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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16. 2021

외로움을 이겨내는 두 번째 방법

나루의 외로움 클리닉 002

외로움을 이겨내는  번째 방법


나는 지난 칼럼에서 외로움을 이겨내는 첫 번째 방법을 썼다. 외로움을 이겨내는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한 심리기제 중 하나인 자기애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자기애는 보통 많아서 문제가 된다. 겸손과 깔끔한 자기객관화에 언제나 지장을 미치는 마음의 종류 가운데 하나이다. 보통은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자기애 때문에 좋지 않은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자존감이 바닥난 자신을 어떻게든 고양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더 나은 자기'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는 자기애의 작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외로움이라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자기애를 독특한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을 제안한다. 극한의 독성을 가진 물질에 속하는 보톨리눔 독소를 아주 조금만 사용해서 보톡스라는 약품을 만들듯이, 자기애를 이용하면 외로움을 쫓아내버리는 생각의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왜 그것이 가능한가? 자기애는 타인에 대한 선호와 고평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들은 보통 타인을 쫓아다닌다. 왜 그런가? 타인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는 나에게 없는 장점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동경하고 존경하면서 따르는 것이다. 심지어는 별로 장점이 아닌 것까지 과대평가하여 찬미하는 이유로 삼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타인에게 있다는 엄청난 존경 포인트라는 것이 정말로 진실일까?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났어


사람들은 각자의 인생 경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성취한 일은 남이 성취하지 못했고 남이 성취한 일은 내가 성취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대부분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상호보완적이고 궁합이 잘 맞는 능력이 있을 수는 있어도 동경할 만큼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타인의 꽁무니를 쫓아가기에 우리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했다.


이 포인트에서 자기애를 살짝 넣어주면 된다. 건강한 당신 자신을 충분히 존경하고 그 대단함을 스스로 칭찬해 주는 것이다. 당신은 이미 열심히 살아왔고, 건강한 몸과 잘 단련한 정신과 직업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판단 주체이다. 수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원 맨 아미이고, 그 중에서도 몇몇 분야에서는 타인이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함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게 멀쩡한 사람이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 장점을 별다른 근거도 없이 확대포장해서 찬양하고, 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골골대고 있는 것인가? 


내면은 잘 모르긴 해도 너무 잘생기고 예뻐서? 그럴 수 있지. 얼빠일 수 있지. 하지만 자신의 다층적이고 전인적인 가치를 방구석에 던져놓은 채, 그저 외모 따라잡기와 교환하고 살 것인가? 인생에서 쟁취할 수많은 기회가 당신을 기다리는데? 지금 그러고 있을 까닭이 없다. 당신은 누군가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기에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다. 존경받는 전문가이다. 품격 있는 사람은 품위 있는 판단을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을 오매불망 쳐다보지 말고 처박혀 있던 자기애를 다시 한 번 꺼내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품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든 안 받든 너무너무 잘나서 빛이 나는 인생을 살기 때문에 품격이 올라간다.


나는 평생 극심한 외로움과 싸우면서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했다. 연구의 주제는 '애인 많은 사람'이나 '연애 잘하는 사람' 혹은 '인기의 비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남몰래 연구했던 주제는 바로 '남 없이 혼자서도 잘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꼭 외로움에 관한 여러 노하우를 인터뷰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노하우가 없었다. 외로움을 별로 느끼지 않았기에. 대신, 그들은 외로움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남달랐다. 그들에게 외로움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행동이었다. 왜냐고? 자기보다 훨씬 못한 인간들 꽁무니나 줄줄 따라다니는 한심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때 알게 되었다. 외로움을 안 느끼는 사람들은 타인의 가치를 그다지 높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전문성에 대한 굳건한 가치평가를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타인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충분히 잘 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무엇 하나라도 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심지어 외롭더라도 구애를 할 만큼 가치 있는 인간이 없었다.



남자들을 위한 추가 설명


특별히 더 외로움에 취약한 나의 형제 여러분을 위해 한 마디를 더 드리겠다. 이것은 경험상 여성에게는 별다른 해당사항이 없으므로 남성만 읽으면 되는 문단이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하여 아직 덜 데였다. 우리는 더 많이 실망해야 한다. 외로움의 충족이 생각보다 별다른 것을 자신에게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많은 이성을 만나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통해… 그것에 그다지 충격적인 재미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좋은 짝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하나의 믿음.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심어진 강박적 문화일 수도 있다. 그것은 페미니즘이 남성을 위해 변호하는 개념인 '맨박스(Man Box)'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잘 나가는 진정한 남자'에 대한 강박, 그것은 '하버드대를 가야지만 진정한 고등학생'이라는 강박과 유사하다. 물론 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딱히 '알파 메일'의 꿈이 안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로망 있을 수 있고 추구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 삶에는 남자로서의 일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엔지니어이기도 하고 이론가이기도 하고 서비스 전문가이기도 하고 요리사이며 청소부이며 수필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사회에 전승되어 온 관습적 되풀이 안에서 이성 교제를 추구하고, 관습적 되풀이 안에서 알파 메일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불균형한 사람이 되기 쉽다. 미디어와 무용담 속에서 표현되는 멋있는 형들이 - 그러니까 '알파 메일'들이 - 그래봤자 하나 밖에 안 되는 인생 안에서 주어지는 제한된 시간과 노력을 어디에는 쏟았지만 어디에는 쏟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은 구멍으로 남겨 두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해하고 있다. 이성 교제가 남자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절박한 삶의 과제이고 강박인지에 관해서. 그러나 그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남자의 본능일 뿐인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현대 발달심리학은 인간의 '본능'을 영유아의 잡기반사 · 빨기반사 · 소름반사를 비롯한 몇 가지로 매우 좁게 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성적 지향이나 추워서 닭살이 돋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예외 정도를 제외한 모든 것은 후천적으로 배운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우리가 배운 무엇이 우리를 과도하게 결핍되고 허덕이게 하는가? 또한 우리는 무엇을 배우지 못했는가? 지혜로운 사람들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은 무엇을 알고 있기에 저리 편하게 사는가? 



목마름을 없애기 위해 물을  가져오는 대신


결핍이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충족의 대상이다. 그러나 결핍의 원인인 갈구를 제거한다면, 마치 물을 더 많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마름이라는 것을 삭제해서 물 마실 필요를 없애듯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 부처는 이 방법을 권장하였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무리가 있다. 목이 마려운데 어쩌라는 말인가? 열반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나는 불교적으로 자유를 얻는 가르침을 무제한적으로 주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일반인이 평생 끼고 살 수밖에 없는, 알코올이나 니코틴 정도의 독성을 가진 여러가지 마음의 독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잘 관리하면서 스님들보다 훨씬 자극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 독 가운데 하나가, 외로움이라는 독을 다스리는 자기애라는 독이다. 독으로 독을 다스리듯이, 타인을 향한 열망인 외로움을 자신을 향한 열망인 자기애로 상쇄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애를 사용하라는 것이 자신을 고양하기 위해서 타인들을 일반화하여 깎아내리라는 것은 아니다. 안하무인의 나르시시스트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애가 너무 부족해서 타인의 존재만이 자신을 채울 것으로 생각될 때는 자기애를 채워주고, 또 채워진 자기애만큼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금 이곳에서 나의 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남 꽁무니 따라다니기에는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또한 그런 나 자신마저 기대고 싶을 만큼 멋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더 노력하게 된다. 내가 높아졌을 때, 내가 바라는 사람의 수준도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상상하는 미래의 어떤 연인이나 파트너에 과연 나는 어울리는 사람이 맞는지에 대한 반성도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적인 선순환이 시작된다. 그 지평에서, 가까이 있는 아무나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어진다. 



인생에서 외로움라는 것이 없는 자들의 말버릇을 기억하라. 


"내가 왜 저런 애랑?"

"으…. 내가 왜 저런 애들이랑 놀아야 돼? 차라리 혼자 살래." 라는 아주 차갑고 높은 태도를 간직한다면, 외로움의 근원인 타인에 대한 찬양과 갈구의 습관이 끊어지고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높은 태도는 다시 자신을 향해 채찍질을 하게 된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손을 내밀고 싶은 그 사람에 어울릴 만큼 나 자신은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 되었는가? 누구나 자신있게 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정진하게 된다. 그럴수록 별볼일 없는 사람들은 흘려보내게 된다. 그럴수록 사람의 알맹이와 실속에 관해 사유하고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높은 기준을 가지게 된다.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이 드높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상승하라. 남들이 하강할 때.

전진하라. 남들이 제자리걸음할 때.

자신을 사랑하라. 남들이 타인을 사랑할 때.










나루의 외로움 클리닉 칼럼 시리즈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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