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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r 28. 2021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3편

3편 - 이렇게 영영 혼자가 될 것 같아요

이 글은 2편에서 이어지는 3편입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2편 (brunch.co.kr)



접근성 강박 : 너무 정확하게 두려움의 정반대로 행동하기


제가 다루고 싶은 두 번째 행동은 접근성 강박입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유일무이한 존재이고 영구적인 사랑을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되풀이하며, 그 사람에게로 무한히 접근해 가서 궁극적으로 그 사람과 내가 융합되고자 하는 강박입니다. 예를 들면 '너와 늙어서도 여생을 같이 보내고 싶다'라고 자주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은 요즘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많이 하는 것처럼, 그린라이트가 켜지면 '상상속에서 손주 이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가능합니다. 결국 누군가는 손주를 볼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가능성을 아주 젊어서부터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과 백년해로 하는 것은 많이들 꿈꾸는 일이고 또한 불가능한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과 그 얼마 안 되는 가능성을 계속 마음 속의 화이트보드에 올려 놓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음 속의 화이트보드에 올려지기 가장 좋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여기, 내 앞의 풍경입니다.


변화의 가능성과 상실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리고 걱정거리와 너무 정교하게 반대되는 신념을 가짐으로써 그 불안을 덮어두려고 하는 것. 이 접근성 강박이야말로 강박행동이 무엇인지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강박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하는 행동을 우리는 강박행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강박사고 그 자체를 생각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회피적인 행동도 있고 걱정을 덜기 위해서 모으고 저장하는 행동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접근성 강박'이라고 부르는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 대처 방식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정확히 반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강박의 본질을 투명하게 상징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 에서 라이오스 왕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라는 신탁을 받고 굳이 아이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 발버둥이 그 신탁을 실현하는 방아쇠가 됩니다. 그런 저주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응 X까"


정도가 적당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니, 정말로요. 진심입니다. 저는 제 글에서 비속어 사용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가면 속에서 중산층만의 언어만을 사용하면 세상에 그 이외의 것이 삭제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덮는다' 라는 표현을 아주 싫어하는데, 진실은 덮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오직 직면할 때만 완료(complete)되고 만료(expire)될 수 있습니다. 강박도 이와 같습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지만, 강박은 걱정거리의 그 반대로 행동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거리와 상관없이 사는 것만이 편안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걱정을 잘라 먹기


티벳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모든 신앙인은 사후세계를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인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신앙 자체가 죽음의 정반대로 달음박질치는 강박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객관적 현실이 있고 그것에 대한 반응에 불과합니다. 우리 사회에 정작 죽음을 두려워하고 현생에 누구보다 집착이 강한 신앙인들만 남은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영생에 대한 집착은 그만큼 죽음이 두렵고 압도적이라는 것만을 말해 줍니다. 진심으로 사후세계를 믿은 참된 신앙인들은 가장 먼저 사후세계로 갔지 않겠습니까? 용감하게 4심 판결을 받으러 발할라로 간 '야수' 김재규 장군처럼요. 


아무튼 변화의 가능성과 상실의 가능성에 대처하는 가장 큰 방법은, 먼 훗날을 주술적으로 대비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부터 일찍부터 애도와 아픔을 직면하고, 그 압도적인 내용들을 하루하루 조금씩 앞니로 잘게 잘라 먹고 소화하는 것입니다. 변화와 상실을 나도 느낄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대처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그 두려움의 실체에 대항하는 대비를 해 둔다면, 우리는 위험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조금씩 잘라 삼키고, 현실의 지평에서 그것에 대비하는 것과 함께 또 한 가지 권하고 싶은 정서적 대응 원칙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를 하나 읽고 올까요?




히말라야 산 이름들을 
중얼거리다보면
내게도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샤팡마 초오유

높고 험준하고 젊고 외로운 
산악의 이름들을 부르다보면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기가 거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내가 여태까지 확신범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살아갈 힘이 사랑할 힘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샤팡마 초오유 칸첸중가 안나푸르나



-「초오유」, 이문재




산. 작은 비교, 작은 승리, 작은 협상들이 먼지처럼 무화되는 곳이지요. 초월적으로 희게 펼쳐진 산의 이름들을 부르며 시인은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 여기가 거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직감. 산에 올라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정상에 올라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은 까마득하게 펼쳐진 수많은 다른 봉우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의 무한함을 느끼게 되지요. 산이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광막함은, 정해진 불가능 앞에서 헛된 희망을 버리게 하는 삶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은 절망의 불가능이 아닙니다. 헛된 희망과 함께 허튼 절망도 쓸어내는 해방의 불가능입니다. 


무한하고 압도적인 대지의 물결 앞에 서면, 이렇게 작은 나의 모든 자격과 함께 심지어 내가 절망할 자격이 있는지도 묻게 됩니다. 산의 고개는 삶의 고비에 끝이 없음을 알려주는 은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산이 나의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내가 산과 대결할 필요가 없겠다는 하나의 면제 선언입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자갈밭 위에, 나의 후회와 고갈을 쏟아버리고 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들과 고작 무엇을 얻기 위해 씨름했던 것일까요? 왜 나는 구태여 힘들었을까요? 


산과 나의 관계처럼 삶과 나도 대결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산에게 말을 걸 수 없듯 삶에 대하여서도 요구하고 청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릴 때, 그리고 마침내, 침묵하는 산 위에서 하루종일 걷다가 내 말에 응답해 주는 존재는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대화합니다. '두려움을 베어 먹기'와 '현실적으로 준비하기'에 이은 세 번째 원칙은, '나 자신과 함께 살기'입니다.



나의 뜨거운 에너지를 깨닫기 


모든 상호작용의 가능성들이 제거되고 단지 걸을 가능성만이 남겨진 땅 위에서,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아이러니가 문득 일으키는 것은 "내게도 아직 사랑할 힘이 /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랑 때문에 살아간다고 생각했겠지요. 사랑과 함께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런 사랑도 가능성도 없는 산중턱에서 자신의 숨 소리를 듣다가 드러나는 사실은, 실은 혼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자서 살아 왔다는 역사입니다.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살아온 게 아니라, 살기 때문에 사랑했다는 - 그러므로 삶과 사랑의 힘은 타인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해왔던 것이라는 통찰입니다. 


"내가 여태까지 확신범이었다는" 깨달음은 그렇게 문득 찾아옵니다. 나도 모르게 살아왔다는 것. 나도 몰랐지만 삶을 악착같이 붙들고 달려온 게 바로 나였다는 것. 평생 나와 함께 해 준 사람은 누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 불안 속에서 살아왔던 삶이 사실은 나도 모르는 나의 확신으로 이어져 있었음에 대한 깨달음은… 오직 자신과의 끈질긴 대면 끝에 터져나오는 울음입니다. 


그러므로 접근성 강박을 떨쳐낸다는 것은, 나의 끈질김에 내가 압도감과 애처로움을 느끼며 한 번은 우는 것입니다. 접근하고자 하는 대상의 유무가 아니라, 접근하려는 나의 힘에 잠시 할 말을 잃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는 대상화에 관하여 논의했었습니다. 대상. 정신에게 모든 사물은 대상이지요. 그런데 대상은 내 마음이 에너지를 소모해서 움켜쥐는 마음속의 표상입니다. 어떤 표상도 대상을 향한 나의 뜨거운 에너지가 없으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 대상의 강렬함은 내 정신의 힘과 생명력을 반영합니다. 


어쩌면 '내가 나와 함께 한다' 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문장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둘은 아니고, 나는 나에게 다른 사람이 될 수가 없으까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겠습니까. 


"나의 에너지는 뜨겁다." 

"뜨거운 자가 사랑한다."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서 나 자신과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 자신이 뜨겁게 불타는 열정적인 에너지 덩어리라는 사실을 다시 발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타인의 힘을 빌려서만 따듯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안아야만 데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熱)입니다. 사랑을 주받기 위하여 누군가에게 마음의 힘을 뻗치는 그것 자체가 당신이 에너지 덩어리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내가 외롭더라도, 내가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열망은 대상을 붙잡기 위해서 뻗어나오는 힘이지만, 나의 열망이 비록 대상에게 닿지 못하고 거부당하고 미끄러진다고 할지라도 그 힘이 나와 함께함을 아는 것 - 그 힘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지 않을까요. 그것이 대상에게 적중하든 적중하지 않든, 여러분이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은 강합니다. 강한 자가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더라도 강함이 남습니다. 그것이 당신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홀로됨에 대한 불안과 강박을 넘어서 - 4편 (brunch.co.kr)

Photo by Mohamed Nohass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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