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어휘와 문장구조는 중의성과 모호성을 띨 수 있다. 최대한 걷어내기 위해 적확한 낱말을 선택할 수 있는 어휘력과 적절히 나열할 수 있는 문법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풍부한 어휘력과 바른 문법을 갖춘 말과 글이 늘 바람직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몇 안 되는 어휘로 앞뒤 안 맞는 소리를 하는데 마음을 움직이는 말과 글이 있다. 뜨뜻한 손바닥으로 아픈 곳을 지그시 누르듯 인간의 속성을 짚어낼 때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고 섣불리 판단하기 힘든 것을 정확히 옮기려 들면 도리어 허상을 만들 수 있다. 중의적이고 모호한 표현이 울림을 준다. 이때 수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자유를 누리면 된다."
유선경 작가의 『어른의 어휘력』 179 페이지를 읽으면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방금도 나는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고 써놓고 Backspace를 9번이나 눌러서 그 말을 지우고 다시 썼다. 고마운 '마음'이라고. 갈수록 글이 편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처럼 돌아갈 시간, - 제대로 모양을 갖춘 퇴고가 아니더라도 - 유턴할 수 있는 시공간이 주어진다는 점이다. 글을 쓸 때와 달리 말을 할 때는 옴짝달싹할 수 없다. 말을 해야 할 무대가 크면 클수록 속도가 높아가는 도로에 나와버린 심정이 된다. 앞으로만 달려야 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인상에 남은 풍경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역시 떠오르는 곳이 없다. 그야말로 전방 주시 의무를 태만히 할 수가 없는 곳에서는 잠깐의 방심이나 해찰이 허용되지 않는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할 때 고속도로만큼 철저히 사람의 주의를 요구하는 곳도 없을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달리는 곳이니까. 너무 비약이 심했나?
이 새벽, 내 오른편에서는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거기 구간단속 카메라가 새로 설치되었던데.... 여기 앉아서 속도를 가늠한다. 소리에는 많은 것들이 묻어 있다. 방금 지나간 것은 트럭이고 무거운 짐을 실었다. 소형차도 몇 대 지나가는 사이, 내 등 뒤에서는 희미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멀리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종소리인 것은 알겠다. 소리는 배경이 된다. 음악이 영화의 배경이라면 음성은 사람의 배경이다. 고요는 하나의 소리다. 소리 없는 소리로 연주되는 공간, 시간을 듣는 사람은 고요하다. 눈이 내리는 소리, 바람이 소나무 사이에 머물다 일어서는 소리, 다섯 번째에서 여섯 번째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나던 모든 것들의 소리가 그립다. 소리를 그리워할 줄 모르고 말을 잘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스님이 있었고 그런 신부님을 보았다. 그런 할아버지, 그런 노영희 씨가 세상에 있다. 그 사람들 앞에서는 글도 쓰지 않고 말도 허전한 것만 같아서 가만히 응시한다. 그 시간이 오래여도 짧게만 흐르는 것이 꼭 며칠 안 남은 봄날 같고 가을날 같다. 소리와 말이 리듬을 만들면 그게 참 듣기 좋다. 아, 경적이 울렸다. 누가 참지 못하고 울렸을까. 리듬은 움직임이고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니까, 무수히 많은 생명을 낳고 있는 고요한 새벽이다.
179 페이지는 '모든 어휘와 문장구조는 중의성과 모호성을 지녔다.'로 맺는다. 나는 거기에 빗대 '모든 새벽은 중의성과 모호성을 지녔다.'라고 말한다. 과연 새벽만 그럴까 싶다. '나는 중의성과 모호성을 지녔다.' 이처럼 신랄한 선언이 세상의 표피 아래에서 잠재하고 있다. 철학과 도덕, 과학과 법률, 종교와 생명, 위대할수록 상호보완적이다. 그것이 울림이다. 소리가 되고 노래가 되고 말이 되고 글이 되고 사람이 된다. '말'을 하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동영상 제목을 정하라고 그랬다. '봄에 취한 청년', 내가 길거리에서 어깨춤 추는 것을 산이가 찍고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 영상 자체보다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나는 봄에 취했을까, 술에 취했을까.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내가' 달라진다.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둘러싼 시공간이 변화한다. 인식의 변화까지 흘러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누구는 말의 내용을 문제 삼고 누구는 말의 뜻을 음미한다. 맛은 복합적인 것을,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강이야 오늘 뭐 하고 지냈어?"
"바빴어."
"뭐 하느라 바빴어?"
"숨 쉬느라."
옅은 천식이 있는 강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겨우 신학기에 학부모 상담에 갈 때 잊지 말고 그 이야기를 전하라고 일러주는 것이 전부다. 강이가 먹는 천식약은 전부 아내가 챙긴다. 아내는 우습다며 강이 이야기를 전하는데 나는 어딘가가 시큰했다.
"어떤 숨은 편한데 어떤 숨은 갈갈하고 어떤 숨은 작고 어떤 숨은 커지다가 마는 풍선 같아서, 잘 듣고 있어야 하거든."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하라고만 하는 나는 말을 잘할 줄 모르는 사람임에 분명하다. 오늘에서야 나는 내 빈약한 말솜씨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 줄 알겠다.
'내가 그렇게 말했던 가요?'
'저는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요즘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저 말은 기분 나쁘게도 그 끝이 나를 향한다. 나도 어디 가서 '사직'에서 야구 봤다는 말을 떠들 것이다. 어떤 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이 정도는 된다고, 아니면 할 줄 안다고 연출할 것이다. 그러고서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찾아보라고, 가져와 보라고 떠들 것이다. 고속도로 위에서 칼치기, 새치기하며 얌체처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남들이야 상관없이, 기분 나쁘면 너도 달려, 그러면서.
말맛을 아는 이에게 편지를 쓴다. 소리를 아는 이에게 안부를 전한다. 차들이 많아지고 밖은 밝아지고 새벽은 채비를 서두른다. 아침이 오고 있다.
* 홍시 맛이 난다 - 드라마 대장금에 나왔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