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이 보고 싶다

오래 쓰는 육아일기

by 강물처럼


산이는 친구들하고 친구 만나러 서울에 갔다. 2박 3일이나 되는 일정이라 저도 말을 꺼내기 미안했던지 엄마한테만 말해놓고 새벽에 - 나 잠든 사이에 - 출발했다. 속이 불편했지만 겨울방학 동안 부지런히 보충수업받으러 학교에 나간 것을 알기에 따로 어깃장을 놓는 것도 모처럼 놀러 가는 아이에게 좋을 거 같지는 않았다. 놀면서도 집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던 옛날의 내가 지금의 산이와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이런 것도 하나의 '보상심리'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산이가 돈 이야기도 하지 않고 갔구나·····.

전교 1등은 학교에 나오지도 않는다며 서울 유명한 학원에 아예 방학 동안 먹고 자면서 공부하러 갔다고 그런다. 저희 반 아이들이 너무 적게 나와서 다른 반에 가서 수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몇 명이나 보충수업받는데?

5명이 채 안 되는 날도 있단다. 15명 정도 신청을 했는데 결석하지 않고 수업을 지키는 아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방학에도 보충수업을 받으러 가는 것이 잘못인지, 수업을 신청하고 결석하는 것이 잘못인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늦잠 잘까 봐, 산이가 수업을 신청한 이유는 그거였다. 너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빠는 궁금하다.

그런 집은 어떤 심정일까. 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인데 자식이 의대를 가기에는 조금 부족한 입장은 지금 2024년 현재, 어떤 기분일까. 아름다운 결사結社는 보이지 않고 위협적인 결사決死가 힘 있어 보이는 곳에서 내가 목격하는 모든 구호는 죽음을 무릅쓴다. 그래야만 어느 쪽으로든 결단이 날 것이라는 여기에서의 삶의 방식이 나는 늘 벅차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 더구나 이 사람들하고는 그러고 싶지 않다. 한쪽에서는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데 한쪽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그런다. 장사꾼에게 장사의 묘를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물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그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사회가 분노조절장애를 앓지 않기를 바란다. 조절에 실패하면 음식도 먹지 못하고 살도 빼지 못하고 사랑도 망친다. 하물며 나라가 남아날까. 이념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빈부의 차로 솥이 넘치고 지역감정이 끓어오르는 데서 누가 살고 싶을까. 그런 땅에서 태어나는 생명은 과연 축복일까. 아무리 우리가 차분하려고 해도 위에서부터 물을 흐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꼴사납다. 부러워할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운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술이 만연하고 있다. 산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너는 공간에 이런 그림을 그리고 살면 좋겠다 싶었다. 화가는 꿈꾸지 못하더라도 이 그림을 그릴 때 집중하며 떠올렸을 거기를 네 손으로 설계하는 일은 얼마나 근사할까, 잠시 상상 속을 거닐었다.

돌아다녀라. 아빠하고 엄마가 일할 수 있을 때 더 돌아다녀라. 집에 오면 밥이 되어 있고 이불이 깔려 있고 방이 데워져 있으니까 너는 돌아다녀라. 거친 것도 채로 거르면 보드라워진다. 집은 그렇게 가는 채가 되어 지친 너를 세세하게 살필 것이다. 가루를 간직한 덩어리가 되어라. 세포 하나하나에 상쾌한 공기를 불어넣어라. 오르간 소리처럼 높아져라.

강이는 내가 보내준 지리산 둘레길 4코스를 읽지 않았다. 너, 나중에 내가 노벨상 받으면 그때 눈 크게 뜨고 부탁해도 아는 척 안 할 거니까 알아서 하라고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빠가 읽지 말라고 그랬잖아! 따진다. 내가 언제 읽지 말라고 그랬냐며 눈을 흘겼다. 안 읽어도 된다고 그랬지. 그게 그거란다. 그게 그게 아니라고 일러줬다. 엄마한테 심판을 바라는 눈빛이다.

'안 읽어도 된다는 말은 읽으라는 말보다 더 기대하고 있다는 말이지, 네가 읽기를.'

엔리오 모리꼬네 할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 그때 신세 많이 졌다고 다들 자리를 권할 것이다. 상상을 한다. 강이가 쓴 글들은 그 할아버지 음악을 닮았다. 아침에 들으면 영롱하고 오후에 들으면 따스하며 밤에 들으면 빛난다. 맛있고 정이 가고 나누고 싶은 요리가 된다. 나는 이것저것이 점점 귀찮아지고 있다. 그런데 아빠는 점점 궁금해지고 있다. 산이하고 강이가 어떤 춤을 출지, 어떤 노래를 부를지, 어떤 여행을 하고 있을지. 어떤 이야기가 될지····. 그 그림이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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