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에서 금계 20. 5 Km를 걷고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났다. 첫날 걷기 시작해서 배너미재를 넘어 장항 마을에 도착했다. 내일을 위해서 3코스 절반 10km를 걸어둘 생각이었지만 아이들이 힘들어했다. 산이는 무릎도 아픈 것 같아서 정말 '내일을 위해서' 우리는 거기에서 멈췄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먹었던 옥수수는 따뜻하고 달았다. 우리는 인월로 다시 돌아왔다.
한가한 시골 버스에 앉아 저녁 햇살을 받으며 모든 것이 알맞게 보였다. 시간도 햇살도 피곤함도 마음도 다들 잘 벌어진 밤송이처럼 실하다. 봄에 가을, 오후 6시 무렵은 언제 어디서든 가을 같아서 좋다.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묻지 않고 밥상에 앉으라고 권하는 어머니 같은 인상이다. 차창으로 불어오는 나무와 풀들의 연두 내음이 사람을 맑게 내리는 듯하다. 바람에 날리는 빨래가 되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아쉬운 대로 손바닥으로 바람을 받았다. 손가락을 펼치면 바람이 그 사이를 지났다. 지면을 떠서 날아가는 느낌이 좋았다. 계곡을 따라 공중 촬영을 하는 드론이 연상되었다. 잠시 날았던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서 비행기를 탄 듯하다니 거짓말도 자꾸 하면 는다.
버스도 탈 수 있어서 좋았던 첫날, 4시간 걸려 7Km 걸었던 우리가 어쩐지 대단한 일을 하나 해낸 것만 같아서 뿌듯했다. 잠들기 전에 긴 일기를 썼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첫째 날, 늦은 밤까지 상쾌했다. 적어두고 싶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뿐한 것도 무심한 것도 따라 해 본다. 그리고 걸음으로 옮긴다. 자유로운 걸음, 가벼운 걸음, 무거운 걸음, 우중충한 걸음을 걸어본다. 빨리도 갔다가 한눈팔고 해찰도 하면서 천천히 가기도 한다. 밖에서는 다양할 줄 모르면서 안에서는 이것저것을 시도했다. 낮에도 걸었지만 밤에도 걸었다. 혼자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빈집처럼 세상을 걸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는 이렇게 걷는 날을 상상하지 못했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날, 아들과 딸이 떠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길이 있을 줄 전혀 몰랐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자유를 비행한다. 흰 종이가 된다. 그 위에 쓰일 시를 기다리며 혹은 소설의 첫 문장을 기다리며 오래 날아가고 있다. 첫사랑을 하고 있다.
고개를 한자로 쓰면 상(峠)이라고도 쓰고 령(嶺), 치(峙), 재(岾), 부르는 이름도 많다. 아래와 위가 맞댄 곳, 저 글자가 마음에 와닿았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한 글자씩 땅에 적어줬다.
배너미재를 넘어가면서 우리가 마셨던 그 시간들은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키워낼까. 산그늘이 펼쳐지는 장항마을 키 큰 소나무 옆에 서면 한 생각이 찾아든다.
'눈 내리는 풍경은 여기에서'
언젠가 눈을 기다렸다가 꼭 거기 서서 바라보리라. 나는 또 헛된 약속을 하고 말았다. 소나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첫날은 장항마을에서 돌아왔고 둘째 날은 장항마을에서 출발했다.
오르막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오르막에 오른다. 삶이 그렇지 않을까. 어떤 이는 평지에서 시작하고 어떤 이는 오르막부터 시작하는 인생, 둘 다 무엇인가는 얻을 것이다. 무엇을 얻느냐, 그것이 중요한 줄 알았었는데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겠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은 바탕이다. 바탕에 따라 같은 것을 얻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을 나는 목격하며 지낸다. 암癌에 걸렸어도 - 물론 똑같은 암은 없다 - 반응과 처치, 치료, 회복은 각자 다르다. 비슷한 꿈을 꾸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지 않던가. 프로이트가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던 정신을 들여다본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서 대화를 시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르막에서는 원망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힘들더라도 그 너머에 있을 것들을 상상해 내는 힘이 여기 묻혀있다. 곧 나타난 빨간 화살표는 우리가 어제 목표했던 10km가 적혀 있었다. 온 만큼 가면 된다는 말, 좋은 말이다. 남원 143, 긴급 구조 위치 번호, 금계 10.5km.
참나무 그루터기 위에 돌을 쌓았다. 세어보니 열세 개, 완만한 비탈 옆에 서 있다. 하나씩 주워다 세워놓았을 작은 돌탑은 오늘도 그 자리에 있을까.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얼마나 거기 있었을까. 노란 꽃, 보라꽃, 초록 풀이 주위를 둘러싸고 탑돌이 하는 양 조용하다.
청바지를 입고 빨간 가방을 멘 강이가 왼손에는 밀키스, 오른손에는 어디에서 주웠는지 죽은 소나무 가지를 짚고 오른다. 양 볼이 상기됐다. 저 신발은 편할까. 가방에 매달아 놓은 파란색 모자는 뒤에서 출렁거리고 있다. 강이는 엄마 앞에서, 엄마는 강이 뒤에서 힘내고 있다. 숲이 연두 일색이다. 강이는 오른손에 힘을 주고 엄마는 그런 강이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사진에는 말소리가 담기지 않는다. 표정이 다 말해주고 있으니까.
산이는 오렌지색 가방을 메고 양손에 등산 스틱을 쥐고 혼자서 흰 반팔 티셔츠를 입고 걷는다. 우리는 모두 긴 팔인데 제일 씩씩하다. 어제 무릎이 아팠던 사람이 맞는지, 길도 모르면서 쭉쭉 앞에 가고 있다. 파릇파릇한 봄기운이 뒤따라 가고 있는 것이 나는 보이는데 산이는 알까.
서로의 인생이 안는 듯 안기는 듯 포개져 살아가고, 살아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길도 꼭 그와 닮았다. 저 길은 이 길을 위하고 이 길은 저 길을 따른다. 길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게는 길이 있어야 산다. 아이들이 내 길이 되며 내가 아이들의 길이 되는 곳이 바로 세상이다. 삶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거룩해야 한다. 어린것들의 알량한 눈빛에도 엷고 얕은 숨소리에도 연두에서 초록으로 깊어가는 계단을 놔주는 것이 하늘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 아닐까. 길에서는 공동체 정신이 나도 모르게 솟아난다. 같이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솔솔 불어온다.
연못에서 뛰노는 오리가 반가웠나 보다. 산속에서 그럴 줄 몰랐는데 어라, 여기 오리들이 있네! 사소한 것들에 감탄한다. 왼쪽으로 가면 실상사, 오른쪽은 창원 신촌 생태마을, 우리는 어느 쪽으로 왔는지 너희는 기억하냐. 넷이서 거기 갈림길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30년 지나서 이 대목을 꺼내놓고 한바탕 웃을 생각을 하니 벌써 지난 5월 1일이 그리워진다. 그럼 20년 지나서 보기로 할까. 그래봤자 강이가 서른 살이네.....
하나의 생명으로 만난 적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 것을 깨달으며 우리는 서로에게 참한 사람이 되기로 하자. 어린 너희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무엇을 그렇게 오래 속삭이고 싶은 걸까. 나는 내 일기를 쓰듯 산이와 강이 일기를 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걷자, 우리는 걷자. 오늘 나는 내 전성기를 걷는다. 너희가 있어서 비로소 완성되는 지금은 나의 전성기.
최고 높은 곳은 650m, 우리는 줄곧 350m 높이에서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이틀 동안 20km를 걸으면서 500m가 넘는 봉우리를 6개 지나왔다.
등구재를 넘어오면서 강이가 최고로 힘들어했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멈추면 한참 앉아 있고.... 아빠는 그때 두 가지 마음이었다. 돌아갈 거면 여기에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여기부터는 중간에 포기하는 일도 만만찮아서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
그 순간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아빠가 다가가서 강이야, 우리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니까 그만 내려가자 그랬을 때 네가 뭐라고 그런 줄 알아?
어떻게 너는 그 순간 그런 말을 생각해 냈을까?
"아냐, 이건 어버이날 선물이야."
지리산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사연이 바람에 실려 다닌다. 그러다가 꽃이 되기도 한다. 나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지나가는 길손이지만 살갑게 걸었고 정겹게 산을 만지작거렸다. 내 발이 그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사뿐하려고 애썼다. 하늘길은 그 순간에 열렸다. 그래, 어떤 길은 나오고 어떤 길은 마주치고 어떤 길은 열린다. 그 길 뒤로 하늘이 병풍처럼 은은했다. 5월 이파리들이 아치처럼 둥글게 머리 위를 감싸고 길 끝에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하늘이 있었다. 2020년 5월 1일 오후 5시 54분, 우리는 환해졌다. 마음속에 등불 하나 새로 얻어줬다. 그것으로 길이 다 보답해 줬다. 수고했다며 일찌감치 등을 토닥여 주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들었던 말은 열흘이 지났어도 빛을 잃지 않고 피어있구나. 나는 거기에 물을 주고 응원할 생각이다. 네 선물을 앞으로 잊지 않고 오래 간직할 생각이다.
4학년 딸아이의 표정은 의연했고 덕분에 나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강이의 손을 잡고 등구재를 오르면서 아빠는 알았다. 곧 허리도 아파질 테지만 우리는 결국 이 길을 다 걸어갈 것을 재미있게 알았다.
네가 있어서 좋다, 그 말을 아빠는 구호처럼 외치면서 살아야겠다.
지금은 고사리가 맛있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고사리를 뜨거운 물에 데쳤다가 그늘에 말려 놓고 1년 내내 먹는다.
막 빠져나온 산길이 우리 등 뒤로 시커멓게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때 얼마나 대견했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밥상에 올라온 고사리를 보고 감동하는 데에도 사람마다 다르다. 종소리가 그렇다. 종소리에는 도에서 솔이 들어 있다고 한다. 누구는 도를 듣고 누구는 솔을 듣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멀리 흩어지는 종소리는 그 모든 음이 하나로 들리는 순간이라고 그랬다. 타음은 종을 치자마자 사라지는 소리, 원음은 소리가 퍼져 나가면서 멀리 닿는 소리, 여운은 누구나 아는 그 소리, 마음에 남는 소리. 무엇이든 그와 같다. 고사리도 김치도 계란말이도, 사람도 그와 같다.
노을이 공으로 저녁 하늘을 물들이던가.
감동은 결코 시시하게 부는 바람이 아닌 것을 길을 걷는 사람은 끄덕일 것이다. 낮과 밤이 열 번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그날에 어울릴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감동이라고 적는다.
고사리 같은 손은 무엇을 하든 감동이지. 우리는 고사리 같은 마음으로 그 길을 다 걸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짐을 나눠 들면 투정 대신 기운이 난다는 사실을 실천했다. 해가 다 지도록 걸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길이 끝나가는 아쉬움이 영 없지는 않았다. 나는 부자 같았다.
아빠는 더 아프지 않고 너희들 곁을 지킬 수 있도록, 엄마는 훨씬 빨라진 세월에 지지 않고 건강하기를 빌었다.
중학생이 된 산이는 꿈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자신감을 갖기로 했고 11살 강이는 자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명랑함을 간직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 길에게 소원을 빌었다. 진짜 소원은 말없이 전하고 바라는 마음이니까.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씨 뿌리는 마음이니까.
길은 그런 고요한 바람을 기억해 주는 어깨 같은 것이다. 거기 기대어 우리의 바람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모습을 늘 그릴 것이다.
찰칵!
해거름에 바라다본 어느 마을에서 찍은 사진이 보기 좋다. 편안한 음성으로 노래라도 불러보고 싶은 곳이었다. 거기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는 근사했다.
마지막 3Km는 정말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넓게 펼쳐진 다랭이논도 이제껏 그림처럼 보면서 걸어왔던 산촌 마을도 그때만큼은 귀찮고 싫었다.
슬쩍 다음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몸에 열은 나지 않을까, 아침에 깨어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눈에 띄게 걸음걸이가 둔해졌다.
하늘도 자꾸 눈치를 준다. '서둘러야겠어.'
발바닥이 아픈 엄마가 뒤로 처지면 앞서가던 산이가 기다려줬다. 그러면서 엄마한테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것이 제법이었다.
막차가 8시 20분이었지?
완주한 사람들끼리 느끼는 평온함이 우리 사이에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주변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이제 걱정되지 않았다. 배가 고픈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것이 이상했지만 만족감이란 것의 본모습이 그럴 거 같았다.
다리는 아프고 몸은 지쳤어도 어딘가 싱싱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대로 편안한 것, 그저 좋은 것. 무엇보다 우리가 멋져 보이는 것이 '만족감'이란 말 이외에 없었다.
4년, 그동안 많이 놀랐고 걱정으로 보낸 날들도 많았다. 아빠도 아팠고 엄마도 아팠고 너희는 어렸고.
어떻게 지나올 수 있었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했던 순간들이다. 그 긴박했던 고비마다 숨표와 쉼표를 간절하게 부르며 지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연주해 보고 싶은 우리들의 악보 위에 새로운 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둘레길에 찍어놓은 발자국들 하나하나가 밤하늘로 피어오르는 꿈을 꾼다. 지상에서 반짝이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우리는 아늑했다.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