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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8. 2021

프로그램 기획자의
3대 필수 기획능력

지식으로 장악하고, 책임을 지고, 목표와 신념을 굳혀라

기획이란 무엇인가? 기획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는 굉장히 많은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하자면 ‘계획에 대한 계획’ 또는 ‘메타 계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실천에 옮겨야 하는 일정한 행동의 시퀀스를 정하고 추진하는 것을 계획이라고 표현할 때, 그 계획들간의 순서 · 관계 · 중요도 · 속도 · 소요자원 · 인적요소의 매니징 · 계획이 존재하는 당위와 철학적인 이유에 대한 해명 등을 관장하는 행위가 바로 기획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기획은 어떤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종료 후에 경비 또는 물품이 정산되고 사후평가가 이루어지고 다음 프로그램의 진행을 위해서 아카이빙이 되는 것까지 전체 과정에 대한 관리감독을 포괄하는 매우 장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기획이라는 행위는 어느 특정한 프로젝트가 그 프로젝트 자체와 행정시스템상/시·공간상 연결되어 있는 인접 조직이나 프로젝트 간에 주고받는 영향이 끝나는 순간까지 가장 긴 시간동안 존속하는 책무성을 가진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담당자는 이 책무성의 존속기간 내에서 자신이 조정해야 할 업무들의 속성과 특성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받으며, 실행조직의 인력과 사물(기물이나 사업비)에 있어서 총괄 관리감독의 책임을 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프로그램 기획자의 역량, 즉 기획능력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나눠볼수 있다. 



첫째. 지식으로 장악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프로그램의 철학 · 목적 · 목표(행동적 지표) · 적용가능한 이론 · 응용하여 적용가능한 이론 · 참가자 특성 · 관련 기관과의 행정적 연계 등에 관련하여 모든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구체적인 분야를 막론하고, 어떻든 프로그램 기획 역할을 맡게 된 수많은 초심 기획자들은 부푼 꿈을 안고 기획회의에 들어설 때 대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멋진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내가 프로젝트를 이끌어 볼 것’ 이라고. 즉, 프로그램은 일종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이끌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기획자의 역할은 ‘적합한 사람을 적절한 장소에 오도록 안내하는’ 역할이다. 


이것은 공항 관제탑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관제탑이야말로 모든 지식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하는 자리다. 실제로 비행기 관제탑이 관할 항공기의 콜사인과 기본적인 정보, 활주로에서 택싱 중인 항공기의 수량과 속도 등을 한 번에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기획자도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제반 정보들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보고 숙지하여서, 인력을 적절한 과업(task)에 투입하는 데에 그 지식을 활용하고 또한 필요할 때마다 담당자를 교육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관제탑이 항공기가 날아다니게 함(계획의 목표)으로써 항공운송을 실현(계획의 목적)하여 인간의 욕구 충족에 이바지(기획의 이념)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관제탑 자신이 엔진을 달고 날아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즉, 관제탑의 핵심 역할(Role)은 자신이 직접 목표를 향해 뛰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전체 상황을 통솔하고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과업에 배치 및 임파워링(Empowering)하여 최선의 역량을 발휘하도록 촉진하고 배치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획자가 팀원이나 관계자에게 이런저런 심부름이나 시키고 본인은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획자는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마땅히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활동해야 하고, 누군가 힘들어야 한다면 자신이 가장 힘들어야 하는 사람이고, 누구보다 바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적재적소에 담당 인원을 배치하고, 일정 · 재고 · 배송일정 등을 관리하고, 담당자나 참여자에게 교육 · 브리핑을 제공하고, 남들이 하다 남은 일이나 못 하는 일을 매듭짓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 반대 상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기획자가 팀원이 할 일을 ‘전담’ 하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기획자가 기획과 함께 포스터도 만들고, 이메일로 홍보물도 돌리고, 마트에 가서 자재도 사 오는 일이다. 10명이 넘지 않는 팀에서 소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전문담당자가 배정되어야 할 일을 기획자가 한다는 것은 이중의 낭비를 의미한다. 첫째는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영입되지 못해서 경험과 보상을 함께 받아야 할 전문가가 낭비되는 것이고, 둘째는 기획과 Program/Project 매니지먼트에 집중해야 할 기획자의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이다. 기획자는 단순노동에 들어가는 힘을 아끼고, 그 힘으로 팀이 지식부족으로 좌초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필요한 정보를 탐색하고 공급해야 한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기획자 자신뿐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프로그램의 전체 청사진과 큰 그림 자체가 본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기획자가 본인이 책임지고 완수할 일이 무엇이고, 팀원에게 분배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지식에서 나온다. 물론 시간관리라든가 일감 분배와 같은 직관적인 노하우가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직감이나 노하우가 프로그램 빌드 현장에서 발휘되기 위하여서는 결국 지식이 있어야 한다. 어떤 공식적/비공식적인 결정을 내리고, 주목표와 보조목표를 설정하고, 어떤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목표를 희생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도,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과제를 위해 어떤 사람들과 어떤 자원으로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위해 어떻게’ 프로젝트를 꾸려나간다는 전체 지식 체계가 명확하게 잡혀 있어야 한다. 수많은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 대학생 프로젝트 팀, 공모전 지원 팀 등이 이렇게 큰 그림에서의 지식적 준비 부족 때문에 한두 명의 열정과 비전만 믿고 진행하다가 그 한두 명의 번아웃으로 난파되었다.



둘째. 책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책무성(Accountability) 이라는 개념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책무성이란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책임은 물론 법적인 책임을 포함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무성은 특정한 권한이나 힘을 가지고 특정한 자원을 소모시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줄 때, 그 누군가에게 선하고 정당한 영향력을 줄 윤리적 책임 ·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의 효율성과 타당성 · 기준과 진행방식의 공정성 ·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 · 전반적으로 신뢰와 신의성실의 의무를 이행하는 책임성 등을 포함하는, 어떤 행위가 ‘건전한 개입’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광의의 영역이다. 

성공회대학교 이형진 교수는 『아름다운재단 기획연구 보고서』(2015, 링크)에서 책무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책무성(accountability)이란 일반적 의미에서 ‘어떤 행동/행위에 대해 응답을 해야만 하는 것’을 일컫는다. 더구나 응답해야 하는 곳이 독자적 권한을 갖는 기관이라면 이들 기관은 잘못된 행위에 대해 교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따라서 책무성이라는 용어는 외부적인 행위자 및 외부적 강제성을 포함하기 때문에 위계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와 함께 책임(성)(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도 일반적으로 책무성과 함께 서로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책무성이 주로 외부적 통제와 조정이라는 것과 관련된 반면, 책임성은 내부적인 것과 관련되며 좀 더 개인적인 차원의 행위와 연관되어 사용된다(Harlow, 2014). 


재단을 포함한 NPO는 특성상 다중적 이해관계자(multiple stakeholders)와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에 이에 적합한 서로 다른 종류의 책무성이 존재한다. 혹은 분석 유형에 따라 ‘설명 책무성’(explanatory accountability), ‘반응 책무성’(responsiveness accountability), ‘법적·제재적 책무성’(accountability with sanction)등으로 구분하거나(Leat, 1988), 혹은 경영 책무성(management accountability), 내적/외적 책무성(internal/external accountability), 승인 책무성(approval accountability) 등과 같이 형태를 특징 지워 설명하기도 한다(Kumar, 1996). 그렇다면 책무성은 어떤 구성요소 혹은 차원(dimension)으로 이뤄졌을까? 우선 이를 다섯 가지 차원으로 나눠 설명한 것을 살펴보면(Koppell, 2005) 다음과 같다. 


· 투명(transparency) : 조직의 행동과 성과에 대한 평가를 위한 데이터 및 관련 정보가 공개되었는가?

· 의무(liability) : 조직 및 조직의 책임자들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성과에 대한 결과를 감당하고 있는가? 

· 통제(controllability) : 주인-대리인(principal-agent)의 관계가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는지 그리고 대리인은 주인이 원하는 바를 행하고 있는가? 

· 책임(responsibility) : 정관 및 내규, 법률, 규칙 등을 준수하고 있는가?

· 반응(responsiveness) :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고 있는가?


또 다른 논자는 이를 네 가지의 핵심적 구성요소로 나눠 설명하기도 한다(Ebrahim & Weisband, 2007).


· 투명성(transparency) : 정보의 수집과 일반 대중의 접근성

· 책임/정당성(answerability, justification) : 행위, 결정 등에 대한 명확한 근거의 제시―선택해서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합리적 질의가 이뤄질 수 있음을 강조.

· 준수(compliance) : 절차와 결과에 대한 모니터링과 평가를 기반으로 하며, 확인된 사실에 대한 보고에 대해서는 투명성이 전제됨.

· 강제/제재(enforcement, sanction) : 위에서 언급한 준수, 정당성, 투명성이 부족했을 경우 가해지는 처분.”


즉 책무성이란 프로그램 이해관계자들의 규율과 통제 방식을 규정하고, 프로그램이 의존하는 근거자료와 근거이론에 대하여 검증하며, 프로그램 진행의 투명성을 제고하며, 이해관계자에게 책임지고, 프로그램이 적절한 지휘계통에 따라 통제 하에 있으며, 성과 의무를 감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좋은 뜻으로 하는’ 사회복지사업이나 종교사업, 개인 자선사업 등이 개인의 선의만에 의존한 채 실제 운영과 사업대상자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서 무책임하거나 매우 위험하게 진행되어 온 뼈아픈 역사들에 대한 반성으로 제기되었다. 


마치 심리상담이 단지 ‘이야기 들어주고 적당히 조언해주는 아마추어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엄격하게 검증된 근거이론 하에 구조화된 프로토콜을 따라 정당한 계약 하에서 진행되는 상담치료 세션’인 것처럼, 교육 프로그램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 역시 사회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정당한 계약 하에 진행되며 자금을 공급해 준 관계자와 영향력을 받아가는 대상자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전문성과 책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책무성’이라고 하며, 책무성을 지킨다는 것은 프로그램에서의 모든 결정과 행위를 건전하고 건설적으로 수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기획자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이다. 팀원들이 자신의 담당업무에 대해 부분적으로 책임지는 것에 비하여 기획자는 기획 전체에 대한 책임을 져서이기도 하지만, 팀원들이 자신의 업무가 전체 기획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정확하게 모를 때에도 기획자만큼은 전체 그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전체 그림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고 또한 업무상 책임자이기 때문에, 기획자에게 가장 높은 수준의 책무성 이행이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 왜 여기에 있습니까?


셋째는 프로그램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기획 참여자들의 이력이나 직업이 기획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때일수록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의 사업 공모전, 학술대회 · 기술대회 공모, 기타 일회성 프로젝트 응모 등에서 기획자와 팀원들이 어떤 의도로 왜 이 자리에 모였는지 명확히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라도 질문해 보아야 한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이력서에 한 줄 더 올리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여기에서 도움이 절실한 사업대상에게 어떤 임팩트를 주려는 진심이 있는가? 향후 유사한 직종으로 취업하기에 앞서 경험을 쌓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팀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차라리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이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이든, 커리어 빌드업이든, 관심 있는 사람 곁에서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든, 나는 모든 의도를 존중한다.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소위 말하는 의도의 순수성이 아니다. 모든 프로그램 기획자나 팀원들이 완전히 헌신적이고 봉사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그게 완전히 반사회적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개인적인 어떤 의도든 상관없다고 본다. 정말로 관심 있는 사람 꼬시기 위해서 팀에 들어와도 나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의도가 확실하게 좁혀져 있고 확고하게 채택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문과 8대 자격증’이며, AFPK · CFP며, 7급공무원 · 5급공무원이며 하는 엄청나게 어려운 관문에 도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꼭 전문가로서의 사명뿐만 아니라 그냥 편안한 노동환경과 많은 월급을 의도하고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숭고하거나 소시민적이거나 하는 의도의 종류가 아니라) ‘자신만의 이유’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다. 


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도전했든 인생 편하게 살라고 도전했든, 그 이유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전문가가 되는 수련을 버텨내고 자격을 수여받았다면, 그 사람의 원래 의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전문가로서의 능력이 중요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곧 선한 것이다. 전문성이 요구되는 모든 위태로운 현장에서 전문성이 올바르게 발휘되고 있는 한, 그 전문가의 원래 의도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일을 되게 만드는’ 전문성 안에 이미 선한 합리성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전문가의 존재 이유는 타인의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선행이며 그것 자체가 봉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노동 전체에 대하여서도 호환 가능한 관점이다. 모든 노동은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그것을 제대로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의존하는 것은 타인이 직업을 택한 솔직한 이유가 아니라 타인의 전문적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프로그램의 기획 · 진행에 있어서도 호환 가능한 관점이다. 왜 이 팀에 참가했든, 프로그램의 공통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으로 협동한다면 구태여 개인적인 신념이나 목표의식 같은 것을 캐물을 이유가 없다. 신념이나 목표의식이 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과 책무성이 일을 추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진심을 검증하지 않는다. 나는 확신을 검증한다. 


프로젝트에 왜 참여했는지? 궁금하지 않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자신만의 이유를 누구보다 굳건하게 믿고, 세분화하여 항상 뒤통수에 꼭 붙들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세세하게 명시된 의도는 무의식 전체를 지배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정한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두루뭉술한 갈망이 있더라도, 그것이 명확하게 좁혀진 의도가 아니라면 쓸모가 없다. 그 가치의 달성을 미리 조작적으로 세분화하여 정의하지 않고, 단순히 ‘평등의 달성’ · ‘차별 혁파’등과 같은 추상적인 대상으로 해 놓는다면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마주쳤을 때 금방 좌초한다. 왜 그런가? 명확한 가치관, 명확한 목표 설정은 단지 프로그램의 종료시에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과 낱낱의 수행 행위들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매 순간에 비교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학부 시절, 내가 작은 학생회 팀을 이끌고 학생회장직을 수행했을 때, 우리 회장단의 슬로건은 ‘우리 대학교 최초의 페미니즘 학생회’였다. 우리 목표는 학생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적 발언과 문화를 바로잡고,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학생회 차원의 성범죄 관련 지지체계를 수립하고, 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관행을 온라인화 시키는 것등이었다. 이렇듯 목적은 굉장히 바람직하게 설정이 되었으나 문제는 목표를 세분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당 이념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취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 행위를 세세하게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세부 프로젝트의 마일스톤(milestone)을 명확하게 세팅하지 않고 그냥 쉴 때 쉬고 힘이 날 때 하는 대로 주먹구구식으로 하다 보니, 우리 팀의 성취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도 알 수 없고 거시적인 목표는 전혀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팀원들은 하나 둘 번아웃 증후군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처럼 명확화되지 않은 추상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노력에 성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전혀 전략적 ·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 학생회 모든 멤버가 페미니스트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범한 직후 강한 지지 분위기를 누리는 선출직의 밀월기간동안 매일 같이 먹고자고 하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이메일을 돌리는 등 우리는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각자가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고 했던 세분화된 목표도 명시적으로 공유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학생회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성취하려는 저마다의 목표에 확신도 강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목표가 세밀하고 조작적으로 정의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것에 확고한 갈망을 느끼겠는가? 우리가 선거캠프에서 야심차게 준비했던 목표들은 상당 부분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당시 학생회의 실패에 나의 실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끝도 없는 안티페미니즘 문화의 반격과 팀원들간의 개인적인 분쟁 그리고 놀랍게도 모든 선거캠프에 자기네 세작을 공수부대처럼 투하해 놓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신도들의 영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타격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목표 설정의 흐릿함이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조직을 매너리즘 안에 표류하게 하고, 리더십을 쓸모없게 만들며, 작은 조직은 즉시 파괴할 만큼 강력한 힘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 서로 질문하고 · 그것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고 · 명세히 기록하고 ·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프로그램 전체를 총괄하는 기획자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믿음과 앎의 차이는 무엇인가? 근거 있는 믿음이 바로 앎이다. 프로젝트의 참여자들은 프로젝트의 존재이유와 내 삶의 의도가 정렬되어 있다는 ‘앎’이 생길 때까지 조정의 기간을 거쳐야 하고, 맞지 않으면 일찌감치 탈퇴해야 한다. 자신이 이 일을 왜 하는지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그 의도를 ‘알고’, 그 의도를 달성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가진다면,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합목적성으로 승화된다. 그렇게 고시 준비를 한다면, 시작할 때의 의도와 상관없이 고시라는 포맷에 의하여 합목적성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어떤 프로젝트에 뛰어든다면, 시작할 때의 의도와 상관없이 프로젝트의 제반 여건과 프로젝트 자체가 가진 목표에 의하여 해야 할 일을 알게 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최적의 방법을 수행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여기에서 헌신하는 이 일이 본인의 의도를 이루는 길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팀에 합류했다면, 지금-여기에서 요구되는 세분화된 일에 전념하는 것만으로도 그 의도는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그 굳건한 확신 이후에 목표의 세분화와 행동과 의사소통의 합리화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신에게 의미있는 일을 할 때, 모든 사람은 가장 총명한 지성과 재빠른 활력으로 깊이 참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프로그램 기획에서 요구되는 기획능력을 세 가지 정도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지식으로 장악하고, 책무성 원칙 하에 책임을 지고, 프로그램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목표와 신념을 세분화하여 명시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결합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비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비전은 프로그램이 구현하는 임팩트인 ‘미션’의 존재 이유가 된다. 당연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관장하는 기획자야말로 비전의 세 가지 측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1. 지식 · 2. 책임 · 3. 달성가능한 구체적 목표와 거시적이고 양심적인 신념의 결합체로서의 ‘의도’. 이것이 내가 꼽는 기획자의 3대 필수 기획능력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6-07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Fabian Irsar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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