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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8. 2021

페미니즘 인성지도 :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이겨야 하는가

유튜브·나무위키·커뮤니티라는 거대한 역교육의 용광로에 맞서서

서프러제트 운동이 한창이던 1913년 6월 4일 영국, 에밀리 데이비슨은 국왕 조지 5세가 참관하는 경마대회 엡섬더비에서 경주로에 달려나갔고 국왕의 말에 치여 사망했다. 데이비슨의 소지품에서는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단체 ‘여성사회정치연합(WSPU)’ 깃발 두 장이 발견되었다. 여성 참정권운동의 험난함을 상징하는 참사였다. WSPU의 활약은 현대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제공했다. 1918년 30세 이상 부동산 소유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고, 이 개혁의 법적인 여파로 원래 부동산을 소유해야만 투표할 수 있었던 21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영국에서 21세 이상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 것은 1928년의 일이었다. 이처럼 정치참여권(참정권) 또는 시민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대략 1950년대까지 진행된 20세기 초기 여성운동의 역사를 우리는 포괄적으로 제1물결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이 시대 사람들의 헌신과 투쟁 덕분에 오늘날 이슬람권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평등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데 전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금방 드러난다. 남성들은 (그리고 젠더 배반적인 여성들은) 여성의 삶을 정치 외적인 방면에서 착취하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성별고정관념, 가부장적인 관습, 성폭력의 문화들은 단지 헌법에 명시된 ‘인간은 평등하다’ 라는 말이나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참정권을 가진다’는 말로 방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임신-출산이 초래하는 노동력 박탈과 경력 단절은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3국처럼 상당히 선진화된 복지국가조차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음이 통계적으로 드러난다. 내가 다른 칼럼에서도 자주 인용하는 ‘연령별-성별 고용률 그래프’를 살펴보면, 모성보호 및 경력단절방지 가족정책을 통해 막대한 사회급여를 투하함에도 불구하고 결혼 직후 여성의 경제참여율은 상당한 손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물며 북유럽국가들처럼 돈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국에, 모성신화 · 여성혐오적 사상 · 가부장주의 · 성별 고정관념 · 강간 문화 · 성착취를 정당화하는 관습 등 여성에 대한 문화적인 공격까지 더해진다면 어떻게 되는가? 문화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 하에서, 여성은 단지 법적인 참정권 이외에 ‘실질적인’ 사회참여, ‘실질적인’ 평등, ‘실질적인’ 안전, ‘실질적인’ 자립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좁은 의미에서 청소년 인성지도와 보다 넓은 의미의 청소년 교육에 있어서, 페미니즘 관점의 교육이 제1물결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성과를 존중하도록 이끌어내는 것 이외에는 엄청나게 어려운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나 동료가 당하는 탈법적이고 초법적인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런 문화적 · 관습적인 추상 개념들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어떤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성교육을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여자의 No는 사실 Yes라고 생각하면 큰일난다! 누군가 너에게 억지로 뭔가를 강요할 때 네가 No라고 하듯이 성적인 순간에도 거절은 거절의 뜻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원활히 진행되어 왔고, 충분히 아이들에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오늘날 남성이 여성의 No를 Yes라고 받아들이게 된 사회적인 맥락이 무엇인지 아니? 우리는 그것을 강간문화(Rape Culture)라고 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성폭력피해여성의 진위를 의심하고 꽃뱀 취급하는 것을 강간신화(Rape Myth)라고 한단다. 이것은 성폭력피해자에게 2차가해를 낳지.”라고 설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주 오랜 시간 학습해야 하는 사회과학의 렌즈, 혹은 직간접적 체험이 주는 충격적인 직관 없이는 이러한 개념들을 이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회사 면접도 본 적이 없는 청소년에게 어떻게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개념을 학습시킬 것인가? 혐오발언(Hate Speech)가 어떤 기전으로 인간 행동과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것은 성인들에게도 꽤 도전적인 일인데, 어떻게 ‘여성혐오(Misogyny)’의 개념을 이해시킬 것인가? 어떻게 협박이나 불안에 못이긴 ‘표면상의 동의’와 내면의 ‘진정한 동의’를 구분시킬 것인가? 섹스(Sex)의 개념조차 정확하게 체화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젠더(Gender)를 이해시킬 것이며 훨씬 더 복잡다단한 논의가 소환되는 섹슈얼리티(Sexuallity)는 어떻게 알려 줄 것인가?

 

심지어, 공공정책과 사회통계라는 대학 수준 지식에 젠더 중립(Gender Neutral)이라는 고급진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여성할당제(여성쿼터제, Gender Quotas)는 어떤가? 사회와 시장에서의 거시적 젠더격차를 억제하고 그에 따른 전방위적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거시 정책이 여성할당제라는 것인데, 무슨 공공정책대학원 출신이라도 되는 게 아니면 이게 왜 필요한지 알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하면 ‘젠더 중립’이라는 고등 개념을 청소년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누군가는 이해하겠지. 영재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러나 교육은 공공정책이고 공공정책은 모든 인간을 위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모든 청소년들에게 그걸 다 설명하고 페미니즘 어프로치에 대한 호응을 이끌어 낸다는 책무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독립운동 같은 것이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지만 아무래도 성공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기획. 


발달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jet)의 용어를 빌리자면 청소년은 이제 막 ‘형식적 조작기’를 지난 사람들이다. 형식적 조작이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대상을 머릿속에서 인지적으로 프로세싱하는 것을 일컫는데, 페미니즘의 이해에 필요한 사회과학적 지식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에는 통계적 추론, 통계적 모델링과 일반화, 패턴 추론/패턴 인식(pattern guess/pattern recognition), 현상을 개념화하고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현실 속에서 다시 그 개념에 해당하는 특이점을 포착하는 등 어마어마한 지적 능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구체적 조작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세상에 받아들이고 싶은 흥미로운 즉각적 자극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청소년에게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지 여성인권을 사우디아라비아 수준으로 짓밟고 남성으로서 부당이익을 챙기려는 의도의 용서할 수 없는 성인 안티-페미니스트들, 민주주의 공동체의 기본 원칙을 파괴하는 반-민주주의자들은 청소년이 접근하기 쉬운 자극적이고 달콤한 미디어 경로를 통해 아이들의 인성에 손상을 주며, 청소년 인성교육의 난이도를 더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 안티페미니즘의 청소년에 대한 접근 전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페미니즘을 일종의 광신적 컬트(Cult) 집단 취급’하는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자들이 꿀 빨려고 떼쓰는 미친 집단이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여자를 믿지 말고 페미들을 두들겨 패야 해” 


놀랍게도 이런 전략은 작동한다. 왜냐하면 이런 근거없는 혐오선동을 무력화하는 것은, 직접 사회생활을 해 보면서 알게 되는 체험적 근거와 학술적으로 알게 되는 이론적 근거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직접 겪어 보고, 정말로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짓을 당하는지 지켜본 30대 이상의 청장년층 남성 가운데서는 의외로 극단화된 안티페미니스트는 많지 않다. 성매매를 정당화한다거나 전반적인 인권감수성이 부족할 수는 있더라도, 10대 · 20대(요즘은 이들을 ‘이대남’이라 부른다) 남성처럼 페미니즘을 통째로 악마화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보기 어렵다. 더군다나 정상적인 삶과 직업 속에서는 남성도 여성들과 계속해서 접촉하고 의미있는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진지한 교육도 받기 때문에 여성 전체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전략에 가장 취약한 그룹은 사회생활 경험이 적은 청소년이다.


하지만 나는 청소년이 악의를 가지고 오늘날 인터넷의 반지성주의와 반동주의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히려 청소년의 선한 마음이 그들을 일종의 홍위병과 같은 모습으로 이끈다고 본다. 청소년은 사회과학적 지식과 판단력에서 아직 성장과정에 있기는 하지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의로운 혈기만큼은 누구보다 완전하다. 청소년 역시 양심을 가진 인간이고 사회에 참여하여 주권자로서 공동체를 올바른 곳으로 이끌고자 하는 진심어린 욕구가 있다. 문제는 그 불타는 의혈의 욕구가 나쁜 어른들에 의해 안티페미니즘을 비롯한 극우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으로 유도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청소년들이 정보를 접하는 채널은 책이나 교사들과의 토론이라기보다는 주로 인터넷이다. 요즘은 거의 모든 청소년이 유튜브 헤비 유저이고, 조금 주춤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시사 문제를 접하고 있다. 거의 검열되지 않는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청소년에게 거짓 정보를 유포하며 역기능적인 행동을 선동하는 무책임한 어른들에게 최적의 장소다. 이것은 사회의 다른 일각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조선일보 등 극우 일간지와 거대 기독교 세력이, 한때 다당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 파시즘과 싸웠던 참전용사들이 의존하는 유튜브와 카카오톡 등의 정보 네트워크를 장악한 뒤, 그들의 정의로운 의혈을 악용해 잘못된 목표를 향해 선동한 결과가 바로 ‘태극기 부대’이다. 민주주의의 영웅들이 정보접근성과 판단력 자원이 취약해진 틈을 타, 반-민주주의적 행동으로 탄핵된 박근혜 前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요구하게 하거나 진보인사들에게 린치를 가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사회 경험도 팩트체킹능력도 축적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반여성주의 홍위병으로 만드는 유튜브의 극우 인플루언서들의 혐오선동과 동일한 악행이다.


그러므로 결국 오늘날 청소년 인성지도의 과제, 그 가운데에서도 청소년을 위한 페미니즘 교육의 과제는 바로 어떻게 청소년에게 사회과학적 판단력과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길러주는 것이다. 즉, 청소년을 대학생과 동등한 수준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즉, 청소년에게 현실을 판단하는 사회과학적 역량을 배양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에게 단순히 젠더 감수성을 길러주려는 목표를 가진 젠더교육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청소년의 여성혐오나 성차별 사상은 근본적으로 여성주의적 시각을 알지 못해서라거나 (소위 말해) ‘페미니즘 책을 안 읽어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죄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페미니즘 도서가 무슨 소용인가? 즉, 여성의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튜브 · 나무위키 · 남초커뮤니티라는 비공식적 재교육 기관에서 그것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재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청소년들은 인터넷에서 단지 페미니즘과 진실의 차원에서 경쟁하는 안티-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지금 상황은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심각하다. 청소년은 단지 ‘다른 관점’ 따위가 아니라, ‘주류의 진실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청소년은 유튜브에서 음모론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여성주의 교육 장면에서 젠더감수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성의 현실이나 성차별 문제의 팩트를 아무리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유튜브 · 나무위키 · 남초커뮤니티에서 그 모든 사회과학적 진실들이 ‘남자 등골 빨아먹으려고 혈안이 된 꼴페미’들의 날조이고 진실은 유튜브에 있다며 프로파간다를 내려찍는 한 청소년 인성교육은 – 페미니즘이 아니라 다른 소수자에 대한 어떤 교육이든 – 좌초할 수밖에 없다. 마치 학교에서 현대 생명과학과 현대 천문학을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놓아도, 교회에서 ‘아 그거 다 거짓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생물 창조하셨고 지구는 6,000년 전에 창조되었어요 할렐루야 아멘’ 이라고 말해버리는 한 그 모든 교육들이 즉시 무화되는 것과 같다. 


청소년교육이 이러한 반지성주의와 음모론을 무력화하기 위하여서는, 청소년을 단지 정보 A에 대하여 길항적인 정보 B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가령 반여성주의에 대하여 경쟁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정보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사실이 무엇인지 스스로 획득하고 음모론 자체에 저항하는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청소년이 직접 자기 손으로 KOSIS 정부통계를 뜯어보고, 사회통계란 무엇인지 감을 잡게 하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일반화된 경로에 대하여 교육받고, 그 경로 중 하나로서 성차별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스스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할 수 있게 하고, 타인의 가설에 대하여 경쟁가설을 세워서 비판하는 훈련을 제공하고, 통계학에서 관찰점수와 추정된 진점수의 관계처럼 관찰되는 일관된 현상의 흐름과 그 일관된 흐름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일반화된 경향’의 존재 파악에 대한 훈련을 제공해야 한다. 


모든 인성교육의 기획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반지성주의를 분쇄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을 2000년대 수준의 주입식 성교육으로 하면 그것 자체가 반여성주의 음모론의 먹잇감이 된다.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반지성주의를 분쇄하는 방법은 유일하게 딱 하나이기 때문이다. 강한 개인의 강한 지성을 훈련해내는 것. 모든 주장을 사실이 아니라 가설로 받아들이고 혼자 힘으로 분석해내는 체험과 용기를 주입하는 것. 그것이 단지 올바른 사상을 주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훨씬 더 안전하다. 사실상 이미 적잖이 보수적이고 온건한 수준의 페미니즘 교육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역교육의 용광로인 유튜브·나무위키·남초커뮤니티에 맞서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청소년을 사회과학자로 육성해 내는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6-08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Jean-Philippe Delbergh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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