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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r 28. 2021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2편

2편 - 정신적 자립의 공포

이 글은 1편에서 이어지는 2편입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1편 (brunch.co.kr)




규정성 강박 : 관계를 규정해야만 편안할 수 있다는 환상


첫 번째는 규정성 강박입니다. 어느날 당신과 밥을 먹던 사람이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떤 사이에요?" 드라마는 그렇게 시작되죠. 아니면 그렇게 끝나거나. 어떤 사람들은, 관계를 언어적으로 규정함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오 나는 이 사람이랑 무슨 관계일까?!' '오 나는 이 사람에게 뭘까?!' 계속해서 생각하죠. 그 사람과 실질적으로 함께하는 행동에 집중하는 대신에요. 계속해서 정의내리고, 규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 행동이 왜 나왔을까? 자꾸 이유를 찾죠. 왜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고 반대로 나는 그 사람에게 특정한 행동을 할까요? 숨 쉬는 데 이유가 어딨습니까. 쉴 수 있으니까 쉬는 거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타인을 만집니다. 만질 수 있으니까 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키스하고, 섹스하고, 애정을 주죠. 왜냐고요? 이 사람이 나에게 유일한 단 한 번의 사랑이기 때문에? 아니요 우리는 서로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한 애착이라는 것이 있고(정확하게는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행동과 추동의 집합이 있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그것보다 더 세밀한 단계의 이유가 있든 없든 추가적인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인간을 구속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컴의 면도날입니다. 인간의 사랑에 인간이라는 사실 이외의 이유를 대는 것은 설명을 너무 길고 장황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 사랑이 폭력적이거나 강박적인 것 혹은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관점에 있어서, (권력이 아니라) 성욕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체로 쓸모없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개저씨'가 있다」 라는 취지로 말해지는 여러가지 버전의 인터넷 격언이 있지요. 성욕이 문제가 아닙니다. 타인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비정상적인 권력관계의 상위에 놓이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나쁜 행동의 마지막 규제장치가 자신의 욕구를 통제할 양심이나 공감능력처럼 소수만이 지니고 있는 말랑말랑한 수단(soft-method)에 의존할 때, 울리히 벡의 경고처럼 사회적으로 창조된 위험이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파시즘이나 제국주의 발흥의 원인을 단순히 '더 먹고 싶다'는 식욕에서 찾는 사람이 없듯이, 성폭력의 원인도 단순히 '하고 싶다'는 성욕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욕구가 행동으로 구성되는 길에는 사회로부터의 광선이 내리쬐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인간의 행동은 사회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사회라는 공기에 노출되지 않은, 타인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은 완전히 사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층위에서의 욕망은 근본적으로는 사회와 전혀 관련없는 나 자신에 대한 사실로서 스스로에게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사실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실입니다. 즉, 인간 일반의 수준에서 타인에 대한 타인의 생각은 비교적 비슷비슷하고 안정적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외설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는 지난 수백년간 엄청나게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외설 그 자체의 내용은 수 백년간 레퍼토리가 똑같아서 지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외설을 대하는 태도는 수백만명이 개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변량이 적용되지만, 외설적 표현물은 대체로 한두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 인간 내면의 기본 셋팅이라는 또이또이한 범주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침 저는 이번 학기에 소수자 연구로 유명한 윤수종 교수의 수업을 듣는 친구를 통해, 사드 문학을 한 번 더 훑어보는 중입니다. 저도 이미 그 수업을 들었습니다만 사드 문학은 언제 읽어도 지루합니다. 정말 하품이 나오는 설정 놀음입니다. 사람들을 경악시킬 상상력이라고 해 봐야 그 정도 혁신밖에 구가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폰섹스를 해 본 친구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클리셰가 어떻게 창조되는지를 볼 수 있는 게임이론 실험장 같습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게 1700년대에 없을 줄로 아십니까? 트위터 섹계? 저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 점토 판을 뒤져봐도 반드시 그러한 매체가 있을 줄로 압니다. 게임 『폴아웃(Fallout)』 시리즈에는 이런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전쟁,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War, War never changes)"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휴-먼, 휴-먼은 변하지 않는다(Human, Human never changes)" 



사랑이라는 난로는 나와 너를 동시에 따듯하게 한다


따라서 저는 언제나 말합니다. 인간의 욕구와 욕망, 나아가 행동 패턴과 다른 인간에 대한 지향성 그 자체는 인간의 마음에 고정된 인간의 안정적이고 불변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즉, 지루한 유전정보의 환영(幻影)이기 떄문에, 본인 유전정보의 역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살아있다면 살아있는 한 그것을 그대로 즐기고 살면 된다고 말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처럼, 당신의 운명의 짝은 당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그 사람의 속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속성이 타인의 속성에 조응(照應)하기 때문에 사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을 잡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을 충족해주려는 자기애이기도 합니다. 내 안의 내밀한 속성을 돌보고 존중하고 보살피는 자기애가, 그것과 공명하는 타인의 주파수를 수신하여 사랑으로 맞이하곤 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능력을 가장 먼저 잃는 것은 흔한 현상이라는 것이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동시에 두 사람에게 향하는 에너지입니다. 첫째로는 사랑의 대상, 그리고 둘째로는 사랑하는 욕구와 능력을 가진 자신에게로 말입니다. 즉, 사랑이라는 난로는 나와 너를 동시에 따듯하게 합니다.


모든 기쁨의 재료는 내 안에 이미 준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기쁨은 나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거울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새로운 사람의 모습을 형성합니다. 진화라는 우연으로부터 물려받아서 이미 내 서랍 안에 있던 점토가 아니면 무엇으로 마음 속의 형상을 만들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의 관계는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수여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에 소속된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특성이 발현된 결과입니다. 겨우 해마다 변화하는 사회적인 언어와 개념을 끌어와서 당신과 그 사람의 관계를 안정화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습니다. 심리학자들조차 인간 내면의 역동에 이름붙이려는 것을 꺼립니다. 대신 단지 그것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하)는 행동을 측정할 뿐입니다. 



사회의 규정보다 나의 느낌을 먼저 만져보기


현명한 사람들은 사회적 관습에 인간을 맞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사회적 관습을 맞춰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여러 과잉대표되고 격앙된 정념들이 응축된 뜬구름 같은 담론들이 바로 우리가 시대정신 혹은 문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중하지 마십시오. 물론 남의 기분이야 살필 필요가 있지만 너무 많은 존중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화에 도취되어 문화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문화의 기본 형성 원리는 단순한 동조 압력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가장 숭고하고 가장 실용적인 정신들은 비-문화적, 반-문화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계몽주의도, 평화주의도, 여성주의도, 과학주의도 언제나 문화의 역적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옳았어요. 문화는 조심해야 합니다. 문화는 과학도 아니고 복지도 아닙니다. 그것은 집단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집단무의식의 실수들이 실제 원본의 인간을 좌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융(C. Jung)의 그 개념이 실존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상당 부분 걸러질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이름과, 도식(Schema)들, 규정짓기들, 그리고 호나이(K. Horney)의 언어를 빌리자면 '당위의 횡포(Tyranny of the Should)'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당신이 진정 태어난 그 본질대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 규정된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려고 언어적 속박을 남용합니다. 물론 인정합니다. 사회적 규정들을 내 삶 안에 준용할 때, 때로는 안정감이 느껴지고 편리하고 남 보여주기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자신 혹은 둘만의 진정한 실존과, 그것을 규정하는 사회로부터의 외래어는 시간에 의해 시험받게 됩니다. 시간은 존재들을 진동시킵니다. 존재의 진정한 외곽을 평균으로 수렴시키지요. 때로 우리는 연극을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생소한 라이프스타일에 자신을 맞출 수 있습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바지를 34를 입는데 한동안 엄청나게 굶어서 27까지 살을 빼면 잠깐은 27사이즈 바지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34사이즈가 내 원래 체질인 사람이 평생 그 정도로 수척하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채택한 언어도 그렇습니다. 왠지 힘들다면, 내가 내 본질과 맞지 않는 남의 언어를 위해 살아주고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세요. 세금을 내면 어려운 사람이라도 돕지, 남의 언어대로 산다고 해서 좋아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자기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이상한 일인극이자 독백극일 뿐입니다. 허위일 뿐이에요. 자신의 느낌과 감각, 만족감과 슬픔, 쾌락과 이완에 집중하세요. 그것이 유일하게 당신의 몸에 딱 맞는 언어입니다. 그것이 진실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3편 (brunch.co.kr)

Photo by Mandy Henr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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