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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3코스. 첫째 날

가만있어도 발이 떨려

by 강물처럼


2020.0501 - 둘레길 3코스, 첫날



지난 4월 1일 부안 마실길에서 우리는 즐거웠다. 그날을 기록해 놓은 일기를 보면서 웃고 있다. 그리고 어제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제, 4월 마지막 날, 부처님 탄신일에 우리가 짓고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



코로나19로 세상이 온통 난리였던 4월을 한적한 곳에서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 고맙다. 절에는 가지 못했지만 우리는 부처님 마음을 본받듯이 걸음을 걸었다. 자외선 지수가 높아서 모두 모자를 하나씩 쓰고 걸었다.



모처럼 맞는 연휴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궁리를 했다. 제주도에도 가볼까 하고 하늘길이며 바닷길을 알아봤다. 강이가 제주도 못 가봤다고 푸념하는 것이 귓전에 메아리처럼 울렸으니까. 마음은 그런데 현실은 늘 우리와 따로 노는 깍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늘은 막혔고 배편은 예약이 거의 찼다. 게다가 다른 부대 비용이 부담스러워 또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는 그렇게 '다음에'라는 목적지가 되었다. 그동안에도 얼마나 '다음'이라는 말로 제주도를 얼버무렸던가.



연휴, 지금의 내 일상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거의 연휴의 연속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모두가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좋다. 연휴에는 나도 헐렁한 사람이 된다. 책을 읽더라도 더 느슨해지고 음악을 들어도 여유가 샘처럼 솟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어디든 가야겠다 싶고.



우리는 지리산 둘레길에 왔다.

어디에 있는 무슨 무슨 길, 그런 식으로 길을 바라보지 않기로 했던 다짐이 모처럼 떠올랐다. 언제부터 나는 걸었던가. 얼마나 걸었던가. 그때마다 동행했던 인연들이며 구름, 바람은 모두 잘 가고 있는가. 둘레길에 서면 먼 옛날과 먼 훗날이 교차하는 어떤 역에 서있는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숲의 역, 여기는 몇 호선일까.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주시길 바랍니다. 산이와 강이에게 그 말은 어떻게 들리냐며 묻고 싶어지는 역. 안전선 안이 안전할까, 밖이 안전할까. 숲이 있는 길, 길이 있는 숲에서는 장난이 난다. 눈높이가 고루 비슷해져서 생각도 말도 행동도 평균치가 된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 쪽으로 다가가고 산이와 강이는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앉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한 뼘 가까이, 해 뜨는 것도 해지는 것도 그렇게 보고 싶어 진다. 길에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길 위에 두 발로 서서 앞을 향하고 뒤를 돌아본다. 그 순간에 뿌리로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물을 빨아올린다. 나도 자라고 우리도 자란다. 어린 이파리들이 연두색으로 흔들리는 둘레길 3코스, 실개천을 따라 몸을 풀고 있었다.



모든 길에서, 그것이 내가 가진 욕심이다. 그래서 다하지 못할 것을 안다. 게으른 것은 아니지만 하냥 느긋한 것과 느린 것을 곁에 두고 지내는 사람이라 인생이 짧을 뿐, 내 탓은 아니다. 봄인가 싶으면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바람과 비는 봄 영화에 사연처럼 등장해서 여주인공을 웃겼다 울리고 사라진다. 봄은 영화榮華, 꽃은 여자. 인생은 봄, 우리는 꽃. 길은 멀고 우리는 짧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기로 한다. 다 가볼 길 없는 길을 가기로 한다. 내 뜻을 오래 숨겨두고 우리 아이들이 자랄 때를 기다리는 나무가 되기로 한다. 지금은 제비꽃처럼 지내는 시간, 우리는 자꾸 속닥거리면서 봄으로 간다



3코스 인월에서 금계 가는 길에 나선 것이 오후 1시 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쥐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나이는 따로 없을 테지만 지금은 특'별'히' 아이스크림이 세상에서 제일 좋을 시절, 천국을 맛본 아이들은 어려운 거, 힘든 것, 하기 싫은 것을 한꺼번에 대적할 기세다. 해치우지 마라, 얘들아. 우리는 오늘 이 길을 다 가지 않을 것이다. 내일도 쉬는 날이니까. 내일도 길이 여기 있을 거니까.



늘 그 생각이 난다. 벌써 8년이 지난 옛날이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로 부지런히 걸었던 7살짜리 강산이.

투정도 부리지 않고 아빠하고 둘이서만 3박 4일을 지내면서도 씩씩하던 아이를 보면서 그때 나는 많이 감격했었다.

아이가 컸다는 생각에 목마를 태우고 걸으면서도 힘들지 않았던 그 선한 느낌이 아직도 내 양어깨에는 남아있다. 우리가 이렇게 걸을 수만 있어도 사이가 좋은 사이로 남겠다며 흐뭇했었던 날에 찍었던 사진들이 장식장 위에 놓여있다. 8년 전, 지금, 8년 후에는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같은 상념에 젖을 수 있을까.



어제는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에게 기댔던 거 같다. 내가 했던 말은 칭찬 같았고 부탁 같았다. 미안하다는 고백이었으며 고맙다는 인사였다. 영화 같지 않은 삶에서 나는 영화에 나왔던 대사를 잊지 않고 군데군데 써 붙여 놓고 산다. 나를 위해서, 내 삶이 영화가 되지 못하는 것을 탓하지 않기 위해서. 미처 깨닫지 못하면 헤매는 날이 많더라는 말을 해야 할 때, 보여줄 것이 나밖에 없으면 서로 어색하니까. 누군가 삶이 왜 이렇게 슬픈 거냐고 물으면 해 줄 말이 없어서 적어 놓는다. 쪽지처럼, 보물처럼.



'과거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너는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고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 - 라이언 킹'



우리는 너희하고 마흔 살의 나이 차이를 갖고 사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걸으니까 좋다. 엄마도 아빠도 지금 이렇게 걷지 않으면 금방 예순 살이 되고 그러면 그때는 걷고 싶어도 엄두가 나지 않을 거야.

힘껏 우리와 동행해 준 아이들을 치켜세우며 한 단계 높여서 인정해 주고 싶었다.

아빠랑 엄마는 건강을 위해 걸어야겠는데 너희들이 우리와 같이 이렇게 밖에 나오니까 기분도 좋고 다 좋다. 오늘 어땠냐며 두 아이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다.



이제는 부쩍 먹는 양이 커진 산이가 고기를 상추에 싸서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남자아이가 예쁘다. 오늘처럼 2박 3일은 힘드니까 하루씩만 오는 것이 괜찮을 거 같다면서 저도 우리를 돕는다.



"산이야, 연휴라는 말이 우리한테 그렇게 흔하지 않아.

우리는 연휴가 귀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허투루 보내면 아까울 거 같아서 여기 둘레길에 온 거야."



산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엄마가 나 대신 나섰다. 아이들은 상황보다 사람을 믿는다. 그게 아이들의 좋은 점이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한다. 산이는 언제나 그 말과 함께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세상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을 꺼내놓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날을 기억한다. 2012년, 9월 곧 6살 생일이다.



"자동차 엔진은 사람 심장 같은 거야."


"그래? 그래서 중요하니까 안 보이는 데 있는 거네?"



얼마나 고마웠던 말이었는지 너는 알지 못할 것이다. 아빠는 네 말도 그렇게 적었다. 이번에는 내 수첩에, 내 마음 같은 곳에 또박또박 그날을 적어 놓았다.



자주 오고 싶어도 그건 어디까지 우리의 희망 사항일 뿐, 어디 여유가 그렇게 싼값으로 몸을 낮추겠는가.

여유를 그것도 자연을 누리려는 사람은 아무리 비싼 것을 준비해도 턱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내 삶을 대가로 쳐줄 것이다. 돈으로 다 사지 못하는 것이 길을 걷는 일인 것을, 그것도 가족이 '같이'.

값비싼 차를 타고 설령 산속에 들어왔다고 해도 그것은 수박 겉만 핥는 꼴인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오로지 두 발과 고동치는 심장과 땅을 밟는 감각, 물소리, 바람 소리같이 굽은 것들로 노래를 지을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길 가는 이가 지불할 비용이며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다. 그래서 누구나 걸을 수 있지만 아무나 걷지 못하는 것이 길이다. 평생을 함께 다녔어도 다 알지 못하고 마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느끼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다.



어디였을까. 우리가 힘들었던 데를 내년에는 기억할까?

길 옆에 조촐하게 차린 막걸리 파는 곳을 지날 때 정말 어중간했다. 코로나로 한 달을 쉬고 태권도 연습에 나가던 산이는 무릎이 아프다고 했었다. 기운이 넘치는 아이니까 신나게 뛰어다니느라 그런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딱 거기에서 무릎 아픈 것이 도졌다. 한참 걷던 도중이라 난감했다. 거기에서는 차를 부를 수도 없고 그야말로 산골짜기였으니까.

뒤로 가는 것보다 앞으로 가는 것이 그나마 낫겠다 싶어 장항 마을을 목표로 삼았다. 10Km를 걸어보자고 나름 계산해 놓았는데 두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았다. 아이들은 힘들어하고 또 시간이 벌써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빠, 가만있어도 발이 저절로 떨려."



누구나 알다시피 평지와 산길은 차이가 크다. 10km, 많이 걸었다. 고생할 만큼 했다. 돌아가서 쉬자, 아이들아.

버스 정류장에 쉬고 있던 누나들도 더 이상은 못 걷겠다고 멋쩍어하며 손사래를 치더라. 그러면서 너희들 보고 대단하다며 엄지를 들어 보이더라. 정류장 뒤편으로 언덕을 한참 올라야 하는 참이었는데 아빠는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잘 멈춘 것 같다. 우리는 절대로 욕심부리면서 걷지 말자. 힘든 일도 많은데 걸으러 와서 찡그리지 말자. 즐겁게 걷기로 하자.

엄마는 길이 고즈넉해서 좋다고 그런다. 나도 알지,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니까.

매력 있었어, 길이 차분하니까 사람도 그래지더라. 늦게까지 남았다가 떨어지는 산벚나무 꽃잎도 볼 수 있어서 좋았잖아.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꽃이 떨어지더라.



강이는 여전히 산에서도 질문이 많았다. 미주알고주알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것이 많을까.

이름 모를 꽃들에도 휴대폰을 가져다 대는 강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발을 멈출 줄 아는 마음이 강이에게서 자라고 있다.

아빠는 너 때문에라도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해야겠다. 네가 물어보는 꽃들은 다 예쁘니까. 나도 알아야겠다. 점점 우리는 서로 묻고 답하며 날마다 자라겠구나.

더 신비롭게 더 단순하게 더 재미있게 말해주고 싶은 유혹이 나를 짜릿하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고 함께 자라기로 하자.



저녁 먹으면서 산이가 묻더구나.

"아빠, 맥주 맛이 달아?"

그게 어디 드라마에 나온 대사라면서 둘이 합창한다.

"술이 달면 그날은 인상적이었다는 거래!"



아빠가 그랬지?

오늘은 산이 덕분에 우리가 좋은 구경을 했다고. 산이가 동생한테도 잘하고 건강하게 지내니까 엄마나 아빠가 힘들지 않아서 좋다고.



너는 지금 윗도리는 다 벗고 잠을 잔다. 덥다며 아무것도 깔지 않은 곳까지 굴러가서 자고 있다. 이렇게 보니까 꽤 컸다. 산이야, 금방 키가 클 거야. 키가 많이 크지 않더라도 심각할 것 없다. 네 마음이 잘 자라고 있거든.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마음은 바다도 담을 수 있고 하늘까지 닿을 수 있는 거라서 쉽게 자라지 않는다는 거. 끄덕이며 알게 되겠지. 그런 날에는 오늘이 많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걸었던 오늘이 아빠한테는 항상 '오늘'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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