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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18. 2021

인간은 무슨 존재다?

분별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

'인간은 무슨무슨 존재다' 라고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그런 주장을 접했지만, 대부분은 충분한 반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례를 확장시켜서 적용하는 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사람에게 쓴맛을 본 사람들은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다" 그리고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똑같이 "인간은 믿음을 주면 보답하는 존재다", "사람은 원래 악한 존재다" 라고 말합니다. 인간을 보편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이런 문장들은 도리어 사람들마다 서로 충돌합니다. 이래서야 보편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충돌들을 아우르는, 좀 더 반례 없이 보편적인 문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분간할 수 없는 존재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분간할 수 있었으면,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고 드러난 현상에서 거짓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일반화된 서로 상충되는 문장들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실하게 선하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서 확실히 악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든지, 확실하게 악하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서 확실히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든지, 본디 악하기도 선하기도 하다는 증거를 찾아내어서 하나의 가능성만을 보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든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후회와 경고가 담긴 문장들이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자신을 배신할 사람들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말할 동기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믿음을 주면 반드시 회개하고 보답하는 존재일까요? 인간 행동의 미래를 알 수 있었다면 '믿음'까지 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니까요. 알면 왜 믿겠습니까?


사람은 분간을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시키려고 합니다. 일반화는 분간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줄여주고,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하는 간편한 일반적 이론을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배신당한 사람이 인간을 일반적으로 배신하는 존재라고 규정할 때, 상처받은 사람이 인간을 상처주는 존재라고 규정할 때, 사실 그것은 인간 일반에 대한 참된 연구결과라기보다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행위입니다. 내가 단지 운이 나쁘거나 내가 오판해서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란 원래 본질적으로 아프고 못 믿을 행위라는 논리가 그 안에는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어느정도는 남탓이고, 어느정도는 자기용서입니다. 사건의 발생원인을 나의 선택가능성이 아니라 타인의 일반화된 속성에서 찾으면 내가 나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인간에 대한 통합된 일반화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분간을 못하는 존재입니다. 어느 수준에서 그런가요? 대부분의 '중요한' 수준에서는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분간을 정말 잘 하는 분야도 있습니다. 그런 분야들은 우리가 인지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간했다고 말하지조차 않습니다. 예컨대 인간은 수평을 분간할 수 있나요? 아무도 지금 내가 서 있는 땅이 반듯한 수평인지 다소 기울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분간을 '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분간되고 따라서 행위로서의 분간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 상황도 있습니다. 메니에르병과 이석증처럼 속귀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가 평소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평형감각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혹은 술에 만취하면 평소에는 자동적으로 하던 일들이 상당한 '분간'이 필요한, 부하가 걸리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간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 - 예를 들면 인간의 배신이나 믿음직함을 예견한다는 것 - 에 대해서 우리는 분간을 못 한다고 봐야 합니다. 분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접근하여서 분류해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그런 욕구가 있다고 말하고, 그런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어서 적어도 1만년째 그것으로 논쟁중입니다. 모두가 분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분간이 안됩니다. 그럴 능력이 없거든요.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끝장낼 사람이 나왔더라면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땅이 평평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하늘이 파랗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색을 분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거의) 없고, 따라서 하늘은 파란색이라는 문장에 대한 분간과 논의와 논쟁도 나타난 적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인간은 믿음직한가, 믿음직하지 못한가? 라는 물음은 적어도 10만년째 제기되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인간의 수가 500억에서 1000억 정도가 됩니다. 아무도 이 물음에 확실하게 답하고 모두를 침묵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동안의 역사에는 결론을 통일하지 못하고 견해차이를 좁히지 못해 적어도 건설적인 논쟁일지라도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가 맞는가, 공산주의가 맞는가? 아무도 모릅니다!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가설을 타인들이 강제로라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전쟁과 폭력을 일삼았던, 남들이 직관적으로 다 하는 '양심'의 분간 능력도 없던 자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자들만 분간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는 어른들, 드높은 뜻과 숭고한 정신을 가진 자들도 세세하게 늘 분간에 실패합니다. 우리 세대의 거의 모든 페미니즘 관계자들이 여성학 입문도서로 선택하는 전설적인 책 『페미니즘의 도전』(2005, 2013 개정증보)을 집필하신 것으로 유명한, 존경하는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께서도 한겨레 칼럼에 '갠지스강 강물은 세균을 죽여 부패를 방지하는 광물질로 가득해서 콜레라에 안심이다' 라고 기고한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실이냐고? 사실이다." 라고 확언까지 하였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 칼럼은 아직도 게재되어 있는데(링크), 이렇게 비과학과 신비주의로 빠지기 쉬운 진보 · 좌파인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주는 것만큼은 훌륭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페미니스트 문화에서도 요즘 계속해서 MBTI를 가지고 논다거나 별자리 운세를 보는 등 분간 없는 행동이 유행하고 있는데, 정말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페미니즘처럼 윤리적으로 옳은 가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유사과학을 즐겨도 된다는 면죄부는 아닙니다. 지금 용서한 유사과학은 언젠가 힘과 패거리의 논리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옵니다. 남자는 근본적으로 우월하다는 남성우월주의야말로 비과학입니다. 그 비과학을 갈아버리기 위하여서는 내가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데, MBTI 믿고 별자리 믿고 사주 보고 타로 보는 수준의 지성으로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자꾸 페미니즘 진영이 남성우월주의 비판을 혐오의 관점에 국한하여 대응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혐오는 문제이지요. 그런데 어떤 말이 헤이트-스피치라는 주장은, '응 그거 혐오 아니야' '니가 기분 나빠서 그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사실 팩트거든' 이라고 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것은 이런 이유로 팩트가 아니며, 따라서 너는 팩트를 참징하는 유사과학자이자 거짓말쟁이' 라고 말할 때만 모든 혐오발언과 남성우월주의를 파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피해자가 얼마나 주관적으로 피해를 받고 주관적으로 기분이 나빴는지 말하고 그 대상을 혐오로 지정하는 것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범죄 및 혐오피해자의 신체정신적(psychosomatic) 타격은 주된 보건학적 문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심각한 손상이지만, 그것을 완전히 거짓말로 취급하거나 과대포장된 엄살로 취급하는 소수자 혐오자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음모론자입니다. 여자는 다 김치녀 거짓말쟁이이고 가난뱅이는 자기가 원해서 쪽방촌에서 살게 되었다는 정신나간 음모론이 바로 극우-소수자혐오자 프로파간다의 핵심입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을 입닥치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겪을 수는 없는 주관적 체험을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그들은 공감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공감능력을 조롱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편견과 공격성을 보편성에 대한 진술로 포장하는 인간들의 난동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사실관계의 수준에서 해체시키고 이론적 근거의 수준에서 해체시키며 통계학적 증거의 수준에서 해체시켜야 합니다. 


그런 막중한 책임이 모든 진보인들에게 있습니다. 열등감과 박탈감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 실체를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좌절공격성과 굴절혐오에 대한 끝없는 주지화를 통해 여성혐오에 과학이라는 껍데기를 덮어씌우려고 하는 불쌍하고도 괘씸한 재교육의 대상들이 바로 안티-페미니스트입니다. 벤 샤피로나 조던 피터슨 같은 쓰레기들을 멘토로 삼고 있는 대학교 헛다닌 청년 신우파들입니다. 거의 대부분 남자들이지만 이 문제를 푸는 데 성별을 강조하는 것은 별로 유용하지 않습니다. 여혐은 소프트웨어(정신)의 문제라서, 성별이 별로 상관없는 교육으로 풀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무엇으로 재교육 합니까? 남의 인생은 안중에도 없는 저런 소인배 열등감 덩어리들에게 '오 그건 타인에게 상처를 주니 하지 마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이 숭배하는 과학이 사실 어떤 진실을 가르키고 있는지 과학의 언어로 다시 돌려주어야 합니다. 차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최고의 해답이며 소수자는 열등하다는 거짓말을 분쇄하는 건 '타인의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과학교육적 행위'입니다. 첫째도 과학, 둘째도 과학, 셋째도 과학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책임있는 과학적 업무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타로를 보러 가신다고요? 사주명리학이라고요? 별자리라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런 분간 없이 미신과 주술을 신봉하는 원시인들은, 내가 인류 문명에 먹칠한다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느끼는 정도의 분간은 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과학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노동계급 무력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의회 바깥 좌파들, 김일성 백두혈통 족보에 대한 환상을 못 버린 NL 좌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사회과학 학계를 모두 자본가의 사주를 받은 음모론자로 치부한 채, 자신만큼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버린다면 희망은 없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 담론, 기본소득 담론, 탈원자력발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글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맞는지 틀린지는 저도 최선을 다해 분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과정에 충실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어떤 신규 담론을 견지하는 자들이 기존 경제학 · 행정학 · 사회통계학에서의 꾸준한 비판에 그에 상응한 기술 수준으로 맞서지 아니하고 남들은 다 거짓말쟁이이고 아무튼 우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태도만큼은 누구에게 훤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사실 자신이 분간할 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례는 차라리 나은 것입니다. 분간의 영역을 완전히 떠나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 『1987』의 모티브가 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박종철 열사가 고문사하면서도 목숨과 바꿔 지켜주었던 운동권 선배가 누구였을까요? 그는 박종운이라는 사람입니다. 박종운은 한나라당(現 극우정당 '국민의힘' 전신)에 가입해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합니다. 박종철을 살해한 자들의 정당과 함께한 것입니다. 그의 한나라당 입당에 박종철의 유가족들은 큰 상처를 받고, 사람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전직 민주화운동가들도 이것은 도저히 '쉴드 쳐주지' 못했습니다. 단지 운동권의 신념을 숨기고 생존을 위해서 그랬느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는 친-이명박 계열 뉴라이트로 변신해, 쌍용자동차 파업을 범죄라고 발언하는 등 극우 인터넷매체 『미디어펜』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것은 분간을 한 것입니까, 만 것입니까? 분간을 포기한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마음,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게 당연하고 경쟁에 도태된 자들은 낙오되는 게 당연하며, 능력이 없는 인간들은 세상이 얼마나 발전하든 간에 인간으로서의 쉐어를 요구하지 못하고 잔여주의 사회복지에 의존한 채 최소한의 생활수준에서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의 양심부터 분간을 하여야 합니다. 분간을 못 하는 무능력에도 수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하여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일반화는, "인간은 분간을 못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분간을 쉽게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분간을 쉽게 할 수 없을 때, 분간이라는 도전에 직면할 때, 우리는 그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 유일한 빛의 동앗줄에 의지합니다.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분간을 못할 때 분간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수단, 그러므로 분간을 못 하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의지해야 할 수단. 그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올바른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올바른 마음이 현실판단에 대한 분간 부족 때문에 의미없이 흩어져버리지 않을지 성찰해야 합니다.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방법론(과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자신의 과학이 잘 작동하더라도, 자신이 왜 직관과 직감이라는 멋진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고 과학이라는 복잡한 장치를 사용해야 하는지 늘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맨몸과 맨감각으로는 어떤 것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멈춰버리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자동차를 정비하듯이, 우리가 의존하는 과학이 갱신되지 않아서 무용지물이 됨으로써 우리가 다시 원시인과 다를 바 없는 분간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학 역시 맹종하지 말고 과학이라는 자동차를 과학적방법론이라는 정비도구로 늘 점검하고 보수해야 합니다. 인간은 분간하지 못한다는 유일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맨몸 상태에서, 박사님과 원시인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분간 없는 맨살을 보호하기 위하여 과학의 넥타이를 꽉 매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Michael Longmir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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