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세차를 하고 싶었다. 봄에는 바람이 부는 만큼 먼지도 많이 날리는 탓에 온갖 것들에 먼지가 자욱하게 쌓인다. 아파트 야외 주차장에 서 있는 차들도 예외가 아니다. 주말에는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던데 그게 또 어중간하다. 예상 강우량 1mm. 모처럼 세차할 마음이 났는데···· 사람을 놀리는 것 같다. 그래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내를 회사에 내려주고 세차장으로 달렸다. 어디쯤에서 마음이 바뀌었을까.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세차할 곳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신호등 앞이었고 나는 직진만 할 수 있었다. 뒤에 차들이 붙었다. 초록불이 켜지고 나는 그 길로 쭉 달렸다. 내가 도착한 곳은 미륵산 주차장. 여기는 따로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미륵산을 오르는 길이 내가 아는 것만 4개나 있는데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골라 걷는다. 골라 입는다. 골라 먹는다, 써놓고 보니 골라 걷는다는 말 어쩐지 필요한 말 같아서 반갑다. 잘 고르지 못하는 편인데 길은 본능처럼 고른다. 표가 나지도 않게, 서운해하지 않게, 나는 길 조련사일지도. 어, 이 말도 좋다. 길 안내자는 들어봤어도 길 조련사는 아마 내가 처음 아닐까? 유레카.
겨우내 좀처럼 밖에 나서지 못했다. 방학에는 일상이 더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고맙게 여긴다. 그래서 아예 놀고 싶은 마음을 접고, 그런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나를 몰아세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란 것이 제 방에서도 편하게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내 눈치를 살핀다. 그것이 또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어깨를 펴고 당당했으면 좋겠는데 기가 죽어서 사람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내 마음을 기른다. 내가 편한 대로 길들인다. 마음이 나에게 대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냉정한 사육사다. 나, 마음 사육사.
그다지 인기가 좋지 않다. 마음의 눈을 보면 내 양육방식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다. 활짝 웃게 해주고 싶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을 통감한다.
오늘 아침에는 그런 마음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여태 못한 세차, 하루 더 미룬다고 해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손을 내민 덕분에 쾌청한 하늘 아래를 걷는다. 내 자존심보다 나는 그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마음이야말로 내 지기知己 아닌가. 사람들은 혼자서 다니냐고 그러는데 '혼자'라는 말이 결코 그렇게 가볍지 않다. 마음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 혼자라고 그러지만 그때에도 반드시 내 마음이 곁을 지키고 있어서 든든하다. 마음 없이 어떻게 그 길을 다 걸었겠는가. 어제 상고대가 핀 월출산이 인터넷 기사에 뜨던데, 거기만 하더라도 스무 번도 더 다니지 않았던가.
혼자 걷는 길은 심심해도 멋스러운 구석이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네 식구가 함께 둘레길을 걷는 것도 정감 있고 즐거운 일이지만 역시 자기自己를 확인하고 싶다면 훌쩍 홀로 떠날 일이다. 1년에 한두 번, 많지 않은 날이지만 스님이 만행을 나서듯 그 시늉을 내며 어딘가에 가버린다. 가고 나서 거기가 어딘 줄 아는 까닭에 설렘도 기대도 없는 출발을 한다. 그래서 중국 대륙을 자꾸 꿈에서 보는 것 같다. 나이가 지천명을 지나서도 명命을 모르는 것이 영 철부지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지우학志于學도 없었고 이립以立이란 것도 없이 세월을 지났던 탓에 마흔이 되어도 불혹不惑할 줄 몰랐다. 나는 여전히 미혹되고 현혹되고 의혹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아직도 잘 모른다. 군자는커녕 사람 노릇도 버거운 날이 많다. 길에 나서면 그나마 바람이 내 부끄러움을 식혀 주고 감춰주는 듯하여 나에게도 친절하고 마음에게도 물을 먼저 권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여긴다. 살기에도 죽기에도 좋은 날을 감상하는 것이 내 숨은 재주가 아닌가 싶다.
'저기 내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 잠시 여기서 기다리세나.'
북아메리카 아팔레치아 깊은 산속을 헤치고 나아가던 인디언이 아까시 이파리를 하나씩 떨어뜨리며 그를 기다린다. 아직 쫓아오고 있는 그를 그는 어느 언덕 위에서 맞이했을까. 돌아서 오고, 돌아서 가는 순환하는 것들은 잊지도 않고 잊히는 일도 없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 땅에 머무는 것이 에너지라면 마음도 기억도 영혼도 모두 에너지다. 기억이 모습을 바꾸더라도 그 안에서 인디언도 나도 서로를 반가워할 것이다. 같이 산을 뛰어다닐 것이다.
시간이야말로 잊지 않겠다는 표징이 되고 약속이 된다. 그는 말에서 내려 다음 열차에 올라탄다. 미륵산에 오르는 일은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한번 달려보는 일. 어떤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시간은 맴을 돈다. 둘 다 잘 가고 있다. 곧게 뻗은 혈관을 타고 내 피가 돈다. 시간을 따라서 내 삶이 순환한다. 미륵산은 거기 어디쯤에 있는 시청 앞 지하철역이거나 신도림, 합정역이 된다. 나는 문래에 내릴까 싶다. 거리 양쪽으로 쇠 깎는 소리, 땅땅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리울 줄이야. 바닥에 절은 새까만 기계기름, 그 냄새가 아직 코끝에 남아있을 줄이야.
산을 걷는다. 숨이 짧아지고 빨라진다. 혼자서도 잡담이 된다. 직선에다 나무를 세워놓고 바위도 놓아둔다. 소품을 챙기듯이 이 높이를 꾸며가며 오른다. 하늘은 언제나 내가 맡지 못할 배경이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어제도 그 생각이 들더라. 이 좋은 햇살에 아이들을 내놓지 않고 누구에게 맡기겠나. 계절을 거닐어 본 적 없이, 밖에 나서지도 않고 그렇게 자라면 얼마나 힘이 들까. 대학로에 있는 김민기 학전 Blue가 문을 닫는다고 들었다. 아름다운 사람, 그 노래를 들으면서 시큰해지는 것이 내 시간은 어디를 돌았던 것일까. 봄기운을 어디 담을 데라도 있으면 좋겠더라. 북 중학교에 택배로 보내놓고 함빡 웃고 싶었다. 4월에는 일찍 투표를 하고 걸으러 가자고 메모를 적어 보내고 싶었다. 강이는 수업을 받다가 깜짝 놀라겠지. 아이들한테 창피했다고 그러겠지...
그렇게 혼자 오르면 빈둥거린다. 해찰하면서 걷는다. 시간을 잊고 만다. 대신 시간이 나를 보듬고 살핀다. 너는 지천명이야, 속삭이며 발아래에도 눈이 되어 준다. 다 읽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두 장이나 석 장쯤 페이지를 남겨놓고 한동안 책꽂이에 꽂아두는 책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배움, 학學이라 부른다. 나는 그것을 익힘, 습習이라고 부른다. 읽은 것들을 익혀둔다. 다 채우지 않고 남겨둔다. 스스로 채워지는 어떤 공기를, 어떤 여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가 익는다. 길에서 나는 읽은 것들을 쓴다. 쓰면서 나는 걷는다. 걸으면서 나는 배운다. 잘 순환하고 있다. 뱃속이 편하면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처럼 작은 일들이 내 삶을 운행한다. 나는 어느새 2호선 전철이 된다.
친구들을 태우고 어디 가서 신발 던지기를 해야겠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옛날 아이들 같았다. 내 젊음에는 아름다움이 없었다. 그래서 못됐다. 나한테 못되게 굴었고 저도 되는 게 없었다. 몇 해 전, 내소사 앞에서 까불며 놀았던 날에 내 젊음이 지나간 것을 알았다. 아쉬워도 쫓아가면 안 된다. 쫓아갈수록 영영 멀어질 뿐이다. 나는 어쩌다 신발 던지기를 생각해 냈을까. 널따란 바위가 거기 있었다. 바위가 침묵을 깨고 우리와 같이 놀았다. 누군가 시끄럽다며 우리를 혼내기도 했지만 바위는 덕분에 즐거웠다고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가며 찡긋 눈짓을 보내지 않았던가.
용기는 소중하다. 좋은 것들을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그것을 꺼내들 용기가 없다면 모두 표피 아래에 머무르고 만다. 싹이 땅 위로 나오고 나서야 나무가 되고 새가 들고 숲이 될 수 있다. 숲이 될 수 있는 용기는 어린 씨앗이 가진 생명력 그 자체다. 살아가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조화 위에 지은 집, 그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용기가 깊이 들어마시는 숨소리다. 용기 있는 사람은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 지하철 1호선이 공연되던 학전 Blue는 어느 역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12월이면 가난한 서학동 성당 강당에서 연극을 연습하던 꼬맹이들은 어디 역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나는 봄날에 미륵산을 오른 것인지, 꿈을 꾸다 온 것인지 모르겠다. 근처 보리밥집에 들러 혼자서 점심을 먹었다. 조그맣게 2인 테이블에 앉았더니 여주인께서 너른 자리에 밥을 차려줬다. 여섯 명이나 앉을 수 있는...
천천히 수저를 들고 맛을 봤다. 다 같이 한 술씩 떴다. 인디언도, 김민기 씨도, 친구들도, 우리 아이들 산이, 강이도.
참, 아내도 부를 걸 그랬다. ㅋ