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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16. 2021

청소년학을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들

교육학과 청소년학은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가르쳐 준다

몇 년 전, 여성의전화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점심 시간에 국밥을 주문해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의 한 선생님께서 나에게 교육학을 한 번 배워 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교육학을 배우면서 인간에 대한 관점이 아주 깊어지고 정말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말이다. 존경하는 현장 여성운동가의 말씀이고 워낙 확신에 가득한 말씀이셨기 때문에 인상깊었는데, 그 이후에 대학에서 전공을 여러 번 선택하고 많은 직업들을 고민하면서도, 교사의 길은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교육학이 좋다는 말은 거의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아서, 어차피 혼자서 궁상맞게 사느니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각종 상담 장면에서의 능률을 증폭하기 위해 청소년학과 교육학을 배우고 있다. 둘은 마치 사회학과 신문방송학의 관계보다 겹치는 부분이 많은, 사실상의 쌍둥이 학문이다. 청소년학이라…. 솔직히 터놓고 말하면, 한국사회에 청소년이라는 말이 얼마나 부정적인 뉘앙스인가? 뉴스 검색창에 청소년, 이라고 치면 도무지 우리가 청소년기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믿을 수 없는 세상 인외마경들이 가득하다. 우리 삶도 그랬다. 청소년기가 행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 어렵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청소년 역시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일군의 청소년 권리 활동가들이 성인들에게 그리도 까칠하게 응대하는 것에도 까닭이 있다. 딱히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도, 정중한 대접을 해주지도 않으니까.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숨길 수 없는 정서였으면, 청소년학 1교시에 교수님들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청소년이라고 하면 여러분 솔직히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지요? 하지만 앞으로의 수업을 들으면서 좀 더 나은 관점에서 청소년을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소년 시기의 구체적인 발달과정과 관련 요소들에 관해 배우는 청소년학, 그리고 인간 발달의 모습들을 하나하나 분해해서 미시적으로 관측하고 원리를 정리해나가는 교육학을 배우다 보면, 문득 지금까지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 타인의 행동들이 무수하게 복잡한 발달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선택된 최선의 결과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단지 멍청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했고, 나에게 나쁘게 행동하던 사람을 그저 인격이 못되었다고 탓하기만 하던 나의 제한됨을 돌아보게 된다. 




그 점심 같이 먹던 활동가 선생님 말씀처럼, 교육학은 정말로 좋은 것이었다. 교육학과 청소년학을 배우면 사람이 겸손해지는 면이 있다. 내가 저 시기를 지나왔을 때, 누군가는 나에게 안전과 관용과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내가 남에게 혜택을 받았다면 나중에 그것을 다음 차례에게 줘야 할 때 모른척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성인과 청소년 그리고 심지어 아이의 발달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사실 때문에, 성인의 잘못도 일종의 청소년적인 실수, 내지는 발달상의 문제의 일종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렇다면 성인들의 잘못된 행동은 반드시 악독한 마음씨의 발현이라기보다는 손상이나 미달의 결과로 이해되는 것이다. 




기초성, 적기성, 누적성, 불가역성. 즉, 올바른 교육과 성장발달의 때를 놓치면 다시는 이전의 누락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 발달심리학의 핵심 논점이기도 한 이 인간발달의 원리 위에서, 올바른 도덕과 행동을 발달시켜야 할 어느 한 단계에서 크고 작은 누락이 발생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발달이란, 그리고 건강한 몸과 마음이란, 일종의 수행평가 태도점수 같은 것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체육 선생님은 수행평가의 태도 점수를 이런 식으로 평가하겠다고 했다. 모두에게 100점을 미리 주고, 잘못된 행동을 할 때마다 5점씩 차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기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나쁜 행동도 하지 않으면 100점을 그대로 받고 졸업할 수 있다. 




비록 그 체육 선생님은 청소년들을 수많이 폭행하던 나쁜 교사였지만, 그 '100점의 컨셉' 하나만큼은 아직도 인상깊게 간직하고 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특별히 대단한 수행을 요구하지 않고, 기초적인 수준만을 유지해도 모두에게 '그 만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수준임' 을 인정해 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도점수를 잘 받기 위해 아부를 하거나 발표 경쟁을 할 필요도 없다. 태도란 나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한 것이니까. 




'100점의 컨셉'을 나는 인간의 발달과 사회성에 적용해보곤 한다. 학기초에 주어지는 태도점수 100점처럼, 우리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와 정신건강을 결정하는 여러가지 기본 능력들에 100점씩이 필요하다. 물론 어떤 사람은 운이 좋게 태어나서 어떤 능력들이 200점도, 500점도, 1000점도 넘기도 한다. 그러나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나갈 균형잡힌 각각의 능력 점수로는 100점이면 충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모두는 인성 100점, 사회성 100점, 의사소통능력 100점, 감절조절능력 100점, 충동통제능력 100점을 가지고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누군가가 인지발달이나 사회성의 천재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래서 타고날 때부터 모든 과제를 척척 잘 해내거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행실이 올바르고 착한 것처럼,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 또한 누군가가 적절한 시기에 여러가지 언어를 익히게 되어 다중언어자가 되고, 아주 품질 좋은 교육을 받아서 한계를 극복하고 재능을 계발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 아주 훌륭한 부모와 스승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점수가 5점씩, 30점씩, 80점씩 깎이고는 한다.




그렇게 적절한 적응에는 다소 부족한 기본 능력들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실제 삶에서 타인과의 마찰이나 폭력 그리고 자기 파괴에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행위일까? 나는 그것에 자신있게 예, 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인간 발달심리학적 관점에서, '도덕성'과 '도덕적 능력'은 분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격과 능력은 거의 분리되기가 어렵다. 하나의 행위를 위해서는 그 행위를 위해 습득해야 할 능력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이코패스이다. 충동조절능력의 부족과 공감능력의 부족이 그들을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누군가는 소시오패스처럼 타인의 고통을 다 느끼면서도 무시하고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인간들을 예로 들어서 '선할 능력'과 '선할 의지'의 차이가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규범에 따르고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민폐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받쳐주어야 할 수 있다. '어떤 행위를 한다' 라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과 할 수 있게 마음먹게 해 주는 능력의 결합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타인과 애착 및 헌신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이익과 손해의 지평에서 판단하는 것은, 그보다 풍부하고 현실적이며 친사회적인 판단과 관계를 형성하는 기능이 손상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즉, 올바른 선택은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의 발휘에 불과하며 반대로 나쁜 선택은 올바른 선택을 할 능력의 손상에 불과한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 가령 100점짜리 능력이 있어야 충분히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60점 수준으로 손상되어서 더 잘 해보려고 해도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아주 악한 사람들을 보고 '우리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 라고 한탄하고는 한다.




이런 사람들은 더 낫게 행동할 방법도 모르고 더 낫게 행동할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물론 바깥에서 보면 '너는 의지를 가지지 않아!' 혹은 '너는 마을은 너무 못되게 먹어!' 라고 충분히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굳건한 의지를 가지거나 마음을 착하게 먹는 것도 능력인 것을 어떻게 할 것이며, 누군가는 충분히 충동을 참고 성찰하고 승화시킬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런 자아성찰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버럭버럭 화와 짜증을 내게 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정말로 인격의 파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은 당사자에게도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100점짜리 선량함과 100점짜리 판단력 등을 가질 것이 기대된다는 점은 알겠는데, 그 100점의 기준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인가? 불교 경전이나 유교 경전에서 정해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사회적 필요에 의해 정해진다. 그렇기에 인생의 개별 장소와 상황마다 요구 점수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선량함과 통제 능력에 대한 공통점이 대부분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아마 점수는 몇 점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다지 중요한 포인트는 아니지만, 굳이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지구상의 모든 동일 종류 상황에서의 요구점수의 평균이 100이라고 가정하며 이 글을 썼다.)




범죄자도 스스로 범죄자의 삶을 살겠다고 선택하여서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공감 능력이 없고 신경이 아주 날카롭고 공격적인 사람들도, 자신의 부모에게 제발 나를 이렇게 낳아달라고 빌어서 그런 결함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닐 것이다. 인간의 악행과 타락 등이, 깎인 점수라는 비유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기능 고장 때문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대부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깃든 것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간의 실수와 악행에 대하여 상당히 용서할 수 있게 되고 흘려보냄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거의 대부분 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에서 모든 영혼들이 지구별에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정하듯이, 이미 태어난 우리이지만 만약 몇십 년 전에 운이 없었다면 나도 저렇게 악해지거나 추해질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추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조금은 안쓰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위험을 회피하고 여기까지 살아왔다. 까닥 잘못해서 자라는 동안 사랑과 양육의 결핍에 손상을 받았더라면, 좋지 않은 자극을 당해서 기능 고장이 크게 났더라면, 만에 하나 (확률적으로는 백에 하나 정도임) 사이코패스와 같은 뇌손상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혼돈스럽고 시끄러운 내면과 싸우면서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지도 모르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슬프게 하거나 해쳤을 수도 있었던 일이다. 감사한 일이고, 운이 없었던 사람에게 너무 많은 저주는 퍼부을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처럼, 어쩌면 평균보다 좀 더 많이, 악독하고 못되 처먹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받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회의 악과 싸우고자 했다. 나와 같이 상처받은 사람을 또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 악에는 어떤 단단한 실체가 없었다.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실체 없는 악은 사실 싱크홀처럼 둥글게 구멍이 뚫린 인간의 능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악과 싸운다는 것은 마치 나무옹이처럼 단단한 암덩어리나 뿌리덩굴 같은 것을 폭격하는 일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인간의 결핍된 능력을 사랑과 이해심으로 채우는 일임을 알았다. 그 모든 악이, 텅 빈 인간의 선할 능력 · 공감할 능력 · 이해할 능력 · 감사할 능력 · 절제하고 자제할 능력 · 탈억제를 조절할 전전두엽의 능력 ·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을 조절할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심할 능력이 아니라 능력의 결핍이 악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 통찰은 나에게 아주 약간의 홀가분함을 가져다 주었다. 인간을 악함과 선함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선할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는 관점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나에게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번뇌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고 여전히 많은 분노와 복수심에 시달리지만, 인간이 저지르는 악에 대한 신화적인 의미부여를 멈추고 이 사람이 어떤 능력의 부족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생각해보면서 조금 더 화를 누그러뜨리고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대처하려 한다. 단지 약간의 부족함 때문에 잘못 행동하는 사람의 손상을 사려깊은 대화와 배려의 방법으로 채워넣어 주되, 그것을 채워넣어주는 데 나의 자비로는 부족하거나 도저히 채워넣어질 수 없는 수준의 대형 손상이라면 그 관계에서 조용히 걸어나와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더욱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분노와 상처를 유발했을까? 나의 손상된 능력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능력 결핍이 나도 모르는 상태로 누구에게 손실을 주었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조금씩은 말을 조심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단죄니 응보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제 선-악의 개념은 의미가 없다. 선한 것이 모두에게 주어진 100점이고, 거기서 능력의 결핍에 따라 점수가 자꾸 깎여나가고 피해가 점점 증가할 뿐이다. 누구나 운 없으면 그렇게 나쁘게 될 수도 있었던 인생이 우리 인간이라는 덜 되어먹은 영장류의 아슬아슬한 운명이다. 




그러니 나는 이제는 선-악의 개념을 가지고 규탄과 격노를 용처럼 뿜어내는 것을 거의 그만두어가고 있다. 선량함의 손상이 너무 심각해서 죽음과 고통을 몰고 다니는 운 나쁜 인간들에게 조치를 취하고 또 조치를 취할 뿐이다. 신이 있다면 신을 탓할 텐데, 탓할 신도 우리를 도와줄 신도 죽고 나서 멱살잡이를 할 신도 존재하지 않으니 우리는 하나뿐인 지구에서 하나뿐인 목숨으로 열심히 하나뿐인 목숨을 가진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달려야 한다. 인간의 심리/도덕/인지적 발달이 안정화되어서, 모든 인류가 사춘기를 지나면 거짓말처럼 선량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게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기적 질문'이다) 내 삶의 사명은 과거에는 무슨 거대 악을 타파하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하기에는 그런 희망적인 진화의 단계가 올 때까지 사람들이 다 쓰러져버리지 않도록 시간을 끌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갈 100년은 내가 시간을 끌어 보리라. 다음 100년은 또 우리의 후배들이 시간을 끌 것이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라는 졸업식 노래가 이런 의미였는지. 웃음이 나온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Krystal N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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