계는 협동 생산하거나 거래를 하는 인터랙션이 일어나는 것이지, 그래서 대부분은 생산성에 대한 문제이고 돈 문제이지, 참여자의 젠더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사귀면 사귀고 말면 말았지 성별 차이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피해를 보거나 손해를 입는 범위는 극소수의 예시를 들어보려고 해도 말문이 막히는 일이다.
물론 누구나 종종 Dark Triad나 Psychopathy와 같은 위험한 성격장애를 가진 애인을 만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피살 등 극단적 예외를 제외하면, 혹은 극소수의 무고 피해를 입거나 심하게 가스라이팅당하지 않은 한, 거의 모든 남자는 친밀한 관계에서 남자 잘못 만난 여자들만큼의 피해는 입지 않는다. 아무리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쓰레기 같은 인간성을 가진 여성을 만나도, 여전히 남자로서의 위하력(Deterrence)은 강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수준에서 남자들이 여자에게 입을 수 있는 심각한 피해는, 데이트폭력 · 이별폭력 가해자들이 '거절당하는게 폭력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없다.
나 역시 나의 정 많고 관대한 성격을 악용하여 착취하려 하는 정신과적 문제가 있는 분들을 만나 보았고, 그들로부터 결코 잊을 수 없는 악의적인 무고와 누명, 심각한 피해도 당해 보았으나, 그들이 자기 인생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입었던 피해 이상을 나에게 입히지는 못했다. 남자라는 것은, 방어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만 징징거릴 필요도 있다. 나는 살아서 글을 쓰고 당신도 살아서 글을 읽는데,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은 오늘도 한반도 어디에선가 일어났을 것이니까.
태어난 게 억울할 남자들
그렇다면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억울한가 하니, 사실 억울할 게 없다. 키작고 못생기면 누구나 억울해지나, 그건 동서고금 공통이다. 딱 한 가지 - 남자만 잡아가는 '징병제'가 있는데, 이것을 억울해하는 사람은 보통 동시에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며 제도 자체를 정당화하기도 하므로 내가 해 줄 말은 없다. 기실, 남자들은 사회 탓 할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면 남자로 사는 것이 도대체 왜 힘들다는 것인가?
남자의 적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외부에 없어서, 외부에 반격하는 것으로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페미니즘적 시민 운동을 통해 치명적인 사회적 위험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면, 남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보통 본인의 잘못된 습관이나 선택에서 기인한다.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계속 먹으면 살이 찌게 되는 자기파괴의 원리가 있을 뿐, 남자라는 이유로 겨눠지는 공격은 거의 없다.
물론 자기 외부에 원치 않는 '남자 노릇' 혹은 '남자 구실'이라는 산업적 · 사회적 목표가 주어졌고, 그것이 압박이 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잘 살펴 보면, 그러한 맨박스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압박은 성별에 의해 강화된다기보다는 가족·친지의 압력과 기대 등 친밀함에 의해 강화되는 것이고, 그것을 거절한다고 해서 남성으로서 입게 되는 침습적 피해는 없으며, 그것을 압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은 자신이 어떤 남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자기-강박적인 투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사는 여자들
물론 그러한 자기-강박적인 투쟁은 여성도 마찬가지로 느낄 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해지는 압력이고, 또한 젠더에 따라 특수화되어있기 때문에, 이 역시 젠더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압력 일반'의 측면에서 봤을 때, 여성 문화는 (혹은 여성 젠더는) 그 특유한, 경우에 따라서는 과하게 보일 수도 있는 극히 친사회적 태도의 문화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튀는 자아를 억제하고, 수용하고 협조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공감하는 방식으로, 때로는 희생하는 방식으로,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자신들을 맞춰 왔고, 그래서 20대~40대의 골든타임에 남성들보다 무서울 만큼 빠르게 역량과 커리어 양측에서 치고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 모든 남자를 압도하는 성과를 결혼 · 출산 · 양육의 불이익이 즉시 그리고 돌이킬 수 없게 분쇄하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별도의 문제이니까.
여성은, 그들이 내면의 적이라고 할 만한 어둠은, 적극적인 사회적 교류와 사회적 압력의 수용 그리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고통스러운 공감과 양가감정과 죄책감 등으로 다이아몬드처럼 깎이고 압축된다. 그것은 불안 · 초조 · 강박 등의 통증성 추진력이 될지언정 (그래서 벤조디아제핀을 먹어야 할지언정), 자꾸 예술을 해보겠다든지 세상을 바꿔 보겠다든지 예쁜 여자랑 사귀고 싶다든지 하는, 달성하기 어렵고 정돈되지 않은 내면의 혼돈과 자의식이 남자만큼은 크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사회적 삶에 더 잘 적응하는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이성과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내면의 압박을 경험하지만, 그 압박이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그 압박을 자신의 안위보다 우선시하거나(적지 않은 수의 여성처럼), 아니면 압박에 응하기를 완전히 포기해버리고 현실에 안주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특정한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성공적 남성 롤 모델(이른바 '알파 메일')들을 보면서 열등감과 조바심을 갖는다.
아빠들조차 딸을 원한다
하지만 보통 남성이 자기 신세를 조지는 이유는, 여자들 때문이 아니라, 여자들이 이미 초등학교 · 중학교 시절부터 성실하게 해내오던 가장 기본적인 친사회적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에 순응하기, 게임 안하기, 가출 안하기, 싸움 안하기, 재수, 삼수, 입다물고 공부하기, 뭐 일 벌인다고 설치지 말고 겸손하게 자리를 지키기, 그러면서도 제도 안에서 최대한 높이 올라가기, 사회를 바꾸려 하는 대신 자신을 먼저 억제하고 통제하기, 정치 · 사회에 불만을 쏟아내는 대신 제 할 일에 묵묵하기, 표현과 창작의 욕구를 억제하고 양육자가 지시하는 삶에 묵묵히 협조하는 것을 포함하여, 동서고금 막론 전 세계 여성운동이 여성으로부터 해독하고자 하는 그 모든 젠더적으로 학습된 과잉사회화 기질들이, 한반도 문화의 여성에게는 과다하고 남성에게는 과소하다.
대체로 친사회적이고, 대놓고 적대하지 않고, 비폭력적이고, 유순하고 협조적이며, 사회적 네트워크와 신임 얻는 것을 목숨같이 여기고, 양육자와 주위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가급적이면 상대에게 맞춰주려는 그 모든 행동 특질들이, 여성을 디파워링(Depowering)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면만 있지 않았다. 그 특질들은 그녀를 효녀로 만들었다.
효녀는, 부모의 기대를 반영하고, 속이 병들지언정, 반사회적이거나 탈사회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다. 파스텔톤 장례식복처럼 우중충한 믹쏘(MIXXO) 자켓을 입고 야망과 꿈을 접고 공무원 청사에 출근할지언정,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주변 사람을 희생시키지는 못하는 게 오늘날 한국의 여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점이 사회와 융합된 방식으로 거대한 정당성의 성벽을 만들었고, 예비 아빠들조차 아들이 아니라 딸을 원하는 시대를 만들었다.
딸이 좋으세요, 아들이 좋으세요?
한국 집안에서 딸은 아들의 상대 개념이 아니다. 딸이라는 개념이 먼저 있고, 딸이 되지 못한 존재로서, 아들이 있는 것이다. 딸을 선호하지 않는 케이스는 보통 둘 중 하나다. 오직 정신적으로 딸과 융합되어 착취하고 집착하는 병든 어머니이거나(이것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답이 없는 수구 극우 유교주의자로서 아직도 맏아들 장손을 원하는 광인뿐이다. 예비 아빠들조차, 딸을 선호한다. 아들이라면, 제발 좋은 부분만 자신을 닮기를 바란다. 대체 왜 엄마도 아빠도 딸을 더 예뻐할까? 실제로 더 예쁘기도 하지만, 아들 키우면서 할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술, 담배, 물담배, 비디오게임, 도박, 오락, 포르노, 오토바이, 폭력, 자해, 자살, 나쁜 취미와 행동, 약물, 기타 유해한 외부 요인에 여성보다 훨씬 더 많이 노출되어 왔다. 여성이 공대와 이공계가 아닌 예대와 문과로 자꾸 향하고, 커리어적으로 작고 소소하고 안정적인 직업에 쏠리는 것도 문제이기는 해도, 그들은 대부분 결혼 전까지는 취업에 남자들보다 훨씬 일찍 안정되고 성공한다. 현장에서 보면, 남자들은 대학을 졸업하면서 방황을 좀 더 심하게 하고, '대책 없이 독자적인' 음악이나 예술이나 창업을 하겠다는 용기도 더 많이 내는 것으로 보인다.
여성은 매우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혼자 있는 것에, 혹은 다른 여성과 연대하는 것에 잘 단련되었다. 섬뜩하고 위협적이고 모욕적인 사회적인 위험들에 평생 학습됨으로써, 아주 괜찮은 남자가 아니면 그냥 혼자 사는 게 낫다는 것을 체감했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하지만 남자들은 외로움과 이성관계에 대한 내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오늘날에도 남자들은 여전히 여자 없이 버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여자 없이 버티지 못함을 티 내는 것을 잘 참아내지 못한다. 반면 여성들은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혼자 있을 수 있고, 그 시간동안 결정적인 실력 우위를 만들어내며, 이성과의 연결 없이도 오래 멀쩡하게 기능한다.
AI시대, 효녀는 이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AI시대에 치명적인 격차가 될 것이다. AI 시대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스레드에 오그라드는 자기자랑 쓰고 자의식 과잉으로 설치고 다니는 남자들이 참고하는 얄팍한 지식과 레퍼런스들이 AI 채팅창 엔터 한 번에 드러나고 그 얕은 기술은 파훼된다. 과거에는 이리저리 실속없고 시끄럽게 다니는 남자들조차 그들의 고활동성을 바탕으로 지식정보를 축적 · 상품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의 모든 지식이 오픈소스화가 되어버린 ChatGPT 이후의 시대에는, 묵묵히 대학원에서 자기 전문성을 쌓은 석사와 박사들, 꿋꿋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출근해서 자기 직위 · 직무를 지킴으로써 특수한 도메인 접근성을 관리해온 사람이 승리할 것이다.
진짜 엉덩이가 깔고 앉아있는 진짜 인간의 자리 이외에는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자리와 좌석들에는 누가 앉아 있는가? 그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성실함과 묵묵함, 외로움과 홀로됨을 잘 버티던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버티다 못한 여성들 가운데 소수는 물론 다른 어리석은 남자들처럼 가벼운 인간관계를 위해 틴더나 오픈카카오톡이나 트위터를 기웃거리지만, 그것은 전체 여성 생산성 지수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 애초부터 우글거리는 자들이 남자들이고, 그들이 끌어내리고 있는 남성의 생산성 지수가 훨씬 더 크니까.
한국의 여성은 인간이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감정적 허기와 외로움을 엄마에 대한 부채감과 친사회적 강박으로 씹어먹으며 자기 자리를 지켜 왔다. 그래서 AI시대에는 여성이 이길 것이다. AI의 쓰나미에 맞서 부서지는 대신 그 위에서 서핑을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외로움을 잊고, 혼자 꾸준히 자기 전문성에 몰입하고, 직장인이라면 성실하게 매일 출근하는 것. 마치 한국의 K-장녀들처럼.
진격의 효녀
앞으로 꾸준한 대량해고와 고용결빙이 있을 것이고, 여기에서 집단 전체의 생존성 추이를 본다면 지금 안정적인 직업을 일찍부터 대량으로 선택해온 여성 집단이 유리하다. "여자는 편한 일 좋아해서 사무직 간다"는 몰상식한 발언들이 있으나, 거기에 일말의 사실이 있든 없든 이제 일자리는 그렇게 꾸준한 인력수요가 있고 고용보장이 되는 해고저항적 자리들 위주로 생존하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 사회학을 포괄하여 성평등과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직업상담학의 측면에서, 여성이 안정적인 직위와 직무 (대표적으로 공무원과 공기업) 에 몰리는 것은 당연히 문제다. 훨씬 더 많은 여성이 경영직이나 벤처 창업가가 되는 세상을 나 역시 바라마지않는다. 그런 점에서 중기부의 여성창업자 가산점 등은 매우 훌륭한 적극적 차별시정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AI 시대에 우리는, 좋게 말하면 묵묵하게, 나쁘게 말하면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 온 여성들의 안정추구적인 공무원적인 삶의 신용과 산업적 잠재력에 다시 주목하게 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주목하는 게 아니라, 그것 이외에는 믿고 의지할 것이 마땅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AI의 확률론적 응답은 결국 실무 라인에 있는 누군가가 직접 자기 명예와 직위를 걸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정보를 쏟아내도, 아무리 많은 업무를 자동화해도, 실제 산업현장에서는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책임지지 않고 그 오남용에 대해 배상하지도 보상할수도 없는 기술은 활용될 수 없다.
아무리 발전한 AI도 가치창출의 도구에 불과하다. 즉, 선택과 책임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AI는 그저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동화 가능했던 일자리'를 종말시킨다. 이제 우리에게 남는 모든 포지션은, 기존의 제도 · 절차 · 실무경험 속에서 진짜 인간의 문제를 자신의 감각기관과 소통기관으로 처리해 본 실무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다. 그 자리에 묵묵한 효녀들이 앉아있었다면,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히 죽는다
AI는 책임자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들의 지시에 의해 그들의 권한과 역량을 더 강화시켜줄 것임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고용의 여부를 떠나, 지식의 모든 정보의 진위와 우열을 희석시켜버린 이 시대에, 다시 주목받는 것은 진짜 실무자의 목소리, 진짜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살아있는 인간의 보증이다. 어떤 정보 주장을 자신이 삶을 바쳐 도메인지식으로 검증하는 인간의 얼굴이 없다면, 그 정보값의 가치는 랜덤 주민등록번호 생성기와 다르지 않다.
AI 시대에 인간이 어떤 지식이나 노하우의 진위를 보증하는 행위는, 어떤 지식정보가 작동하는 Value Chain, Service Pipeline에 직접 위치하고 있는 검증자의 직위로만 가능하다. 명예의 측면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켜 온 직위를 내걸고, 기술의 측면에서는 AI의 대규모 데이터베이스에 빨려들어가지 않은, 실무자만이 비밀스럽게 관리하고 눈으로(혹은 점자로)만 확인할 수 있는 비공개 도메인지식과 도메인 노하우로만 가능하다. 단지 효녀들의 직책이 유지 · 강화되는 것만이 관건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를 가르는 오라클이 될 것이다.
거대 AI 기업들은 채팅 한 줄로 인스타그램 앱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바이브 코딩(Vibe Coding) 서비스를 헐값에 풀어버렸다. 또한, 많은 남성 창업가가 출시하려는 서비스를 이미 포괄하며 대체하고 있는 AI-driven SaaS를 초고속 초대량 출시했다. 이것은 벤처 활동을 하던 기업인이나 소규모 혁신가들을 즉각적인 위험에 빠트렸는데, 이 당사자들의 상당부분은, 용감하고 욕먹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불효자 되기를 무릅썼던, 남성들이다. 그들이 거대 AI 앞에서 전멸을 앞두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히려 월급은 크지 않아도 꾸준히 안정적인 직장에 출근하며, 공동체와 사회적 연결고리 그리고 신용을 사수하고, AI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독서' 를 꾸준히 하고, 마을만들기 운동이나 귀농·귀촌 운동 등 많은 도시인이 하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온 인간 및 공동체와의 유대와 관계를 묵묵히 쌓아 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는 관계지향적인 여성(그리고 한줌의 에겐남)이 많다. 이제 마초처럼 으르렁거리는 <진격의 늑대>는 전멸할 것이다. 다정한 것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
왜냐하면 이제 고독한 저격수처럼 홀로 남모를 비밀에 접근해서, 그것을 단독 가공 · 독점 판매하는, 정보의 우위로는 아무도 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AI에 의하여, 비밀도 · 정보의 독점도 · 정보의 편재도 없어졌다. 이제 로컬의 시대, 관계의 시대, 돌봄의 시대, 다정의 시대, AI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다정하고 사회화된 반듯한 친사회적 인간의 시대가 온다.
이제, 효녀가 되기 위해 자아를 억제하고 자리를 지킨 사람들,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진짜 실무자들이 주목받기 시작할 것이다. 오히려 부모(그 중에서도 주로 엄마)의 희망에 따라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커리어를 쌓아 온 여성들의 차례인 것이다. 그들은 예민함을 속으로 씹어삼키며 예의범절과 조심스러움으로 자신을 방어하며 젠더적 차별과 위협, 가족과의 복잡한 관계, 자기보다 못생긴 남자친구들을 참아주었다.
그들은 야성이 억제된 채 극단적으로 사회화된 늑대의 일종인 개로 살았다. 외교부 강경화 장관이 여성 커리어의 정점과 같은 롤모델이었던 약 7~8년 전만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여성을 더 소극적으로 만들고 사회복속화하는 디파워링으로만 여겨졌다. 그래서 그 당시 페미니즘 운동조직 내부는 (나도 그 안에 있었지마는) 좀 부담스러울 만큼 전투적이고 사나웠다.
시스템적 사고로 보면 그 까닭은, 남자들이 선취점을 가진 비결이 일종의 전투력이라는 무의식적 판단이 있었고, 그 전투력을 따라잡기 위한 후발주자 전략이었던 것이다. 7~8년 전은, 범용 AI 기술이 세상에 공개되기 바로 직전의 시대다. 당시 여성주의 운동이 투쟁하고 처치하고자 했던 그 사납게 설치는 늑대들이, 이제 빙하기 공룡처럼 속수무책으로 주저앉는다. 사회적 뿌리 없이, 제 잘난 맛에 사는 자의식 과잉들을 쓸어버리는, AI가 왔다.
딸이 사랑받는 이유, 남자들이 걸어야 할 길
故 신영복 선생의 『강독』에는 동양적 사고방식의 관계론·장(場)론과 서양적 사고방식의 원자론·개인론과의 대비가 나온다. 그간 시끄럽게 으르렁대고 이른바 '남성호르몬(나는 이것이 굉장히 잘못 이름지어진 민간과학적 용어라 본다)'을 자랑하던 진격의 늑대들은, 그들의 개별성을 너무 믿었다. 개인이 강해지고, 개인이 무장하고, 개인이 고대 그리스적으로 이른바 '철인'이 되면 모든 적과 문제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것은 홀로주체적 사고방식이 낳은 동화적 세계관이고, 그것은 산술적으로 개연성 있으나, 수학이 산수를 포괄하는 것이지 산수가 수학을 포괄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때로 역사는, 개인이 도저히 어쩌할 수 없고 전체 상을 파악할 수조차도 없는 기후로 · 질병으로 · 기술로 · 인간이 아닌 자연의 단위로 · 우연으로, 랜덤하게, 누군가에게 무기를 쥐어준다. 노자 도덕경 5장에서는 "하늘과 땅은 어질지 못하여 만물을 강아지 인형처럼 여긴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이와 같다. 돌고 도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누구를 어느 곳으로 올려놓을지는 모르나, 부처의 법륜이 순환을 상징하듯, 상황과 입장은 언제나 역전되는 것이다.
동양 아포리즘의 고전으로 오래 사랑받는 『주역』의 맨 마지막 점괘는, 64괘 <화수미제(火水未濟)>이다. 이름은 무려 '불통(不通)'인데, 물 위에 불이 떠 있는 모양으로, 꽉 막혀 있고, 완결되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어지러운 형세를 상징한다. 주역은 1괘부터 64괘까지의 도상학적인 상징으로 인간사를 비유한 것인데, 왜 하필이면 64종의 괘 중 마지막이 난망하고 혼탁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인가?
주역 괘사하전 2장에는 힌트가 등장한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막히면 변하고, 변하면 다시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는 것이다. 64비트 체계 주역 전체 시스템의 가장 마지막 노드를 '막힘'으로 놓은 까닭은, 그 혼돈이 끝이 아니라, 그 다음에 만물의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萬物資始) 1괘 건위천(乾爲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막다른 길은 영원한 끝이 아니고, 다시 (스택 오버플로우를 통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만물 순환을 철학을 담은 것이다.
택티컬 효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그 어떤 구조물도 지각변동 그 자체에 버틸 수 없듯이, 그 어떤 남성적이고 위압적인 몸짓과 태도도 시대 그 자체에 의해 무장해제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가지 말라는 방향으로, 커리어도 자아도 찾을 수 없다고 알려진 곳에서 K-장녀들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고 있었고, 이제 그들은 AI라는 기술적 특이점 · 역사적 창발로 인해 중무장되고 있다. 한편 홀로주체성과 아상(我相)이라는 위험한 묘기 위에서 운 좋게 승승장구 해 오던 자들이 있었으나, 그 운의 바퀴가 다시 굴러 기반암을 사상누각처럼 부스러트릴 때, 빙하의 늑대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제국적 친사회성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